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 암살사건 (金昌龍 暗殺事件)
1956년 1월 30일 오전 7시 30분 경,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이 출근 도중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자혜병원 앞 노상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육군 특무대는 사건 발생 20여 일만에 김창룡 암살사건 관련자로 과거 특무대에서 김창룡의 부하로 근무했던 허태영(許泰榮) 대령과 그의 운전병 이유회(李留會) 일등중사, 육군본부 정병감 이진용(李珍瑢), 대령, 제12범죄수사대 대장 안정수(安楨洙) 소령, 허태영의 동생이며 헌병 중위인 허병익(許炳益), 그리고 직접 저격에 가담한 신초식(申初湜)과 송용고(宋龍高) 등을 검거했다.
또한 국회의원 도진희(都晋熙)도 범행에 사용된 지프차의 은닉을 도운 혐의로 함께 체포되었다. 이들에 대한 취조 결과 송용고와 신초식은 허태영의 심복으로 허태영의 지시에 따라 허태영으로부터 권총을 받아 김창룡 특무대장 지프차의 진로를 막고 송용고는 2발, 신초식은 3발을 발사해 김창룡을 암살하고, 운전사에게 중상을 입혔음이 밝혀졌다.
허태영에 따르면, 그가 김창룡 암살을 지시한 이유는 김창룡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군대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허태영은 김창룡이 고급장교들의 비리를 월권을 행사해 조사함으로써 군 내부를 불안하게 한 점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허태영은 1955년 10월 말부터 김창룡을 제거할 결심을 했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던 중 과거 특무대 재임 때부터 자신의 심복으로 있던 신초식을 끌어들였다.
이후 여러 차례 암살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다 실패하였고, 이에 허태영은 신초식 이외에 부산에 있던 송용고를 상경시켜 함께 암살 계획을 실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결국 1956년 1월 30일 이유회가 모는 지프차를 이용하여 신초식과 송용고는 김창룡 암살에 성공하였다.
재판에서 허태영, 이유회, 신초식, 송용고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고, 다른 관련자들에게도 징역 3년에서 20년 사이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허태영과 이유회의 형 집행을 앞두고 있던 1956년 11월, 김창룡 암살사건의 배후가 있다는 허태영의 처 황운하(黃雲夏)의 탄원서가 제출되었다.
이에 따라 배후에 대한 새로운 수사가 진행되어 강문봉(姜文奉) 중장과 공국진(孔國鎭) 준장, 강홍모(姜弘模) 대령, 성정모(成正模) 대령, 백학규(白鶴圭) 중령 등이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에서 강문봉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1957년 9월 허태영과 이유회의 사형이, 1958년 5월에는 신초식과 송용고에 대한 사형이 각각 집행되었다.
그러나 강문봉은 사형 선고 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 의해 곧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강문봉을 사형시킬 경우 그 윗선으로 알려진 정일권(丁一權) 대장으로까지 의혹이 확산될 수 있었고, 이는 군에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일권이 정말로 김창룡 암살사건의 최종 배후인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김창룡이 정일권, 강문봉 등이 관련된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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