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미국대통령 vs 한국대통령

marineset 2023. 5. 27. 02:31
[칼럼]레이건이 부러운 이유

[뉴스메이커 2004-06-20 21:44]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때보다 퇴임 후에 더 많은 인기를 누리는 정치인이다. 세계의 분쟁지역을 다니며 평화조정자의 역할을 하면서 손수 연장을 든 목수가 되어 집짓기운동에도 나서는 등 퇴임 후의 활동이 재임 시절의 활동보다 훨씬 더 돋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재선엔 실패했지만 퇴임 후의 활동으로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씻어냈다.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무산되었지만 1994년 평양과 서울을 방문, 남북정상회담의 합의를 이끌어낸 사람도 카터였다. 그가 얼어붙었던 남북관계에 화해의 물꼬를 트고 귀국하자 부르킹스 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 그가 처음부터 전직 대통령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이라는 말로 카터의 업적에 조크성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비단 카터에 국한하지 않고 미국인들은 대체로 전직 대통령 평가에 관대할 뿐 아니라 공과(功過)가 엇갈릴 때도 '과'보다는 '공'을 부각시키는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게다가 링컨센터나 케네디공항 등의 명칭에서 보듯 공항이나 유명 건축물, 길거리에 전직 대통령의 이름을 붙여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비록 실패한 대통령이라도 그의 이름을 붙인 기념도서관 하나 정도는 반드시 세우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며칠 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미국 전체가 애도의 물결에 휩싸이고 모든 신문-방송이 과잉보도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레이건의 업적을 기리는 기사와 프로그램으로 뒤덮은 것도 전직 대통령을 떠받드는 미국인들의 정서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냥 떠받드는 정도가 아니라 전 국민적인 존경과 함께 역사적 영웅으로 미화하고 있다. 체니 부통령은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레이건 대통령은 역사적 인물을 넘어서 미국과 세계가 가장 필요할 때 신의 섭리에 따라 나타난 인물"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미국이 거국적인 레이건 신화 만들기에 몰입되어 있는 가운데 '레이건의 실정에 눈감아선 안 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영국의 일간 〈인디펜던트〉지는 레이건이 재임기간 중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그라나다를 침공했으며 이란에 무기를 팔아 그 돈으로 니카라과의 우익반군을 지원하는 실책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엄청난 재정 적자와 함께 미국의 빈부격차를 심화시킨 인물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이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이 거국적 추모 분위기 속에 레이건 신화 만들기에 열중했다. 전통을 지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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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람보`시대를 연 `강한미국`의 상징

[발췌]세상사는이야기 | 2004-06-07 20:30:59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이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현지시간으로 5일 오후 2시께 9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타계소식이 전해지자 각국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성명이 쏟아졌다. 미국내에서도 이같은 애도 분위기는 마찬가지다.

레이건은 재임시는 물론, 지금도 미국인들에게 인기좋은 대통령으로 남아있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 2001년 대통령 취임시 "나도 레이건 대통령처럼 되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다.

레이건은 대중을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언제나 미소짓는 표정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그는 아주 복잡한 일도 단순하고 과감하게 처리했으며 큰 틀만 직접 관장하고 세세한 것은 부하들에게 믿고 맡겼다.
대중적 인기와 함께 '강한 미국'의 상징
레이건 시대는 영화 '람보'가 상징한다. 지난 1983년 개봉된 영화 람보는 근육질 영화배우 실베스타 스텔론이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그린베레 출신 존 람보로 등장, 혼자 수백 수천명의 적을 해치우는 액션 영화다.

당시 '미국적인 영웅'을 열망하던 대중의 정서와 맞물려 큰 인기를 끌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람보로 등장하는 패러디 영화 포스터가 유행했던 것과 이와 관련이 있다. 그는 대중적 인기와 함께 '강한 미국'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레이건이 지난 1980년 대선에서 카터를 꺾고 등장하기 직전 미국민들의 자존심은 형편없이 떨어졌었다. 베트남 전 패배의 악몽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도하차한 사건의 여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이란 인질 사건도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구겼다.

1979년 11월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친미 팔레비 정권이 무너졌다. 과격파 학생들은 테헤란의 미 대사관을 점거하고 52명을 인질로 잡았다. 1980년 4월 미 특수부대가 인질구출 작전을 펼쳤으나 헬리콥터가 사막에서 서로 충돌해 추락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 '강한 미국'을 역설하며 등장한 게 레이건이다.

부시 대통령은 레이건의 사망에 "미국으로서 슬픈 날"이라며 "레이건 치하에 "미국은 분열과 의혹의 시대를 종식했으며 그의 지도력하에 전 세계는 두려움과 독재의 시기에 종말을 고했다"고 평가했다. 미 민주당 대선후보인 존 케리 상원의원은 "레이건 전 대통령의 조국애는 전염과 그 영향력이 강력하다"고 말했다.

1980년대 레이건과 굳건한 영·미 보수동맹을 구축해 이념적·정치적 친분을 같이했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그는 진정 위대한 아메리칸 히어로였다"고 애도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그는 위대한 통치자였다"며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과 신념의 힘으로 역사에 깊은 자취를 남길 인물"이라고 애도했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레이건의 유산
영국 로이터 통신은 '레이건의 보수주의 혁명은 아직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평했다. 이런 평가가 가능한 것은 레이건 시대의 경제적·정치적·군사 정책이 여전히, 특히 보수 정권에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81년 집권한 레이건은 1989년 백악관을 떠날 때까지 소비를 활성하한다는 명목하에 세금을 감면했고, 정부 기구의 대폭적인 축소와 사회보장비의 삭감을 통한 '작은 정부'를 추구했다. '레이거노믹스'라 불리던 그의 경제정책은 철저한 공급위주로 정부가 개인과 기업에 덜 간섭할 수록 경제는 활성화된다는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철의 여인' 영국의 대처 수상처럼 레이건도 노조 파업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철처하게 힘을 바탕으로 미국의 가치를 실현하려고 했다. 1983년 카리브해의 인구 11만명의 나라 그라나다에 좌익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자 미국은 직접 침공했다. 레이건은 옛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면서 국방비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레이건은 낙태를 반대하고 학교 기도를 권장하는 등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미국적 가치'를 내세워 보수적 입장을 강조함으로써 미국 사회 전반이 보수 기조를 띠었다.

이른바 오늘날 신보수주의라고 불리는 정책들의 뿌리는 멀리 레이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 부시 정권도 부자들에게만 혜택을 준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세금 감면 정책을 펴고 있다. 국방비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것도 비슷하며, '악의 축'이라는 말의 저작권도 실상 레이건의 '악의 제국'란 말에 있다.

오늘날 MD의 원조 전략방위계획

레이건은 1983년 전략방위계획(SDI)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대륙간탄도탄(ICBM)을 비롯한 옛 소련의 미사일을 비행 도중에 격추시키는 방법에 관한 연구계획을 말한다. 발사장치를 우주 또는 지상에 배치, 미사일이나 핵탄두를 어느 비행단계에서 파괴하는 것이 목표였다. SDI는 이러한 미사일이나 핵탄두의 파괴가 현재 및 가까운 장래의 기술로 가능한지의 여부를 약 10년에 걸쳐 연구하는 계획으로 총 300억달러가 투입됐다.

전략방위계획은 이른바 '우주 전쟁'으로 불렸다. 이에 대해 옛 소련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1985년 3월 제네바에서 열렸던 미·소 포괄군축협상에서 최대 쟁점이 됐다. 그러나 지난 1987년 중거리핵폐기협정이 맺어져 미국과 옛 소련은 사정거리 500~5000㎞ 이내의 모든 중거리핵미사일들을 폐기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의외의 결과는 일단 지난 1985년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신 사고에 기반한 유연한 태도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많은 정치 분석가들은 레이건의 전략방위계획 등 막대한 군비 투자에 도저히 맞상대 군비경쟁을 벌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옛 소련이 굴복한 것으로 본다.

레이건의 힘을 바탕으로한 대 소 군사경쟁이 결국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레이건에게 '냉전을 종식시킨 인물'이라는 평가가 붙여진다.

대중적 인기 여전...그러나 정책성과에는 이견 많아
그러나 레이건의 여전한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부정적 정치유산에 대한 비판도 없지 않다.

레이건은 '작은 정부'를 주창했으나 그가 떠날 때 미 행정부 조직은 훨씬 더 커져 있었다. 그가 처음 백악관에 들어왔을 때 1조달러였던 미 연방정부의 예산적자는 그의 퇴임 무렵 무려 3조 달러로 늘어났다. 그는 애초 교육부와 에너지부 등 2개 부를 폐지하겠다고 공언했으나 퇴임 때 이 조직은 그대로 였고 오히려 다른 정부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란-콘트라 사건도 제2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비화될 뻔 했었다. 지난 1985년 레바논에서 미국인 몇명이 이란의 후원을 받는 테러 조직에 납치됐다. 미국은 이 미국인 인질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이란에 몰래 무기를 수출했다.

친미 팔레비 정권 때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무기를 수입했던 이란은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미제 무기의 운용을 위해서 부품 등의 수입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이 작전을 지휘한 미 해병대 올리버 노스 대령은 이란에 무기 대금을 과다 청구해 그 이익금을 니카라과의 좌익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항하던 우익 콘트라 반군 지원에 사용했다.

레이건은 카터 전 대통령의 우유부단한 이란 인질 사건 처리를 맹비판했으나 자기 정권이 '인질 석방을 위해 테러범과 흥정하지 않는다'는 미국 외교의 대 원칙을 깼다. 동시에 반군에 대한 군수지원을 금지한 미국 법을 행정부가 위반했다는 점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또 레이거노믹스는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지만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지고, 미 절대 빈곤층이 오히려 늘어나는 등의 문제가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전체 사회의 부가 커지면 결국엔 물방울이 아래로 떨어지듯이 사회 구석구석에 내려갈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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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같은 미국에 비해 우리는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이 없다. 우리의 헌정 50년사가 잦은 정변과 장기집권 등으로 일그러진 데다 그동안 새로 등장한 집권세력은 전 정권의 비리와 무능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려 했기 때문이다. 민주당 정권은 자유당 정권을 종신 독재정치로 단죄했고 5-16 이후의 군사정권은 장면 정권 시대를 무능과 혼란의 시기로 규정했다. 이 과정에서 전직 대통령은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부정(否定)의 정치'가 이 땅에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이 없는 풍토를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게다가 정권의 조그만 과오도 용납하지 않고 필주(筆誅)를 가하는 동양 사회 특유의 춘추(春秋) 전통도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을 없는 또 하나의 원인이다. 공자가 지은 '춘추'는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했다는 정론직필의 역사서이긴 하지만 요순(堯舜) 시대의 도덕적 인의(仁義)를 잣대로 삼는 지나친 이상론 때문에 정권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 측면이 더 부각되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같은 춘추필법 아래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건국공로나 장면 정부의 제도적 민주주의 정착 노력,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업적,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등의 '공(功)'은 그보다 크게 부각된 '과(過)'의 짙은 그늘에 묻혀버리고 만다. 건국 50년이 넘도록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이 단 한 명도 없이 남의 나라 전직 대통령을 부러워하고 있으니 참으로 쓸쓸한 일이 아닌가.


이광훈〈경향신문 논설고문〉

사진편집 by ba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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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노스(Oliver North)/ 과거와 현재

이란-콘트라 사건 Iran-Contra Affair

레이건 행정부 시절인 1986년 10월 터진 이 사건은 이란에 잡힌 미국인 인질을 풀어주는 대가로 미국이 대통령 승인하에 이란에 판매금지된 무기를 밀수출하고,수출대금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반군 게릴라(콘트라)에게 지원한 일이었다.
사건의 전모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자 미국 의회는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상?하 양원 합동청문회를 열었다. 그러나 비밀공작의 주역이던 국가안보국(NSA) 소속 올리버 노스 해군 중령은 묵비권으로 일관했다. 통치 차원의 외교행위라는 논리였다. 미국 법원은 통치행위라도 적법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위헌이라며,노스 중령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노스 중령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탄핵을 면할 수 있었다.

올리버 노스 Lt. Col. Oliver North

무공훈장을 받은 해병, 베스트셀러 작가, 기업의 창업자, 전국방송 라디오쇼의 진행자, 3개의 미국 특허 발명자 그리고 미국 상원의원 후보였던 올리버 노스 또는 그가 불리기 좋아하는대로 "올리"는 텍사스주 샌 안토니오에서 태어났으며 아나폴리스에 소재한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22년간 미 해병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전투에서의 용맹함으로 은성무공훈장, 동성무공훈장과 전투중 입은 부상으로 인해 두 개의 명예 전상장을 수여받았다.

레이건 내각의 국가 안보 위원회 참모로 임명된 노스는 그레나다 섬에서 804명의 학생을 구출하는 계획에 관여했으며 유람선 Achille Lauro 호 납치범들의 대담한 생포에 큰 역할을 했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의 테러리스트 기지 습격 계획을 도운 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암살단 아부 니달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노스의 레이건 내각의 니카라과의 반공산 자유 전사 지원 연루와 레바논의 베이루트 억류 미국인질 구출로 노스는 국제적으로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노스는 옥스포드, 캠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와 수많은 미국 대학에서 강연했다. 보수적이고, 논쟁을 좋아하고, 외고집스럽지만 소위 이란-콘트라 청문회동안과 1994년 상원의원 선거전에서 세계를 전율시킨 카리스마적인 몸가짐은 여전하다.

노스는 자서전 Under Fire: An American Story 를 썼으며 다수의 군사 스릴러 소설을 저술했다.

노스는 우익 라디오 토크쇼 "Common Sense"를 많은 미국의 방송국을 통해 진행하고 있다. 또한 FOX 뉴스 텔리비전의 "War Stories with Oliver North" 진행자와 CBS 의 시리즈 JAG 에서 가끔 출연하는 작은 역을 맡고 있기도 하다.

노스는 이라크전 기간동안에는 폭스뉴스의 종군 리포터로 참가했다. 그는 해병대와 동행했다.

코스타리카 서부 해안에서 가장 북쪽의 곶들 중 하나인 "Ollie's Point" 는 니카라과로 가던 길에 도착하여 짐을 싣던 노스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세계적 수준의 서핑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출처]네이버 ourterms (2004-05-11 04:42 작성, 2004-05-12 21:52 수정)


Oliver North

Combat-Decorated Marine, Best-Selling Author, Former U.S. Counter-Terrorism Coordinator
Oliver North is a combat-decorated Marine, best-selling author, founder of a small business, inventor with three U.S. patents, syndicated columnist, former host of the radio’s Common Sense and the host of War Stories on the Fox News Channel, yet claims his most important accomplishment as being "the husband of one and the father of four."
 His reports from Iraq as an embedded journalist were hailed by many as the best coverage during the war. North served 22 years as a Marine and was awarded the Silver Star, the Bronze Star for valor and two Purple Hearts for wounds in action. Assigned to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Staff in the Reagan administration, Colonel North was the United States government's Counter-Terrorism Coordinator, was involved in planning the rescue of medical students on the Island of Grenada and played a major role in the daring capture of the hijackers of the cruise ship Achille Lauro. His best-selling books include “Under Fire”, “Mission Compromised”, “The Jericho Sanction” and “War Stories.” Oliver North is also the founder of Freedom Alliance, a foundation which provides scholarships for the sons and daughters of service members killed in action.
 


(注) 한국의 전직대통령을 위하여 희생양이 된 여러 보좌관과 참모들을 올리버 노스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에도 올리버 노스는 존재한다 / by ba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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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 [Contra]

Contrarevolucionario(반혁명분자) 또는 Contrarevolucion(반혁명)의 약어이다. 1979년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의 혁명이 성공하여 소모사정권이 붕괴되고 산디니스타 좌익정부가 수립된 이후, 반혁명 세력들은 온두라스와 코스타리카에서 반군을 조직하고 니카라과에 대한 무력침공을 꾀하였다.

콘트라 반군은 크게 두 세력이 주축이 되었다. 주로 혁명에 의해 타도대상이 되었던 소모사일가 독재체제의 잔당으로 구성된 니카라과민주세력(FDN)이 온두라스에서, 혁명과정에서 배반한 로베로를 지도자로 하는 혁명민주동맹(ARDE)이 코스타리카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혁명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쟁준비를 했다. 당시 미국은 쿠바의 공산화 이후 남미 각국에서 친미적인 정부에 대항하는 혁명세력의 활동이 왕성해지면서 남미 전체가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서 산디니스타 정권이 엘살바도르 반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온두라스와 코스타리카에 대한 군사공격까지 불사하면서 남미의 혁명세력을 지원하는 행위는 미국을 더욱 자극하는 것이었다.

1981년 9월 미국은 콘트라반군에게 자금공급, 산디니스타군의 이동 및 위치에 관한 정보제공, 통신수단을 이용한 지원 등 간접적인 지원을 시작했다. 그후 1986년에 ‘콘트라 원조 1억 달러 법안’이 하원에서 통과되면서 군조직 및 장비지원과 같은 직접적인 지원을 공공연하게 행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986년 11월 미국이 레바논에 억류된 인질을 석방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이란에게 무기를 밀매하였는데, 그 수익금의 일부가 콘트라에 대한 지원에 전용되었던 ‘이란-콘트라 사건’이 폭로되어 당시 레이건 정권에 최대의 시련을 안겨주기도 했다.
콘트라 반군은 1988년 3월 산디니스타 정부와 휴전협정을 체결한 뒤 온두라스 국경지대로 물러나 별다른 군사작전을 벌이지 않은 채 은둔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89년 9월 7일 온두라스 텔라에서 중미 5개국(온두라스,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열고 중미평화정착을 위해 콘트라 해체방법 및 시한 등에 관해 합의하였다. 결국, 1990년 2월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친미·보수세력을 대표하는 차모로가 당선되면서 그 존재가치를 잃게 된 콘트라 반군은 곧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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