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진호 기자
- 승인 2023.05.30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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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우리 정치권에선 종종 ‘뿌리 논쟁’이 일어납니다. 상대 진영의 모태(母胎)를 ‘친일 세력’, ‘종북 세력’ 등으로 규정해 부정적 이미지를 씌우고, 자신들이 정통성을 독점함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전략입니다. 불과 몇 달 전에도 여야 대표가 ‘친일 논란’에 대해 입씨름을 벌였던 것을 상기하면, 상대의 뿌리를 공격하는 책략이 꽤 효과적인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언쟁을 보고 있으면 허무할 때가 많습니다. 얽히고설킨 우리나라 정당사적 특성상, 현존하는 정당들과 과거 정당들을 역사적으로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서로가 서로를 헐뜯기 위해 과거 정당들의 업적을 취사선택(取捨選擇)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에 <시사오늘>은 대한민국 정당사를 간략히 정리해보기로 했습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진짜 기원(起源)’이 어디인지를 살펴봄으로써 두 번 다시 이런 무용한 싸움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무쪼록 본 기사가 정치권의 소모적 논쟁을 끝내고 ‘민생을 위한 정치’를 시작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에 광복(光復)이 찾아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 땅에는 다양한 정당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의 패망(敗亡)으로 정치적 공간이 텅 비게 되자,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김구의 한국독립당, 김성수의 한국민주당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정당들이 깃발을 들고 나섰죠.
그러나 정당의 난립과는 별개로, 제대로 된 정당 정치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경험 부족도 경험 부족이지만, 제도적 기반이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다 보니 ‘폭력적 경쟁’이 이뤄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의 표현대로, 이 시기 우리나라 정치는 ‘목숨을 건 이념적·계급적 투쟁’에 가까웠습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찾은 뒤에도 정당 정치는 활성화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우리 정치 여건이 성숙하지 못했던 데다, 이승만 대통령부터가 ‘정당무용론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은 특정 정파의 지도자이기보다는 정파를 뛰어넘는 국부(國父)가 되기를 원했고, 이로 인해 정당들은 힘을 발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1948년 5월 10일 열린 제헌 국회의원 선거만 봐도, 전체 의원 200명 중 42.5%인 85명이 무소속 당선자였습니다.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총선에서는 무소속 당선자가 126명으로 전체 의원 210명 중 60%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정당보다는 개인의 인기가 우선시되는 시기였던 거죠.
그랬던 대한민국 정당 정치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건, 아이러니하게도 ‘정당무용론자’인 이승만 덕분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선출했습니다. 유진오가 기초한 제헌헌법 초안은 대통령의 권한을 상징적 국가원수로 제한하고, 의회에서 선출하는 국무총리가 실권을 갖는 내각책임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이 미국식 대통령제를 요구하면서 마찰이 생기자, 4년 임기에 1회 중임이 가능한 미국식 정부통령제를 채택하되 국회의원들이 정부통령을 뽑는 내각제적 요소를 첨가하는 방향으로 타협이 이뤄집니다. 실제로 1948년 7월 20일 치러진 제1대 대선에서 이승만은 재석 의원 196명 중 180표를 얻어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죠.
하지만 제2대 총선에서 이승만 지지 세력이 대거 낙선하자 ‘정당무용론자’ 이승만의 심경에 변화가 생깁니다. 국회에 친(親) 이승만계보다 비(非) 이승만계가 더 많아지면서 국회 간선제로는 재선이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승만은 간선제를 자신에게 유리한 직선제로 바꾸는 개헌을 추진하기로 마음먹었죠.
문제는 국회 내에 이승만을 도와줄 수 있는 세력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에 이승만은 직선제로의 개헌과, 대선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해줄 정당을 창당할 계획을 세웁니다.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정당이 자유당이었습니다. 이승만이 몸담았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연합체에 가까웠다고 보면, 자유당은 사실상의 대한민국 최초 여당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이때까지도 정당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의 정치 구도는 아니었습니다. 여당이기는 했지만 자유당 역시 이승만이라는 인물 중심의 사당(私黨) 성격이 강했고, 야당들 역시 같은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지지부진(遲遲不進)하던 정당 정치가 기지개를 켠 건,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으로 반(反) 이승만 세력이 결집한 뒤였습니다.
1950년 강압적으로 국회의 대통령 선출권을 폐지하고 직선제로 바꾼 이승만은 1954년, 급기야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 제한을 면제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국회 표결에서 재적 203, 재석 202, 가 135, 부 60, 기권 7로 개헌 통과 정족수에 한 표가 모자라 부결되고 맙니다.
하지만 자유당은 부결 선포 이틀 뒤인 11월 29일, 사사오입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개헌안의 통과를 선언했습니다. 재적의원 203명의 수학적 2/3은 135.333…인데, 0.333…은 사사오입 원칙에 따라 버릴 수 있는 수이므로 203명의 2/3은 135.333…명이 아니라 135명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즉, 135명이 찬성했으니 개헌안이 통과됐다는 논리였죠.
그러나 당시 헌법은 ‘2/3 이상의 찬성’이라는 조건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135는 135.333…의 ‘미만’인 숫자이므로 자유당의 주장은 명백한 궤변(詭辯)이었습니다. 이러니 정치권의 반발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특히 힘을 모으지 않고는 자유당의 횡포에 맞설 수 없다고 판단한 민주국민당 의원과 무소속 의원 등 60여 명은 1954년 11월 30일, ‘호헌동지회’라는 명칭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하며 신당 창당에 돌입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자유당의 탈당파, 장면·정일형 등의 흥사단계가 가세하면서 1955년 9월 18일, ‘민주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이 창당됩니다. 이 민주당이 바로 더불어민주당이 자신들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그 민주당이죠. 이로써 대한민국 정당사에 최초로 ‘본격적인’ 야당이 출현했고, 집권당과 야당 간의 정당 경쟁도 막을 올립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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