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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 암살사건 (金昌龍 暗殺事件)

marineset 2024. 3. 3. 12:36

김창룡 암살사건 (金昌龍 暗殺事件)

 
 
 

출생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 인상리[1]
(현 함경남도 요덕군 흥상리)
사망
1956년 1월 30일 (향년 35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1가
본관
옥도(玉道)
직업
가족
도상원(처), 김경진(아들)
김미원(장녀), 김미경(차녀), 김미영(삼녀)
경력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69호[5]
비고
현대사
 
사건
 
 
1956년 1월 30일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金昌龍) 소장이 출근 도중 암살당한 사건.
 

1956년 1월 30일 오전 7시 30분 경,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이 출근 도중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자혜병원 앞 노상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육군 특무대는 사건 발생 20여 일만에 김창룡 암살사건 관련자로 과거 특무대에서 김창룡의 부하로 근무했던 허태영(許泰榮) 대령과 그의 운전병 이유회(李留會) 일등중사, 육군본부 정병감 이진용(李珍瑢), 대령, 제12범죄수사대 대장 안정수(安楨洙) 소령, 허태영의 동생이며 헌병 중위인 허병익(許炳益), 그리고 직접 저격에 가담한 신초식(申初湜)과 송용고(宋龍高) 등을 검거했다.

 

또한 국회의원 도진희(都晋熙)도 범행에 사용된 지프차의 은닉을 도운 혐의로 함께 체포되었다. 이들에 대한 취조 결과 송용고와 신초식은 허태영의 심복으로 허태영의 지시에 따라 허태영으로부터 권총을 받아 김창룡 특무대장 지프차의 진로를 막고 송용고는 2발, 신초식은 3발을 발사해 김창룡을 암살하고, 운전사에게 중상을 입혔음이 밝혀졌다.

 

허태영에 따르면, 그가 김창룡 암살을 지시한 이유는 김창룡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군대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허태영은 김창룡이 고급장교들의 비리를 월권을 행사해 조사함으로써 군 내부를 불안하게 한 점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허태영은 1955년 10월 말부터 김창룡을 제거할 결심을 했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던 중 과거 특무대 재임 때부터 자신의 심복으로 있던 신초식을 끌어들였다.

 

이후 여러 차례 암살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다 실패하였고, 이에 허태영은 신초식 이외에 부산에 있던 송용고를 상경시켜 함께 암살 계획을 실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결국 1956년 1월 30일 이유회가 모는 지프차를 이용하여 신초식과 송용고는 김창룡 암살에 성공하였다.

재판에서 허태영, 이유회, 신초식, 송용고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고, 다른 관련자들에게도 징역 3년에서 20년 사이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허태영과 이유회의 형 집행을 앞두고 있던 1956년 11월, 김창룡 암살사건의 배후가 있다는 허태영의 처 황운하(黃雲夏)의 탄원서가 제출되었다.

 

이에 따라 배후에 대한 새로운 수사가 진행되어 강문봉(姜文奉) 중장과 공국진(孔國鎭) 준장, 강홍모(姜弘模) 대령, 성정모(成正模) 대령, 백학규(白鶴圭) 중령 등이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에서 강문봉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1957년 9월 허태영과 이유회의 사형이, 1958년 5월에는 신초식과 송용고에 대한 사형이 각각 집행되었다.

 

그러나 강문봉은 사형 선고 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 의해 곧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강문봉을 사형시킬 경우 그 윗선으로 알려진 정일권(丁一權) 대장으로까지 의혹이 확산될 수 있었고, 이는 군에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일권이 정말로 김창룡 암살사건의 최종 배후인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김창룡이 정일권, 강문봉 등이 관련된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접기/펼치기참고문헌
『사건기록으로 보는 한국현대사』(국가기록원 공개서비스과 편, 국가기록원, 2008)
『명인옥중기』(허태영 외, 희망출판사, 1966)
『해방20년사』(해방20년사 편찬위원회 편, 희망출판사, 1965)
 
 
허태영(許泰榮, 1919년 12월 11일~1957년 9월 24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겸 정치인이며 육군 대령 출신이다.
1919년 12월 11일,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중화의 부농가(富農家)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경상북도 경산과 황해도 평산을 거쳐 평안남도 평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그 후 평안남도 평양 만수보통학교 3학년 시절(1928년)에는 종교를 불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으며 훗날 평안남도 평양고등농림학교(1938년)를 나온 그는 1938년 3월 당시부터 1940년 3월까지 평안남도 평양 종로소학교 급사 등을 거쳐 1940년 3월 2일 당시부터 1942년 3월 9일 당시까지 경기도 양주백석국민학교 급사를 잠시 모두 4년 남짓 지내다가 그만두고 1942년 4월 12일, 일본군 헌병보에 입대하였으며 1945년 양력 8월 15일을 기하여 조선 광복을 목도하면서 일본군 헌병보 군직에서 파면된 그는 도쿄를 떠나 나고야에서 과일 장사꾼 등으로 변장하여 자금을 모아 1946년 5월 당시에 귀국하였으며 그 후 미군정청이 주관하는 국민학교 교원 특채 시험에 입격(합격)하여 1947년 3월 당시에서부터 1948년 3월까지 1년간 경기도 양주 소재 장흥국민학교 교원 등을 잠시 지내다가 그만두고 1949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특8기로 임관하였으며 같은 해 1949년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1기를 나온 그는 1950년 대한민국 육군포병학교 2기를 나온 후 한국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그는 육군 제2군사령관 강문봉(姜文奉) 장군의 배후로써 1956년 1월 30일을 기하여 결국엔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金昌龍) 장군을 사살, 이른바 "김창룡 장군 암살 사건"을 중요 임무 종사하여 군사재판(군법회의)에 기소되었고 재판 끝에 사형이 선고되어 육군 대령 강제 예편된 그는 김홍섭(金洪燮) 판사의 권유를 받아 옥중에서 개신교를 이탈하여 천주교로 두번째 개종을 하였고 1957년 9월 24일을 기하여 옛 직속 부하 이유회(李留會) 예비역 육군 중사와 함께 사형(총살형)이 집행되었다.
 
 

 

 

김창룡 암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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