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 만나는 우리역사] <2> 도봉산 망월사
강대국에 치여 시름하던 ‘조선의 눈물’ 현판에… 망월사는 근현대 고승들이 참나를 찾아 정진했던 조계종 종립 선원이 있었으며 구한말 혼란했던 시대상을 말 없이 품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구한말 청나라 사신 원세개 임오군란 진압 차 조선 원정 1891년 가을 ‘망월사’ 올라 현판 쓰고 자신의 이름 남겨 10여년 간 조선 정치 좌우 청일 전쟁 직전 귀국 길에 조선인 3명 첩으로 데려가 손자는 노벨상 후보 오른 세계적 물리학자로 명성 조선 500년 수도였던 서울의 사찰은 많은 역사를 담고 있다.
조선 창업에 얽힌 이야기가 절 곳곳에 서려 있고, 근대화를 꿈꾸던 젊은이들의 은밀한 회합 장소도 사찰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군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는가하면 6·25 한국전쟁의 아픈 상처도 녹아있다. 도봉산 망월사도 그 중 한 곳이다. 국철 1호선 망월사역에서 1시간30분 가량 올라가 포대능선 정상 아래에서 서울과 의정부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망월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 639년 해호 화상이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경주 월성을 바라보며 왕실의 융성을 기원했다 해서 망월사(望月寺)라고 했다. 당시 이곳은 신라와 고구려가 국경을 맞대는 최전선이었다. 추풍령 아래 척박한 땅에 갇혀 지내던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여 기세를 떨치던 때다. 최전방 산중 사찰은 접경지역 주민 선무(宣撫) 역할과 함께 군대 지원 역할도 했다. 망월사도 당시 똑같은 역할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3·1독립운동 33명 중 만해와 함께 불교를 대표했던 백용성스님이 1905년 선원을 개설하고 제자들을 길렀다. 제자들 중에 석우 동산 고암스님 등 3명의 종정이 나왔다.
동산스님은 백용성스님이 3·1만세운동으로 투옥되자 망월사와 종로 대각사를 오가며 스승의 옥바라지를 했다. 춘성스님도 같은 이유로 투옥된 스승 만해스님 옥바라지를 했다. 춘성스님은 동산스님과 함께 서울의 형무소를 오갔는데, 두 ‘상좌’는 감옥에서 고생하는 스승들을 생각하며 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춘성스님은 일제에 이어 정화 당시 다시 망월사를 찾아 한국전쟁으로 허물어진 가람을 중수하고 매일 지금의 역까지 오가며 도량석을 돌았다. 머리가 좋아 <화엄경>을 거꾸로 외우고 항아리에 들어가 머리만 내놓고 공부를 해서 잠을 이겨낼 정도로 뛰어났으며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금오스님도 망월사를 지켰다. 맏상좌 월산스님이 이곳에서 출가했다.
지난 18일 도봉산에 올랐다. 자운봉과 다락능선 포대능선 뒤편은 온통 눈 밭이다. 포대능선은 6·25 한국전쟁 때 포부대가 있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기온이 뚝 떨어져 등산객들의 발길도 뜸했다. 천중선원은 고요했다. 1994년까지 조계종종립선원으로 지정된 유서 깊은 선원이다. 백용성스님과 금오스님의 선기를 잇는 선원이니 그 명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북쪽 포대능선과 달리 망월사 쪽은 바람도 없고 따뜻하다. 하루 종일 햇볕이 들어 포근한 느낌을 준다. 주지 스님 집무실 등 요사채가 있는 건물 무위당(無爲堂)에 한자로 망월사(望月寺) 라 쓴 현판이 걸려있다.
현판 내용이 특이하다. ‘주한사자원세개(駐韓使者袁世凱) 광서 신미중추지월(光緖 辛未仲秋之月)’이 눈에 들어온다. 광서는 청나라 11대 황제 광서제를 말한다. 1891년 가을에 원세개가 썼다는 뜻이다. 마지막 황제 푸이가 12대이니 기울어 가던 청나라 사신이 옛 제후국에서 한껏 호기를 부린 셈이다. 원세개는 청말 북양대신 이홍장의 총애를 받아 23세의 나이로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견된 청군(淸軍)과 함께 조선에 왔다. 1882년 일어난 임오군란은 급격한 개혁정책에 반대한 군인들이 일으킨 난이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들어온 청은 조선에 대한 주권을 갖고자 했다. 청은 명성황후 등 민씨 일파를 동원해 조선 왕실을 좌우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개화파는 일본과 손을 잡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일본의 세력 확대를 두려워한 청과 아직은 독자적으로 조선을 지배할 힘이 부족했던 일본은 텐진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조선에서의 청·일 양국군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서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 남의 나라를 놓고 제 멋대로 요리했다. 국운은 다하는데 왕은 무능하고 지배계층은 나뉘어 반목하니 주변 강국이 우습게 여기고 마음 껏 농락한 것이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백성만 힘든 법. 참지 못한 백성들이 일어서 동학농민전쟁을 벌였다. 원세개가 들어오고 10여년이 지난 뒤 역사다. 결국 텐진조약이 동학전쟁을 진압하는 구실로 작용했다. 10여년 간 힘을 기른 일본은 청나라를 타격해 승리했다. 그런데 그 전쟁은 조선 땅에서 일어났다.
피해는 고스란히 이 땅의 백성들 몫이었다.
원세개가 쓴 망월사 현판.
원세개는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 발발까지 혼란했던 19세기 말 조선 정국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압송, 연금하였으며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인들을 진압하는데 앞섰고 갑신정변이 발발해 고종이 개화파에게 납치되자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고종을 구출했으며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납치했던 흥선대원군을 복귀시키는 등 한중일 삼국이 어지럽게 돌아가던 정국의 중심에 늘 원세개가 있었다. 1885년 조선주재 총리교섭통산대신이 된 원세개는 서울에 주재하며 내정과 외교를 간섭하고 청의 세력 확장을 꾀했다. 하지만 그는 망해가는 청을 구하지 못했고 동북아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는 일본을 막지도 못했다.
조선은 원세개를 마지막으로 청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망월사 현판은 120여년 전 어지러웠던 동북아를 말없이 전해준다. 당시 서울에서 의정부까지 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말이나 마차를 타고 왔으리라. 도봉산은 어떻게 올라갔을까? 그의 신분이 일제강점기 총독과 다름 없었으니 걸어서 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절에는 유력 정치인이나 권력자들이 쓴 현판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북한산 문수암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해방 뒤 귀국해 문수암에 올라 남겼다. 그의 어머니가 문수암에서 기도를 드린 뒤 낳아 이 대통령은 문수암을 각별하게 대했다. 구기동 매표소에서 대남문 방향으로 2시간 넘게 오르는 등산로는 지금도 멀고 험하다. 이대통령은 가마를 타고 올랐다. 그 사진이 지금도 전한다. 망월암은 문수암에 비하면 길이나 험하기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다. 원세개는 청나라로 돌아가면서 조선 여인 세 명을 첩으로 삼아 데려갔다. 그 중 한 여인은 안동김씨 성을 썼다. 원세개와 안동김씨 조선 여인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 커원(克文)이다. 그는 아버지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 조선 피가 흐르는 차남이었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를 꿈 꿀 정도였다.
원세개는 쑨원을 강제로 밀어내고 중화제국 황제에 즉위했지만 100일 만에 열강의 반대와 전국에서 번진 반원(反袁) 움직임에 밀려 퇴위한 뒤 실의에 빠져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커원의 아들, 즉 원세개의 손자 지아류는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어 노벨상 후보까지 오른다. 그의 외아들 웨이청(袁緯承)도 아버지를 이어 물리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다시 한반도 간섭하는 중국 원세개는 경북궁 주변의 북한산을 비롯해서 많은 산과 사찰을 두고 서울에서 먼 의정부까지 가서 도봉산에 올랐을 까? 여러 사찰에 현판을 남겼는데 이 곳 만 현판이 훼손되지 않고 남은 것일까? 이에 대해 중국에서 외교관 생활을 한 한 외교공무원은 “원세개는 출세욕과 야심이 많은 사람으로 젊은 시절 망월사 현판을 쓴 것은 망월(望月)이 과거 신라의 수도 월성을 바라보면서 왕실 안녕을 빌었다는 순수한 의미와 달리 멀리 떨어진 북경(北京)을 보며 출세를 기원하는 마음에서였는지 모른다”고 해석한 바 있다. 나라가 바뀌는 혼란한 시대에 야망에 찬 정치인이 황제를 꿈꿀 수 있다. 그러나 글씨는 야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처음 글씨를 배우는 아동처럼 얌전하다. 현판에서 정치적 야망을 읽기가 쉽지 않다. 원세개가 현판을 쓴 중추지월(中秋之月)은 가을이 절정인 음력 8월 추석 즈음이다. 가을의 도봉산 정취를 만끽하러 올랐을 것이다. 교교(皎皎)한 달빛 아래 도봉산을 보노라면 어지러운 마음이 가라앉고 세상의 물욕 출세욕은 저만치 달아났을 것이다. 자연과 부처님 전에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조심스럽게 써내려가지 않았을 까? 이유가 무엇이든 구한말처럼 중국이 다시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려 일어서고 있다. 사드 배치를 핑계 삼아 간섭하려드는 모양이 구한말과 다름없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세계 최강국 사이에 한반도의 운명은 120여년 전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다. 망월사 원세개 현판이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는 시절이다.
[불교신문3365호/2018년1월31일자] 의정부=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다른 기사 보기
'스토리 > 역사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엔에서 온 '칙사'들 (0) | 2024.04.03 |
---|---|
낙랑클럽 (6) | 2024.04.03 |
김창룡 암살사건 (金昌龍 暗殺事件) (0) | 2024.03.03 |
청일전쟁 (淸日戰爭) (1) | 2023.08.26 |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뤄낸 통일민주당 [한국정당사⑨] (0) | 2023.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