- 정진호 기자
- 승인 2023.06.1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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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국교 정상화 계기로 야권 통합 목소리 커져…민정당·민주당, 민중당으로 통합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2편에서 계속>
정국(政局)이 혼란스럽다는 건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물리력을 손에 쥔 쪽은 ‘딴생각’을 하기 마련이죠.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비롯한 육군 장교들은 무력으로 주요 시설을 점거하고, 윤보선 대통령을 회유해 장면 국무총리를 사퇴시킴으로써 제2공화국을 무너뜨립니다.
이후 박정희는 입법·사법·행정 등 모든 국가 기능을 군사혁명위원회로 가져갑니다. 이후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표를 바꿔 달고 ‘과업완수 후 시행될 총선거에 의해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무제한에 가까운 권력을 휘두릅니다. 이로써 국회는 해산됐고, 정당을 포함한 사회단체의 모든 정치 활동은 불법으로 규정됐습니다. 민주당, 신민당 등 기존 정당들도 해체됐습니다.
다시 정당 정치가 활성화된 건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1963년이었습니다. 당초 군사재건최고회의는 1963년 초 정당 활동을 허용하고, 3월 이전에 신헌법을 제정하며, 5월에 총선거를 실시해 여름에는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고 발표했는데요. 실제로 1963년 1월부터 정치 활동 재개가 허용되면서 여러 정당들이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가장 먼저 창당된 정당은 민주공화당이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은 박정희를 ‘합법적 최고 권력자’로 만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공화당을 창당합니다. 박정희를 총재로 했던 공화당은 1963년 창당된 후 1980년까지 총 17년 8개월여 동안 계속해서 여당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당으로만 존속했던 덕분인지, 공화당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같은 당명으로 존속한 정당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죠.
한편 공화당은 ‘한국 정당의 모델’로 평가받을 만큼 선진적인 정당이기도 했습니다. 기존 정당들이 인물·파벌 중심의 정당이었던 것과 달리, 공화당은 중앙당·사무처 등 근대적인 조직 형태를 도입한 ‘현대적 정당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모든 정당에서 시행하는 당직자 공개 채용도 공화당에서 가장 먼저 실시된 제도였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운영되는 정당 모델은 김종필이 만든 것이다. 변화를 겪긴 했지만, 중앙당·사무처 중심, 대통령의 총재 겸직 등은 그 전통과 유산이 50년 넘게 지속됐다. 김종필은 이 모델을 만든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는 우리 정당 체제를 아주 허약하게 만들고 국회를 정당 중심이 아닌 정치 중심으로 만들게 됐다는 한계가 있다.”
김형준 명지대 정외과 교수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공화당이 문을 열자, 야권 역시 단일 야당 구성에 나섰습니다. 대표적인 정당이 민정당(民政黨)이었습니다. 제2공화국 시절, 당내 계파 갈등으로 민주당을 탈당했던 구파는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했는데요. 이 신민당 출신인 윤보선·유진산·김영삼 등이 군정 세력에 반대해 만든 정당이 바로 민정당입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구 민주당 신파가 다시 뭉쳐 민주당 재건에 나섰습니다. 1963년 창당된 민주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당 당대표이자 여성 최다선(5선) 의원 중 한 명으로 남아 있는 박순천이 이끈 정당으로, 재건민주당(再建民主黨)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밖에도 김도연·김준연 등이 참여한 자유민주당, 김병로·허정·이범석 등의 국민의당, 장택상이 재건한 자유당 등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공화당과 민정당, 민주당, 자유민주당, 국민의당, 자유당 등으로 이뤄진 ‘일여다야(一與多野)’ 구도는 제5대 대선과 제6대 총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제5대 대선에서는 야권이 민정당 윤보선을 단일 후보로 내세우면서 공화당 박정희와 맞붙었지만 1.55%포인트 차로 석패했고, 제6대 총선에서는 아예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공화당을 과반 여당으로 만들어줬죠.
이처럼 박정희 체제가 공고화됨에 따라, 반 군부 진영에서는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이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한 밑천이 필요했는데요. 대일(對日) 청구권을 통해 그 자금을 조달하려고 했던 겁니다.
“1961년 가을, 고민이 깊어갔다. 혁명정부는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나라의 빈곤을 몰아내고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해법을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다. 때마침 미국의 존 케네디 대통령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11월 14일 정상회담을 갖자고 공식 초청했다. 나는 박 의장의 방미를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협상 타개와 연계하려 했다. 오랜 시간 속에 숙성된 생각이었다. ‘나라를 일으키려면 밑천이 있어야 한다. 밑천이 나올 수 있는 곳은 대일 청구권뿐이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김종필 회고록
당연히 야권과 학생들은 반발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야권이 통합, 단일대오를 형성해 박정희 정권과 맞서야 한다는 요구도 거세졌죠. 결국 민정당과 민주당은 한일기본조약 체결 반대 투쟁을 위해 힘을 합치기로 하고, 1965년 6월 14일 민중당(民衆黨)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로써 정국은 공화당과 민중당의 양당 구도로 재편됩니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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