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과 환속(還俗)
목사님이 사역을 그만두고 자유인이 되는 행위를 무엇이라고 표현하
는지 참 애매하다.
스님이 승직을 버리고 속세로 돌아가면 ‘환속’이라고 하였는데 요즈음
은 개신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이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경우
도 환속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신교의 목사님이 자연으로 돌아가서 교회에도 다니지 않
는 경우는 환속도 아니고 파계(?)도 아니고 무엇인가?
그냥 목사직 포기 아니면 반납이라고 해야할지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
보아도 마땅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
요즈음 목사님들 말씀 들어보면 화려했던 전성시대는 이미 요단강 건
너갔다고 한다.
하기야 자고 일어나 보면 교회와 치과 그리고 편의점만 잔뜩 생겨나니
신도와 환자, 손님을 나누어 먹어야 하는 꼴이 되어버렸으며 하물며 개
척교회를 꾸려나가는 목사님들은 교인도 별로 없고 헌금도 빈약하여 이
미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형국이다.
너무 힘들어 사목의 길을 접고 다른 직업을 갖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환속한 셈이다.
물론 짱짱한 기업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은 경제적 빈곤과는 좀
거리가 멀겠지만. 목사님도 잘린다고 한다. 자격을 부여하는 직업이면,
대부분 징계 절차에 의하여 그 자격을 박탈하기도 하므로 목사님이 교단에서
잘리면 평생 목사직을 못 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다른 하위 교단으로 옮겨서
그럭저럭 유지하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나도 잘 모른다.
유신 시절,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 기술자로 불리던 이근안 총경(전)
이 교도소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목사님이 되었으나 부적절한 언행이 죄
가 되어, 본인을 목사로 만들어 준 교단으로부터 목사직을 박탈당했다고
전해지는데 우리나라 개신교 교단에서는 목사님이 내뱉는 표현의 자유
를 인정하지 않는지 아니면 다른 종교를 의식해서인지 혹은 국민의 질책
이 무서웠는지 몰라도, 이근안 목사는 본인이 고문 기술자가 아니라 애
국자였다고,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인 것이 교단의 체면을 떨어뜨리고
품위를 손상한 이유가 되어 고생해서 얻은 목사직을 박탈당했으니 쪼다
가 따로 없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나 김근태 전의원에 대한 혹독한 고문, 기타
시국사건과 무관하게 진짜 남파 고정간첩만 때려잡는 이근안이었다면,
그 당시 반공 정권에서는 애국자로 분류되었을 수도 있을 법하겠다.
내 기억 속에 아련한 목사님이 한 분 계시다.
‘우상범’ 목사님-나는 1964년도에 장로교 교단에서 세운 중학교에 입
학했는데 그 학교의 교목이 바로 우상범 목사님이셨다. 이분은 영어 선
생님보다 영어를 더 잘하고 체육 선생님보다 달리기를 더 잘하는 목사님
이셨다.
어느 날 멕시코로 선교 파송을 나가셨으며 그 후로는 잊고 지내다가
몇 년 전에 별세하셨음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목사님의 죽음을 부활로 연계하기에는 감히 두려우니, 그렇다면 자연
으로의 환속일까 아니면 천국으로의 환생일까? 그냥 소천(召天)이 맞는
것 같다.
1인칭 표현을 피해 보려고 하는데 그냥 몇 번 써먹어야겠다.
내가 존함을 알고 있는 목사님은 탤련트 문성근씨의 부친이신 문익환
목사님, 영락교회를 세운 한경직 목사님, 순복음 교회 조용기, 최자실
그리고 한세대학교의 김성혜 목사님 정도이다. 그리고 신륵사의 세영 스
님과 우리 가족이 다니는 절의 정호 스님 외에는 스님과의 교류도 빈약
하고 유명하다는 큰스님의 법명조차 많이 알지 못한다.
원래 내 성격이 꼬여서인지 성직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매우 꺼리기에
선후배 중에 목사님들도 꽤 많은데 말싸움이 두려워 아예 교류하려고 하
지 않는다.
검찰 수사관 출신의 후배가 한 명 있는데, 공대를 졸업하고 철도원 생
활을 하다가 방통대에 편입하여 법학을 공부하고 고시 도전은 실패하였
으나 검찰 수사관이 되어, 용맹을 떨치다가 퇴직한 뒤에는 법무사 사무
소를 개업하여 돈도 많이 벌더니만 법학박사가 되었다. 참 파란만장한
풍운아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나이 오십이 다 되어 시니어 권투선수로 데뷔를 하였고 어느
날, 목사님으로 변신하여 나타나서 하는 말씀이 개척교회를 몇 년 하다
가 접었으며 그즈음은 그냥 법무사 일을 다시 한다고 하였다.
음주 가무를 공유하던 사람이 변신하여 내게 찾아와 하나님을 믿으라
는데 내 비록 신심이 얕아도 산사에 출입하거늘, 피차 종교 얘기는 하지
말자고 단칼에 잘랐더니 그 후로는 무소식이다. 목사직을 계속하는지 환
속하였는지 모르겠다.
목사님이고 스님이고 간에 교회도 싫고 절이 싫어 떠나겠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만 그분들이 품었던 사랑과 자비의 마음만은 환속(還
俗)을 허(許)하는 자연의 풍광과 함께 오래 간직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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