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자유당의 몰락과 민주당의 분열 [한국정당사②]

marineset 2023. 8. 12. 05:36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3.06.07 18:05
  •  댓글 0
  • 기사공유하기
  • 프린트
  • 메일보내기
  • 글씨키우기

4·19 혁명으로 자유당 몰락하고 민주당 정권 잡았지만…구파·신파 갈등에 민주당도 분열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4·19 혁명으로 자유당이 몰락하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내부 갈등으로 민주당도 분열의 길을 걷는다. ⓒ시사오늘 김유종

<1편에서 계속>

창당 이듬해인 1956년. 민주당은 제3대 대선을 앞두고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합니다. 이때 신익희가 내세운 구호가 그 유명한 ‘못살겠다 갈아보자’였죠.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던 신익희는 선거 유세를 위해 전주로 가던 중 뇌일혈로 졸도했고,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이승만의 집권은 4년 더 연장됩니다.

1960년 제4대 대선에서는 조병옥이 민주당 후보로 나섰습니다. 하지만 조병옥 역시 선거 과정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선거를 한 달여 1960년 2월. 갑작스런 발병으로 미국에 건너간 그는 미국 월터리드 육군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낫는 대로 지체 없이 달려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죠.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은 단일 후보가 됐습니다. 이변이 없는 한 이승만은 4선에 성공하고, 민주당은 다시 한 번 야당 생활을 해야 할 처지였죠. 그런데 바로 이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자유당이 이승만의 당선에 만족하지 못하고, 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까지 당선시키려다 ‘부정선거’라는 무리수를 둔 겁니다.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획책(劃策)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 유고 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한다는 규정이 있었는데요.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이미 85세였습니다. 자유당 입장에서는 이승만이 임기 중 사망할 가능성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죠. 하지만 자유당의 과욕은 4·19 혁명의 계기가 됐고, 이승만 대통령마저 자리에서 물러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下野)하면서 우리나라 정치 지형은 완전히 재편됩니다. 정치 체제 면에서는 대통령제가 의원내각제로 전환됐고, 의회 구성도 단원제에서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제로 바뀌었습니다. 집권 여당도 교체됐습니다. 개헌 직후 치러진 제5대 총선을 통해 자유당이 사실상 붕괴된 반면, 민주당은 전체 의석의 약 75%를 가져가며 정권을 잡았죠.

하지만 민주당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애초에 민주당은 ‘반(反) 이승만’ 외에는 공유하는 가치가 없다시피 한 정당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을 결속하게 만들었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권력 배분 문제가 대두되자, 잠재돼 있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파벌 싸움’이 시작된 겁니다.

민주당 내에는 두 파벌이 있었습니다. 구파는 구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 계열의 인사들로, 지주(地主) 집안 출신이 많았습니다. 이와 달리 신파는 1955년 9월 창당 당시 새로 참여한 세력들로, 흥사단 계열 인사들과 자유당 탈당파, 관료·법조인 출신들의 연합이었습니다. 이들은 창당 당시부터 사사건건 대립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승만이라는 ‘공공의 적’이 분열을 막아주고 있었죠.

그러나 이승만이 사라지면서 구파와 신파는 권력을 두고 정면충돌하게 됩니다. 민주당의 내분(內紛)은 국무총리 인준 과정에서 표면화됐는데요. 신파의 지도자 격인 장면이 인준을 얻은 뒤 국무위원들을 신파 일색으로 구성하자 구파가 반발하고 나선 거죠. 결국 구파는 별도 교섭단체인 구파동지회를 결성하고 신당 발족을 준비합니다. 신파는 신파대로 95명의 의원들을 포섭, 민주당이라는 이름의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구파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라집니다. 계획대로 신당을 창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당파와, 민주당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협상파로 나뉜 겁니다. 격론 끝에 김도연·유진산·김영삼·김재순·박준규 등의 분당파는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며 분당(分黨)의 길을 걸었고, 협상파는 민주당으로 돌아가 합작파가 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민주당 역시 요직 분배를 놓고 노장파와 소장파, 합작파가 대립했기 때문입니다. 이 중 실권을 장악한 쪽은 노장파였는데요. 이러자 소장파 의원 32명은 신풍회(新風會)를 만들어 따로 움직였고, 합작파 역시 정안회(政安會)를 조직해 독자 행동에 나섰습니다. 노장파 내 비주류들도 중도파를 만들어 신풍회와 제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죠.

이처럼 집권여당이 권력 다툼에 눈이 멀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자, 정국은 어수선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면 내각은 10개월 동안 세 차례나 개각을 실시했는데요. 정책적 이유가 아닌, 신파와 구파 간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다 보니 각료들은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교체되기 일쑤였고, 국정도 제대로 운영될 리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혼란은 나폴레옹을 존경하던 한 군인이 군대를 이끌고 한강다리를 건너는 빌미가 됩니다.

<3편에서 계속>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