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複雜單純

애꾸눈의 종군 여기자* Marie Colvin

marineset 2023. 5. 29. 01:50
Marie Catherine Colvin (January 12, 1956 – February 22, 2012)

미국출신 언론인 마리 콜빈은 한 때 “세계의 소방관”으로 불리며 그녀 시대에서 가장 용감한 외국 종군기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그녀의 왼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는 2001년 스리랑카에서 파편에 의한 실명 때문이며 국제적으로 방송매체 등에 자주 나타나는 그녀를 금방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56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몇 시간 전 수요일, 시리아의 홈스가 포위되어 있을 때 그녀는 미국과 영국의 TV뉴스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CNN의 앤더슨 쿠퍼 기자와 대담하면서 시리아군의 포격으로 사망한 2살 남자 어린이를 목격한 “끔찍한” 경험을 묘사하였다.
쿠퍼 기자가 그녀에게 그 같은 사실 묘사를 언론에 올리는 것이 합당한지를 강조하여 묻자, 보도는 전장으로부터 퍼져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그 어린이”는 “아마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홈스에서 매일 같이 무슨 일이 일어나며 왜 이 같은 살육을 아무도 막으려 하지 않는지에 관해 생각 할 수 있도록 유도 한다”고 했다.

콜빈기자는 런던 선데이 타임즈 소속으로 그녀의 죽음을 초래한 시리아 무장폭동의 취재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녀의 사망 소식은 전직 워싱턴포스트지의 특파원이었으며 시리아 종군기자를 지냈던 안토니 새디드가 천식으로 사망한지 채 한 주도 되지 않아서 들려 왔다.
콜빈 기자는 뉴욕에서 성장하였고 예일대학교에서는 문학 수업을 받으면서 1945년 일본 히로시마 원폭투하를 취재한 <히로시마>의 저자 죤 허쉬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의 저서를 통해서 종군기자 마르타 겔혼 등의 종군기자와 같은 기자의 꿈을 실현하게 되었다.

콜빈 기자는 선데이 타임즈에서 26년간 근무하면서 3개 대륙의 분쟁지역을 취재하였다. 그녀는 뉴스회의를 피하고 통상적인 사람들, 특히 여성과 어린이의 관점에서 전쟁을 취재하는 위험을 반복하였다. 1999년에는 동티모르에서 무장 세력의 공격 하에 있는 1000명이 넘는 유엔 난민을 취재하려고 그 곳에 남아 있던 기자, 그 것도 오직 3명의 여기자 중에 한 명으로 알려졌다.
독자들은 난민구조와 함께 그녀의 취재활동을 믿었다. 유엔은 어느 순간 평화유지군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하였지만 콜빈의 보도가 그런 정책을 지속하지 못하게 하였다.

“포격에 의한 웅덩이. 불 타버린 집. 불구가 된 신체. 아이들과 남편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는 여인들.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아이들을 잃은 남자들,” 콜빈은 2010년 런던에서, 취재활동 중 사망한 기자들을 추념하는 자리에서 “우리들의 임무는 이러한 전쟁의 공포를 정확하고 편건없이 보도하는 것이다”라고 말 하였다.

콜빈은 마지막 파견지인 홈스에서 그녀가 목격한 공포를 선데이 타임즈 2월 19일자에 자세히 묘사하였다.
“그들은 남편 잃은 여인들을 지하실로 불렀고,” “꽉 들어찬 간이침대와 잡동사니들은 여인들과 어린이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2주간에 걸친 무자비한 폭격으로 인하여 시리아의 도시 홈스는 충격적이었다...지하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고통과 죽음에 관하여 비슷한 이력을 간직하고 있었다.”라고 기사를 작성했다.
콜빈은 매년 외국기자에게 주는 영국보도상을 두 차례 수상하였다. 그녀는 다른 기자들이 너무나 위험해서 기피하는 전쟁지역의 바로 뒤에서 통상 머물렀다.

1991년 페르시아 걸프전이 있을 때, 바그다드의 적진 바로 뒤편에 머물렀다. 1999년에는 러시아 변방의 체첸 반군을 취재할 때에는 강추위의 온도에도 불구하고 도보로 산을 넘어 이웃 조지아로 들어와서 전쟁터에 합류하였다.
 1990년대 후반 코소보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녀는 자신을 게릴라 전사로 위장하였다. 2000년에 발간된 아메리칸 저널리즘 리뷰에 게제된 그녀의 업무 원칙은, “무엇이던 먹고 마시고 아무데서나 잠을자며 옷을 제대로 못 입어도 상관없다.”라고 하였다.

콜빈은 여성으로서 난감한 경우도 있었다. 사망한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가다피는 인터뷰 내내 반복적으로 유혹을 시도하였다. 무슬림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취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가끔은 그녀가 기대하지 않았던 존경을 받은 것에 대하여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한 번은 체첸 사령관이 그녀를 전사들에게 소개하면서 “이곳에는 여성은 없고 오직 기자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 하였다.

세계관에 관하여

콜빈기자는 1956년 1월 12일 뉴욕 퀸즈에서 출생하였으며 오이스터 베이에서 성장, 1978년에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뉴저지 트렌튼에 있는 유나이티드 프레스 인터내셔널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하여 파리담당국 주임으로 4년간 근무하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선데이 타임즈의 데이빗 블룬디에 의해 신문사 중동특파원으로 채용되었다. 데이빗은 1989년 엘 살바도르에서 취재중 사망하였다.

수요일 인터뷰에서 콜빈의 어머니 로즈마리 콜빈은 그녀의 딸이 죽기 전에 잠시 시리아를 떠날 계획이 있었는데 기사를 끝내려고 머문 것 같다고 전했다. 뉴욕 이스트 노르위치에는 유족으로 그녀의 어머니 외에 4명의 형제자매가 있다.

콜빈은 패트릭 비숍과 결혼하였다가 이혼한 뒤 볼리비아의 기자 후안 카를로스 구무시오와 재혼하였지만 재혼한 남편은 2002년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2001년 기고문에 “기자가 전쟁에서 일어나는 잔혹함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사실적으 로 보도하려면 위험을 만나게 된다” “내가 만나게 될 다음 전쟁에서는 나 보다 더 많이 참아내고 또 침묵하는 민간인들의 용맹심에 더욱 경외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머물러야 하고; 나는 런던의 집에 갈 수 있다.”라는 글을 썼다.
The original articles wirrten by Emily Lange...r is a reporter on The Washington Post’s obituaries desk. She has written about national and world leaders, celebrated figures in science and the arts, and heroes from all walks of life.  Follow @emilylangerWP 원문 기사 작성;에밀리 랑게
워싱턴포스트의 부고 담당 기자.

번역;ba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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