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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분열한 야권과 신민당의 탄생 [한국정당사④]

marineset 2023. 8. 12. 05:38
또 다시 분열한 야권과 신민당의 탄생 [한국정당사④]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3.06.2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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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탈당으로 분열했던 야권…제6대 대선 앞두고 신민당으로 다시 통합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윤보선 탈당으로 분열했던 야권은 제6대 대선을 앞두고 신민당으로 다시 통합된다. ⓒ시사오늘 김유종

<3편에서 계속>

대한민국 야당사는 ‘분열과 통합의 역사’라고들 합니다. 대통령이라는 확실한 중심이 있는 여당과 달리, 야당은 본질적으로 구심력(求心力)이 약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민중당(民衆黨)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창당 직후부터 윤보선계와 박순천계가 반목(反目)했던 민중당은, 불과 1년도 안 돼 민중당과 신한당(新韓黨)으로 분리됩니다.

민중당 분당(分黨)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시계를 조금 되돌려야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민중당은 민정당(民政黨)과 민주당(民主黨)이 통합한 정당입니다. 그런데 민중당 창당 직전인 1964년, 민정당에서는 윤보선과 유진산이 강하게 부딪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민정당이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했던 ‘언론윤리위원회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자, 윤보선이 유진산을 그 원흉으로 지목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유진산이 공화당 출신 김진만 국회부의장과 밀약(密約)을 맺었다는 소문이 퍼졌는데요. 강경파였던 윤보선은 이를 빌미로 온건파인 유진산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실제로 윤보선은 당원들에게 유진산과 자신 중 한 사람을 택하라는 최후통첩을 날렸고, 결국 유진산은 민정당에서 제명당합니다. 이른바 ‘1차 진산파동’이죠. 이때 상황을 알 수 있는 기사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언론윤리위법 통과를 계기로 표면화한 민정당 강경·온건 양파의 대립은 중도파의 조정에도 불구하고 점점 격화돼 상호 제거 공작으로까지 번져가고 있다. 묵계설로 해서 윤보선계의 강경파와 유진산계의 온건파 간 대립이 열전화한 뒤 이를 조정하고 나섰던 중도파들은 13일 현재 ‘유진산 씨를 제거하지 않는 한 당을 못하겠다’는 윤보선 씨의 강경한 태도에 부딪쳐 조정을 거의 단념하다시피 하고 있다. 윤보선계 강경파는 묵계설에 대한 진부에 관계없이 유진산 씨를 제거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이에 자극을 받아 유진산계도 실력대결을 각오하고 포섭 공작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1964년 8월 14일 <조선일보>
‘민정당 내분 폭발 분위기에 윤 씨, 유 씨 제거를 주장’

하지만 야권 통합 과정에서 유진산 역시 민중당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진산은 통합 직후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윤보선이 아닌 박순천을 지지해 당대표로 당선시키죠. 당연히 윤보선계의 심기는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이미 민중당 안에서는 분열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공화당이 한일기본조약 비준동의안을 국회에서 단독으로 처리하는 일이 벌어지는데요. 민중당은 의원 전원이 총사퇴해 국회 기능을 마비시키기로 의견을 모읍니다. 그러나 의원직 사퇴서가 일괄 반려되자 강경파와 온건파 간 분열이 생기고 맙니다. 강경파인 윤보선계는 의원직 사퇴와 당 해체를 주장한 반면, 박순천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는 국회 내에서 투쟁해야 한다는 쪽으로 돌아섰던 까닭입니다.

이에 결국 윤보선계는 민중당을 탈당,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윤보선을 당수로 하는 신한당(新韓黨)을 창당하게 됩니다. 민중당 창당이 1965년 6월 14일이고 신한당 창당이 1966년 5월 30일이니, 야권이 통합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또 다시 분열의 길을 걷게 된 겁니다. 이후 신한당은 공화당은 물론 민중당과도 뚜렷이 구별되는 행보를 보입니다.

하지만 민중당과 신한당의 ‘각자도생(各自圖生)’ 시기도 그리 길지는 않았습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민중당은 유진오를, 신한당은 윤보선을 각각 후보로 지명한 상태였는데요. 두 사람이 모두 출마해서는 박정희를 막기 어렵다고 판단한 야권은 ‘야당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를 결성, 후보 단일화 작업에 돌입합니다.

대선이 100일여 앞으로 다가온 1월 23일에는 단일화 문제를 양당 대통령후보와 백낙준·이범석 등의 ‘4자회담’에 맡기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노력이 결실을 맺어, 양당은 윤보선을 대통령후보로, 당수를 유진오로 하는 통합신당 창당을 결의합니다. 바로 이 당이 그 유명한 신민당(新民黨)입니다.

야당의 난립 때문에 총선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한 야권은 통합을 추진한다. 민정당과 민주당이 민중당으로 결합했으나 윤보선의 탈당으로 다시 내분에 휩싸인다. 한일회담 반대에 미온적이라는 이유였으나 대표 최고위원 선거에서 패배한 것이 컸다. 이후 윤보선은 신한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결국 민중, 신한 양당은 야당 대통령 후보 단일화라는 여론에 밀려 합당을 선언하고 신민당을 출범시킨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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