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複雜單純

“대처승은 스님 아니다” 교단 청정성 회복 나서

marineset 2023. 5. 29. 01:47

청담대종사 ⑨ 불교정화를 결심하다
데스크승인 2015.07.15 11:38:46 장영섭 기자 | fuel@ibulgyo.com

스님의 속화·사찰 사유화
왜색불교 청산 의지 실천
조선불교학인대회 주도로
전국 스님들 신뢰 얻어내
비구승 결집 유교법회 주관
항일불교의 선봉으로 ‘부상’




1941년 3월 경성(서울) 선학원에서 열린 유교법회에 참석한 스님들의 기념촬영. 세 번째 줄 맨 왼쪽이 청담스님.
 

조계종 총무원(원장 자승스님)은 지난 2012년 4월10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사부대중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통합종단 출범 50주년 기념법회를 봉행했다. 비구승과 대처승이 통합한 오늘날의 대한불교조계종이 발을 디딘 1962년 4월11일을 기리기 위해 마련됐다. 독신출가자에 한해 승려자격을 인정한다는 종헌 수정안이 불교재건비상종회에서 통과된 직후다. 이날 초대 종정에 효봉스님(비구측), 총무원장에 석진스님(대처측)이 취임했고 종단 운영방식으로는 종정중심제가 채택된 상태였다. 곧 종단은 비구 중심으로 재편됐고 청정불교의 법통을 회복했다. 일제강점기에 싹터 1950년대 들불처럼 번진 불교정화운동의 결실이었다.

당시 비구와 대처 간의 쟁투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견됐다. 숫자 자체가 역부족이었던 데다 주요 사찰은 대처승의 차지였다. “고작 1000명 남짓한 비구승들이 7000여 명의 대처승들을 이기고 불교를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었던 이유는 죽음을 각오하고 호법(護法)에 뛰어든 수행자들의 순수한 마음 때문이다.” 불교정화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1960년 대법원에서 할복을 감행한 ‘6비구’ 가운데 한 명인 원로의원 월탄스님의 50주년 기념법회 법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섰던 인물이 바로 청담스님(1902~1971)이다.

지난해 작고한 목정배 동국대 명예교수는 생전 ‘정화일념’이란 제목의 기고문에서 “청담스님은 우리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국민에게 정화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졌다”며 “한국불교에서 정화운동이 성실하게 완수되어야 함은 불교중흥의 역사적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곧 청담스님의 일생을 가로지르는 화두는 단연 ‘정화’다. 정화의 주역이었으며 정화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종단의 정체성을 한 마디로 갈음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정화란 이른바 ‘왜색(倭色)불교’로 일컬어지는 일본불교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스님들이 결혼을 하는 대처(帶妻)는 가장 볼썽사나운 악습이었다.

메이지유신이 전개되던 1872년 4월 “승려의 식육대처는 각자 임의에 맡긴다”는 훈령에 따라 일본에서 공식화된 대처 풍습은 한일병탄과 맞물려 우리나라에 그대로 유입됐다. 출가수행자의 막행막식을 장려하는 전대미문의 개악(改惡)은 스님들의 속화(俗化) 그리고 사찰의 사유화를 부추겼다. 더욱 기막힌 것은 일제의 비호에 힘입어 대처승이 주류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1955년 8월6일자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전국 약 1200여 사찰 가운데 승려가 8000명에 달하고 있다는데 비구승은 불과 1200여 명뿐”이었다. “사찰 마당에 버젓이 기저귀가 걸리고 주지의 아내가 삼보정재를 쌈짓돈으로 삼던” 시절이다(전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스님). 곳곳이 점(占)바치와 무당절이었다.


청담스님은 일본화에 따른 한국불교의 법통 상실과 위상 추락을 누구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다음은 스님이 1958년 학술전문지 <민족문화> 3권 제11호에 게재한 글의 초입이다. “(비구의) 대처식육(帶妻食肉)을 엄금하고 여인을 간파한 자는 승수(僧數) 외로 축출 환속케 함이 불교의 결정적인 법률이어늘 현금(現今) 조선 승려가 대처식육을 감행하여 청정사원을 마굴영(魔窟營)으로 작하고 승체(僧體)를 불고(不顧)하니 읍혈통탄(泣血痛嘆)이외다. 승려에 대처식육을 허하건대 별로이 재가신도의 구분을 치할 필요가 없는지라, 현금 축처담육자(蓄妻啗肉者)가 사원(寺院)을 장리(掌理)함으로 수행승과 연고납승(年高衲僧)은 자연 구축되어 읍루방황(泣淚彷徨)케 되니 차수천대중승(此數千大衆僧)이 하처(何處)에 안주(安住)하리까?” 이즈막의 언어로 간추리면 ‘대처승은 스님이 아니며 승단에서 조속히 쫓아내야 한다’는 단호한 논지다.



일본불교에 대한 청담스님의 적대감은 청년시절부터 또렷했다. 고향인 진주 지역 3·1운동에 고등학생 신분으로 가담했다가 1주일간 고문을 당하기도 했던 스님은 ‘지피지기’를 꿈꾸며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1923년 친구인 박생광 화백(1904~1985)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효고현(兵庫縣) 쇼운지(松雲寺)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스님들이 부부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질색한 뒤 고국으로 돌아와 경남 고성 옥천사에서 영호(映湖) 박한영 선사를 은사로 득도했다. 박생광 화백은 “청담스님은 일본불교는 겉껍데기의 불교, 즉 형식의 불교이고 내용이 없는 것을 감지하고 더 이상 일본에 머무를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해 귀국했다”고 회고했다.

스님의 상좌인 청담장학문화재단 이사장 동광스님 역시 “은사 스님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잔혹한 군국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부처님보다 개산조(開山祖)를 더 높이 받드는 일본의 종파중심 불교에 비판적 시각을 갖고 계셨다”고 밝혔다. 아울러 “승가와 신도를 포함한 한국불교 전체에 대한 정화의 출발은 대처로 대변되는 일본불교의 척결이라는 믿음이 확고하셨다”고 덧붙였다. 대처는 친일의 폐부였고 정화의 목표는 극일(克日)이었다.

정화를 원력으로 세운 청담스님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불교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박한영 스님의 지도를 받으며 서울 개운사 강원에 재학 중이던 청담스님은 강원 개원 1주년을 맞아 조선불교학인대회의 개최를 주도했다. 1928년 3월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에 걸쳐 각황사(조계사의 전신)에서 열린 학인대회에서 40여 명의 전국 강원 학인 대표들은 불교계의 풍토를 비판하며 대안 제시에 나섰다. 그 결과 전국 강원 학인의 조직체인 학인연맹이 발족했으며 강원 교육체계의 개선방안이 수립됐다. ‘고등강원 1개소를 서울에, 중등강원 6개소 이상을 지방에, 초등강원은 중등강원 부설 또는 그 이외의 사원에 설치’키로 한 개선안은 당시 교단이었던 조선불교선교양종 종회를 통과하면서 일대 전기를 구축했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논문 ‘1930년대 강원제도 개선문제’에서 이즈음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이전 한국 불교계의 교육제도는 강원(講院)과 선원(禪院)의 양대 체제였다. 1910년대 이후 서양식 교육 우선 정책으로 인해 기존 강원은 신(新)문화에 밀려 도태되거나 그마저 폐교됐다. 논문엔 ‘강원은 쓸쓸하고 적막하며, 학인들도 아무 용기 없이 그저 두 어깨가 축 처지고 낙오의 한숨만 쉬며 취식객적(取食客的), 낭만적(浪漫的), 허명적(虛名的)으로 지내고 있다’는 어느 사미의 월간 불교 1928년 1월호 기고가 인용됐다. 곧 조선불교학인대회는 패배의식과 자괴감에 빠져있던 젊은 납자들을 각성시키고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청담스님은 대회의 발기인 모집위원이었으며 발기인 승낙서를 우편으로 발송할 때 그 수취인이었다. 청담스님이 대회를 실질적으로 주관한 동시에 당대의 스님들이 청담스님을 신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그토록 많은 삼보정재가 일인독재(日人獨裁)의 착취와 억압 앞에 이름도 자취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 삼천년 정법과 불조의 혜명마저 깡그리 파괴될 때 나의 의분(義憤)은 용솟음쳐 방관할 수가 없어 나는 많은 학인들을 거느리고 정법수호를 부르짖었다.” 1969년 8월27일자 매일경제신문에 소개된 ‘나의 편력’에서 밝힌 조선불교학인대회에 대한 당신의 소회다.

조선불교학인대회의 성공으로 청담스님은 종단 내에서 입지를 다졌다. 일례로 선학원이 1934년 12월 설립한 조선불교선리참구원 이사와 산하 중앙교무원의 서무이사에 취임했다.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은 조선총독부의 압제와 친일적인 기득권 세력에 맞서 재정적 독립과 한국불교 전통 선풍의 대중화를 목적으로 선각자 스님들이 만든 단체였다. 즉 전국 선원의 통일기관의 경제적 책임을 담당하는 요직인 서무이사에 청담스님이 발탁됐다는 것은, 수좌들 사이에서 스님의 위상이 상당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때 선리참구원의 이사장이 1930년 청담스님이 수학한 만공스님이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스님이 선학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1941년 유교법회(遺敎法會)에서 그 단면이 드러난다. 1941년 2월26일부터 10여일 간 열린 유교법회는 청정승풍의 회복과 전통불맥의 계승을 취지로 내걸었다. 만공 효봉 동산 박한영 운허 서응 상월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이 법상에 올라 <범망경> <유교경> <조계종지>를 가르쳤다. 당초 고승법회로 명명했으나 친일 승려들의 반발로 유교법회로 변경해야 했다. 총본산 건설이란 미명 하에 불교계에 대한 통제가 극단으로 치닫던 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유교법회가 중요한 까닭은 민족말살정책을 위시해 일제가 우리나라를 벼랑으로 몰아붙이던 시점에, 비구승들이 불교의 근본과 한국불교가 나아갈 길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2008년 4월 조계종 총무원이 주최한 유교법회 기념 세미나에서 전 해인사승가대학장 법진스님은 “유교법회에 동참한 독신수행승들은 일제 때는 물론 해방 후 조계종의 형성과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며 “1962년 통합종단이 출범할 때까지 비구승 중심의 여론을 주도하거나 종단 주요기구를 운영하는 스님들은 유교법회 동참자들이었다”고 짚었다.

당연히 유교법회의 준비와 진행은 선리참구원 및 그에 연관된 수좌들이 주도했으리란 추측이다. 그 중심엔 청담스님이 있었다. “당시 그 법회에 불만을 품은 반대 측 승려들의 난동을 청담스님이 단호히 대처했다”는 전 총무원장 석주스님(2004년 입적)의 전언(여성불교 79호, 1985년 11월)에서 활약상을 짐작할 수 있다. 당대의 고승이었던 운허스님(전 동국역경원장)은 김천 직지사에 있던 청담스님을 몸소 찾아가 유교법회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명실상부한 소장파의 핵심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청담스님은 항일불교의 기수가 되어 훗날 불교정화를 위한 역량을 착실히 다졌다. 그리고 정법불교를 향한 지혜와 용기는 ‘봉암사 결사’로 이어졌다.

[불교신문3119호/2015년7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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