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한국의 화교들

marineset 2023. 5. 27. 02:28
[한국화교의 역사]korchinese.hwp
[華僑企業의 對中國 進出 現況과 特徵 ]chinese business.hwp
[서울차이나타운 홈페이지]


용틀임하고 있는 한국의 화교들

글 : 김 재 환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그녀의 외모는 보통의 한국 여대생들과 다를 바 없었다. 유창한 한국어에 여대생 특유의 발랄함도 그랬다. 이화여대 복식디자인학과 3학년생인 손만홍(21)씨는 화교 4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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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디자이너 지망생인 손씨는 장차 중국 대륙에서 자기 이름으로 된 브랜드를 만들어낼 꿈을 갖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 세대가 사업 아이템으로 가장 보편적인 중화요리점을 택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이다.

그녀는 “아버지 세대는 너무 좁고 보수적으로 살아왔다”며 “젊은 세대들은 음식점이 아닌 다른 길을 개척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손씨는 “나는 중국인이지만 한국에서 태어나고 살았기 때문에 내 정체성은 한국과 중국의 ‘중간지대’에 있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중국인과 한국인 사이에 존재하는 ‘한국화교’다.

화교들이 초기 한국에 올 때는 칼을 세자루 갖고 왔다는 ‘전설’이 있다. 청나라 출신으로서 변발(앞머리는 밀고 뒷머리는 따는 스타일)을 하기 위해 머리를 자르는 칼이 첫번째고, 초기 중국 상인들이 다루던 주요 품목인 포목을 자르는 게 두번째 칼이다.

세번째는 요리를 하기 위한 주방용 칼이다. 손만홍씨의 아버지 손덕춘(49)씨는 인천의 차이나타운에서 ‘자금성’과 ‘태화원’이라는 중화요리점을 운영한다. 변발이 없어지고 중국 포목상들이 사라지면서 두개의 칼은 쓸모가 없어졌다. 손덕춘씨는 생존을 위해 마지막 남은 주방용 칼을 선택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오래 전에 사라진 유명 음식점 ‘중화루’의 요리사였고, 아버지 역시 1백년 역사를 가진 인천 ‘공화춘’의 마지막 주방장이었다.

1970년대 이후 주변의 화교들이 하나둘씩 해외로 떠날 때 손씨 역시 희망없는 한국 생활을 접고 대만에 정착하기 위해 그동안 번 돈을 모아 대만에 집을 샀다. 그러다 지난 1998년 외국인 부동산 소유 제한 규정이 철폐되면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한국 땅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최근 들어 인천의 중국인 거리에 활기가 다시 살아난 것도 이런 결심을 더욱 부추겼다.

대만의 부동산을 모두 팔아 자신의 고향인 인천 북성동에서 중화요리점을 차렸다. 그의 식당은 날로 번창하고 있지만 자신의 아이들이 가업을 잇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는 “이제 화교들에게 남은 마지막 칼도 없어질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자녀들이 더 이상 한국에서 자장면집을 경영하는 존재로 남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은 중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이면서도 오랫동안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였다. 한국의 화교사회는 1백2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오랫동안 정체 상태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국의 화교사회는 달라지고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및 대만과의 국교 단절이 일차적인 계기가 됐다. 대만과 국교를 단절하던 그해 대만 국적을 가진 한국 화교들은 명동에 모여 울분을 토했지만 그 눈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중국이 한국의 최대 교역국으로 떠오르면서 이들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조치가 철폐되고 2002년 영주권 제도가 실시되면서 이들은 한국의 주류사회에 속속 편입되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젊은 세대의 변화다. 이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아버지 세대와 달리 경제성장의 혜택을 받고 자란 자신감에 넘치는 세대다. 부모 세대가 친대만·반중국 성향을 보였지만 이들은 그런 이념이나 역사로부터도 자유롭다. 활발해진 한·중간 경제교류는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중화총상회의 원국동(46) 회장은 “3, 4세대 한국 화교는 개방적인데다 전문직으로의 진출이 활발하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언어나 문화에서도 ‘한국화’됐다”고 말했다. 나이 어린 세대일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서울 연희동의 한성화교학교에서 만난 유선춘(16)양은 자신에 대해 “중국인이라기보다는 한국인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고 말했다.

한국 화교의 결속력은 유달리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교 가운데 90% 이상이 산둥(山東)성 출신으로 지연으로 얽혀 있는 데다 대부분이 한국의 화교학교 출신이다. 한국 화교는 대략 2만4천8백여명 규모로 추산되는데 이들 중 많은 수가 해외로 진출해 있어 상주 화교는 1만8천여명 규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교적 소규모인 이들 사이에서 통혼이 거듭되면서 한두다리 건너면 모두 친인척 관계로 연결돼 있다. 혈연과 지연·학연으로 뭉친 사회인 것이다.

화교는 전세계 90개국에 5천만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 화교는 한때 8만명을 넘어서기도 했으나 미국이나 대만 등지로 2차 이민을 떠나면서 그 숫자가 계속 줄어들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하는 1차 이민에 이어 또다시 한국 화교들이 ‘디아스포라’(離散)를 감행한 것은 한국 정부가 이들에 대해 지속적인 차별정책을 펴왔기 때문이다. 역대 한국 정부의 화교정책은 화교 억제정책으로 유명한 말레이시아의 ‘부미푸트라’(抑華扶馬·중국인을 억제하고 말레이계를 지원하는 것)정책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한국 화교의 전성기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이전까지의 시기다. 이들은 주로 서울·인천을 근거지로 직물·잡화·조선토산품 등의 무역업이나 요식업에 종사하면서 그들 특유의 상거래 문화를 형성해 왔다. 해방 이후 정치적 혼란기는 화교들의 최전성기였는데 이 당시 화교 인구는 6만~8만명에 달했다. 1946년에는 한국의 전체 수입 총액 중 82%를 차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1948년 한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본격적인 화교 차별정책이 시작되자 이들의 경제활동은 급격하게 위축됐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시기에 실시된 통화개혁으로 화교들의 현금은 하루 아침에 휴지조각이 됐다. 화교들은 부동산보다 현금 보유를 선호해 큰 타격을 받았다.

손덕춘씨는 지난 60∼70년대 화교의 처지를 생각하면 한국 정부가 야속하기 그지 없다. 1961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의 시행과 10년 뒤 실시된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으로 한국 화교는 1가구·1주택, 그것도 주택면적은 2백평 이하, 점포는 50평 이하로 제한당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 화교들이 한국을 떠났다. 1969년부터 한성화교학교의 교사로 일해온 소상량씨는 “70∼80년대에는 우리 학교 학생수가 2천6백명 정도였지만 최근 6백80여명선으로 줄었다”고 탄식했다. 1973년에는 중국 음식점에서 쌀밥 판매를 금지할 정도로 한국 정부의 화교 억제책은 유난스러웠다. 일본 정부는 한국이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비판할 때마다 한국내 화교에 대한 차별정책을 거론하기도 했다.

서울 명동과 소공동 일대에 형성됐던 차이나타운은 70년대 초 도심재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 사라졌다. 당시 서울시는 18층 규모의 화교회관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시청 광장 앞의 화교상가를 철거했지만 끝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화교들은 당국의 조치에 항의하고 분통을 터뜨렸지만 결국 나머지 땅까지 헐값에 팔고 한국을 떠났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은 화교들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화교들의 오랜 숙원이던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 조치가 철폐됐던 것이다. 당시 정부는 외국인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관련 법규를 검토하던 중 외국인에게는 2백평 미만의 토지만 소유가 가능하다는 규정을 ‘발견’하고 서둘러 이를 개정했다. 한국 경제의 세계화·개방화가 결과적으로는 소외됐던 화교들에게 2차 이민을 포기하고 한국에 정착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한국을 떠나 미국 등지로 이주한 화교들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편이다. 미국내 한국 출신 화교들은 1만8천명 정도 된다. 미국에 진출한 다른 화교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3∼4세대를 이뤘음에 비해 미주 이민의 역사가 짧은 한국 출신 화교들은 이제 갓 1세대를 이루고 있다. 여인량 재미한국화교협회 회장은 “미국내 한국 출신 화교의 자산 규모는 약 1천8백억달러 규모”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중화요리점을 하다 1988년 미국으로 이주해 지금은 잡화점과 아동용 가구 체인점 10개를 소유할 만큼 성공을 거뒀다. 그는 미국내 한국 출신 화교들은 한국 동포들과 더 잘 어울리면서 한국식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에 남은 화교들은 “그나마 돈을 모은 화교들은 일찌감치 한국을 떠났고 남은 사람들은 떠날 돈도 없는 쭉정이들 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화교들이 전통적으로 상업에 능한 광둥(廣東)성이나 푸젠(福建)성 출신임에 비해 한국 화교들은 농업기반사회였던 산둥성 출신이다. 화교경제를 연구하는 박정동 인천대 교수는 “혈연·지연을 강조하는 화교들의 문화로 볼 때 경제적으로 성공한 광둥·푸젠성 출신의 동남아 화교들과 경제적 연계를 꾀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도 한국 화교의 취약점”이라고 분석했다. 전세계 화교 자본이 약 2조달러 규모로 추산되지만 한국의 화교들은 차별정책 때문에 이렇다 할 자본을 축적하지 못했다.

현재까지도 화교의 경제활동은 음식업과 잡화업·중의약업이 중심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한·중간의 무역업이 새로운 개척 분야로 떠오르고 있다. 인천의 차이나타운에서 인천 중구청을 도와 중국인 투자 유치를 맡고 있는 화교 3세대 서학보씨는 대만에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역이민자다. 대만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정착하려 했으나 한·중간 무역교류가 빈번해지면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중국의 농산품과 한국의 공산품을 중개하며 짭짤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인테리어사업을 하고 있는 주홍운(39)씨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는 자신의 사업에 필요한 자재를 중국으로부터 공급받아 한국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는 “부모 세대와는 다른 일을 하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했다”며 “화교도 다른 분야에 진출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 화교의 달라진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아마도 현대자동차 베이징 사무소 소장인 담도굉(45) 이사일 것이다. 담이사는 같은 회사 설영흥 고문과 함께 화교에 대한 배타성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주류사회에 진입한 화교로 평가된다. 현대정공에 입사하면서 현대그룹과 인연을 맺은 그는 1999년 현대자동차로 자리를 옮긴 뒤 이 회사의 중국 진출에 앞장선 인물이다. 현대정공 입사 당시 그는 현대그룹이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재형저축·직장의료보험·신용카드 등에 가입하거나 발급받는 선례를 남겨 다른 화교들도 동일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취업을 위해 여러 회사에 원서를 쓰면서 응모 자격에 ‘대한민국 국민이자 군필자’라는 조항이 단서로 붙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런 제한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대그룹의 유일한 화교 출신 직원이 됐다. 1999년 기아자동차 베이징 사무소 소장에 이어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만 8년 동안 중국에 근무하며 중국 시장 개척에 나섰다. 그는 화교출신이라는 장점을 살려 중국 정부와 원만한 협력 관계를 이끌어내는데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담이사는 “후배들에게 화교들도 기업내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다면 세계적인 기업에서 중역이 될 수 있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담이사의 경우는 젊은 세대 화교들에게 하나의 모델 케이스가 될 것이다.

이제 젊은 세대 화교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의 장이 열리고 있다. 아마도 내년 10월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화상대회도 그런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언론들은 앞다투어 화상대회를 계기로 한국에도 화교자본이 밀려들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동안 침체됐던 한국 화교사회도 이를 계기로 새로운 기대에 부풀어 있다. 한국의 화교들은 1999년에야 세계화상네트워크에 가입했고, 그 후 4년만에 이같은 대규모 대회를 유치했다. 화교들은 이를 두고 “미국의 영향력이 일방적이었던 한국에 중국의 힘이 밀려오는 조짐”이라고 파악한다.

세계화상대회를 유치한 한국 중화총상회의 원국동 회장은 이 대회를 위해 인천 경제자유구역에 1백만평 규모의 차이나타운 건설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인천국제공항 인근의 영종도에 ‘리치밸리’라는 이름의 차이나타운을 만드는 것으로 20억달러에 달하는 비용을 모두 화교자본으로 충당할 계획이다. 세계 화교자본을 한국에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원회장은 “한국은 외국인 소유 주식이 50%에 육박할 만큼 개방적인 경제구조를 갖고 있다. 이 점이 화교자본에 상당한 매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기도 일산 신도시에 추진 중인 차이나타운 조성사업은 한국의 정보기술(IT)과 중국의 우수 인력이 결합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2만평 규모의 일산 차이나타운에는 중국 칭화(淸華)대 신과학기술원이 입주할 예정이다. 엠차이나타운의 양필승 대표는 “칭화대 신과학기술원은 IT 전문가와 함께 글로벌 비즈니스맨을 양성하는 기관이 될 것”이라며 이곳이 한·중 경제교류의 거점이 될 것으로 장담했다.

이 두곳의 차이나타운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구차이나타운’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양필승 대표는 이를 두고 공항이나 비즈니스 센터 중심으로 건설되는 ‘신차이나타운’이라고 말한다. 캐나다 밴쿠버 외곽에 건설된 리치먼드 차이나타운처럼 비즈니스맨과 고급 기술인력이 중심이 된 ‘계획도시’라는 것이다. 인천·부산에 조성되고 있는 차이나타운이 음식점과 잡화점, 소규모 중국 무역상들의 거점이라면 이 곳은 대기업과 글로벌 비즈니스가 이뤄지는 곳이라는 얘기다.

이들 차이나타운 건설사업을 주목하고 있는 것은 비단 한국 화교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에 진출해 있는 중국계 기업 주재원들을 비롯한 중국 본토인들의 관심이 더 크다. 한·중 양국간 무역전시를 담당하는 태평양 국제무역주식회사의 대표이사인 중국인 여표(36)씨는 “차이나타운에 대학·연구소 등이 진출하면 고부가가치 산업이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으로서는 한국의 자본과 기술을 흡수할 수 있는 터전이라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젊은 세대 화교들이 한국의 주류사회에 진출하고 외국의 화교들과 네트워크를 구성하며 상당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며 “차이나타운은 그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이같은 거창한 프로젝트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이제 갓 첫삽을 떴을 뿐이다. 정작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한국사회 특유의 배타성이다. 동국대 중문과에 재학 중인 화교 유옥경씨는 “화교에 대한 한국인들의 편견을 심하게 느낀다”고 고백한다. 화교들은 여전히 취업이나 교육 등에서 차별이 심하다고 느낀다. 최근 국가인권위가 7백여명의 화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0% 이상이 공공기관과 은행에서 차별을 받았고, 79%는 핸드폰과 인터넷 가입에서 불편함을 느낀다고 답했다. 취업에는 77%가, 승진에서도 79%가 차별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2002년 출입국관리법이 개정되면서 5년 이상 장기 체류한 외국인은 영주권을 취득해 자유롭게 취업할 수 있게 됐다. 이 혜택은 외국인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화교들에게 돌아갔다. 화교들은 F5 영주권을 얻어 정기적으로 체류 기간을 연장해야 하고, 강제 퇴거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게 됐다. 물론 주민등록번호가 부여돼 있지 않아 온라인상의 제약을 받는 등 실생활에서의 불편과 어려움은 여전하다.

중국사 전공자이자 화교 전문가이기도 한 양필승 대표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공존할 수 있도록 외국인에 대한 각종 규제나 제한 조치들이 풀려야 하고, 한국인들의 의식도 좀더 개방화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안으로 들이는 세계화’다. 그는 차이나타운은 한국인들에게 다른 민족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경험을 제공하는 문화적 훈련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한성화교학교 3학년인 이세민(19)군은 컴퓨터에 흥미를 느껴 IT 관련 학과에 진출하려 했으나 의과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강권으로 지망학과를 바꿨다. 부모 세대 화교들은 피해의식 때문에 자식들에게 의사와 같은 자영업을 통해 돈을 벌어 사회적 지위를 얻기를 바란다.

그것만이 차별이 심한 한국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화교 가운데 유난히 의사와 한의사·약사가 많은 까닭도 그 때문이다. 어린 학생의 꿈을 좌절시키는 사회는 바람직한 곳이 아닐 것이다. 젊은 세대 화교들은 한·중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르며 적극적으로 한국사회에 진입하고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에게 한국은 과연 어떤 미래를 기약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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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2004년 05월 12일 62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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