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의 1968년 그날
사내의 두개골에 박힌 총알은 순간…
④ 피의 뗏(구정) 공세- 응웬응옥로 안은 어떻게 비열한 거리의 주인공이 됐나
흡!
숨이 멎었다. 아니 세상이 멎은 것 같았다. 사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두 손목을 움직였지만 꼼짝도 안 했다. 정글복에 철모를 쓴 군인이 오른편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이쪽을 응시한다. 텅 빈 거리 저 멀리서 군용차 한 대가 달려오는 모습이 희미하다. 응웬응옥로안(38·이하 로안) 장군은 그의 이마에 리볼버 38구경 권총을 들이댔다. 오른손 검지에 힘을 주려는 절체절명의 순간…. 의 카메라 기자 에디 애덤스(35)가 찍은 스틸 사진은, 보는 이의 심장을 멎게 한다.
이번엔 의 베트남인 카메라맨 보스가 찍은 동영상을 본다. 실제로는 숨 돌릴 틈이 없었다. 두 손이 뒤로 묶인 사내가 서너 명의 무장군인들에게 끌려온다. 장교로 보이는 이가 옆에서 걸으며 무언가를 묻는다. 사내가 도착하자마자 로안 장군은 품에서 권총을 꺼내든다. 1초의 머뭇거림도 없다. 바로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사내는 쓰러진다. 숨이 끊어진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즉결 처분
그 유명한 사이공(당시 남베트남 수도, 현 호찌민) 거리의 베트콩 즉결처형 장면이다. 1968년 2월1일 ‘뗏 공세’의 틈바구니였다(‘뗏’은 베트남에서 음력 설을 이르는 말로, 한국인들에겐 ‘구정 대공세’가 익숙하다). 죽은 사내는 베트콩 장교인 응웬반렘이라고 알려졌지만, 확실치는 않다. 이름이 ‘레꽁나’ 또는 ‘베이롭’이라는 설도 있다. 그는 남베트남 공무원 가족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끌려왔다. 역시 확실치 않다. 심문을 받을 기회도 없었다. 로안 장군은 그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냥 죽였다. 왜 그랬을까.
두 손이 뒤로 묶인 베트콩 용의자가 남베트남 무장군인들에게 끌려오고 있다.<김용택 보도사진집: 역사의 찰나>(1995)
곧바로 치안국장 응웬응옥로안 장군이 리볼버 38구경 권총을 그의 이마에 대고 발사하려는 순간.AP
하루 전날인 1월31일 새벽. 설 이틀째. 사이공의 밤하늘엔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4일 전인 1월27일 새벽 2시를 기해 7일간의 설 휴전을 통보했다. 총을 내려놓자고 한 것이다. 고향을 찾아 떠난 사람이 많았다. 폭죽은 설에 들뜬 사람들의 가슴을 한껏 부풀게 했다. 그것은 언뜻 총성과 폭탄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날 새벽 사이공 시민들은 뭔가 심상찮은 사변이 다가오고 있음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 폭죽에 섞인 기관단총 소리와 박격포 소리가 사이공을 포위하며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베트콩이 쳐들어왔다. 북베트남군이 쳐들어왔다. 휴전 약속은 깨졌다. 그들은 설을 맞아 정규군과 게릴라 8만여 명을 동원해 남베트남 전역에 미리 계획된 일제 공세를 가했다. 사이공을 비롯해 7개 성과 10여 개 도시에 맹렬한 총·포격을 가하고 한·미·남베트남 연합군과 여러 곳에서 시가전·백병전까지 펼쳤다. 가장 급박한 순간은 1월31일 새벽 4시였다. 베트콩 1개 소대 특공대가 로켓포를 발사하며 사이공 주재 미국대사관 8층 건물에 침입해 아래쪽 5개 층을 6시간 동안이나 점거했다. 미군은 헬리콥터로 대사관 옥상에 공수부대를 내려보냈다. 피 튀기는 총격전이 벌어졌다. 오전 10시10분께 미 공수부대는 베트콩 특공대 19명 중 마지막 1명을 사살하고 대사관을 되찾았다. 이 과정에서 미국인 8명과 미 해병대원 19명도 목숨을 잃었다. 마치 10일 전 대한민국 서울의 청와대 코앞까지 몰려와 피아간에 처참한 결과를 남긴 북한 무장특수부대의 재현 같았다.
다시 2월1일의 사이공 거리. 로안 장군의 즉결처형은 시원한 복수처럼 보였다. 베트콩의 뗏 공세로 가족을 잃은 사이공 시민들이라면 체증이 확 풀렸는지도 모르겠다. 빨갱이들에게 본때를 잘 보였다며 칭찬한 사람도 적지 않았으리라. 로안 장군은 치안국장이었다. 8개월 전까지는 군사보안국장도 겸임했다. 계급은 준장. 재판 없이 진행된 총살이 법적으로 온당한지는 논외로 하자. 다만 신중하게 처신해야 하는 남베트남 정부의 고위 장성이자 치안 당국 책임자의 행동치고는 즉흥적이다. 앞서 밝혔듯, 현장에선 과 의 카메라맨이 지켜보고 있었다.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인 한국인 김용택(36)도 있었다. 그는 참혹한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 베트콩이 쓰러진 뒤에야 셔터를 눌렀다고 한다. 기자들 앞에서 대놓고 포로를 처단한 행위는, 로안의 어떤 자신감을 증명하는 퍼포먼스였을까. 그는 남베트남에서 손꼽히는 안하무인 실력자였다.
참혹함 차마 담지 못한 <동아일보> 기자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가 물러가고 남베트남 정부(베트남공화국)가 정식으로 수립된 것은 1955년 10월26일이다. 초대 대통령은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불리던 응오딘지엠이었다. 그는 불교도 박해와 각종 부패로 민심 이반을 자초하다가 1963년 11월1일 쿠데타를 일으킨 젊은 장교들에 의해 동생 응오딘뉴와 함께 살해된다. 이때 쿠데타의 주축은 즈엉반민, 응웬반티에우, 응웬칸, 응웬까오끼였다. 이들은 1964년 1월30일과 12월20일, 1965년 2월20일 등 10여 회 엎치락뒤치락했던 쿠데타 연속극의 주연 또는 조연 또는 피해자로 역사 무대에 등장한다. 결국 1965년 6월19일 35살의 응웬까오끼가 실권을 쥔 총리에 취임하고 42살의 응웬반티에우는 명목상의 국가원수 자리에 앉는다. 그러나 2년 뒤인 9월3일 민정 이양을 위한 제헌의회 대통령 선거에선 응웬반티에우가 대통령으로, 응웬까오끼가 부통령으로 출마해 당선한다. 둘은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대선을 앞두고 암투를 벌이다 군 내 서열에 따라 자리를 정하고 일정하게 권력을 분점하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로안은 바로 그 응웬까오끼 부통령의 절친이자 오른팔이었다.
베트콩 용의자가 맥없이 쓰러졌다.<김용택 보도사진집: 역사의 찰나>(1995)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도로를 물들이고 있다.<김용택 보도사진집: 역사의 찰나>(1995)
로안은 1930년 12월11일 베트남 중부 후에에서 태어났다. 투득 무술학교에 이어 투득 보병학교를 졸업한 해가 1952년. 프랑스-베트남 연합돌격대에서 근무하던 그는 1953년 프랑스 공군학교로 떠난 뒤 1955년 돌아와 남베트남 최초의 폭격기 조종사로 활약했다. 1960년대 초반 냐짱 제2정찰비행단장을 거쳐, 1964년 공군사령관이던 응웬까오끼 밑에서 부사령관도 지냈다. 1965년 2월엔 꾸이년 미군 숙소 폭탄테러 보복을 명분으로 한 미-남베트남 연합군의 북베트남 폭격에 지휘관으로 참여하면서 승승가도를 달린다. 이후 대령으로 올랐고, 치안국장과 군사보안국장 지위도 얻었다.
다시 사이공 거리. 이번엔 1968년 2월9일이다. 로안은 8일 전 베트콩을 쏴 죽이던 그 복장 그대로 신문에 등장했다. 한 건물의 발코니에서 베트콩과의 치열한 싸움으로 폐허가 돼버린 사이공 남쪽 지역을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이 전송한 사진.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공세는 계속됐다. 사이공 외곽의 쩌런 화교 거리를 장악한 베트콩들은 사이공 시내 중심부를 향해 맹포격했다. 떤선녓 공항 근처 경마장도 교전으로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사진 속의 그는 외로워 보였다. 발코니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세계 각국에 전송된 끔찍한 사진을 떠올렸을까. 베트콩의 표적으로 확실히 찍혔으니 몸조심해야겠다는 계산을 하면서 말이다. 그는 사이공의 반공 청년들에게도 찍힌 몸이었다. 자기 지프에 이발사를 태우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장발족만 보면 직접 붙잡아 머리카락을 미는 이상한 취미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남베트남 관료들 사이에서도 사고뭉치로 찍혀 있었다.
실권자 비호받으며 승승장구
2년 전인 1966년 10월12일. 남베트남 보건상 응웬바카와 부총리 응웬투비엔 등 각료 7명은, 경찰 총책임자로서 전횡을 일삼는 로안의 경질을 주장하며 응웬까오끼 총리에게 집단사표를 냈다. 로안은 응웬바카 보건상의 수석비서관인 응웬탄론을 영장 없이 구금하는 등 경찰권을 멋대로 행사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로안은 그해 봄부터 군사보안국장으로서 중부지방 불교도 데모대에 대한 강경한 대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응웬까오끼의 정적이었지만 중부지방 불교도들에게는 열렬한 지지를 받던 제1군단장 응웬찬티 장군을 해임하자 내란 직전으로까지 불붙은 데모였다. 다낭과 후에의 정부방송국이 점령되고 시가전이 벌어지는 등 중부지방 데모는 3개월을 끌면서 남베트남 내부를 위협하는 최대의 변수로 부상했다. 해임된 응웬찬티 장군의 뒤를 이어 제1군단장에 임명된 응웬바까오 장군도 로안의 진압 명령을 거부하다 해임됐다. 결국 로안이 임시로 직접 데모 진압을 지휘할 지경에 이르고, 응웬찬티 장군은 미국으로 망명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안은 응웬까오끼의 오른팔로 확고한 자리를 잡으며 준장으로 진급한다. 더불어 그의 악명은 더욱 높아만 갔다.
로안은 각료들의 해임 압력을 견뎌냈지만 대선을 앞두고 특정 후보에게 편파적이라는 원망을 사다 결국 1967년 6월 군사보안국장 자리를 박탈당했다. 11월엔 치안국장 감투도 빼앗길 위기에 몰렸지만 용케 유지했다. 그것이 어쩌면 비극이었다.
1968년 2월13일, 그는 다시 언론에 이름을 드러냈다. 베트콩 군사정치기구 최고위책으로 거물에 속한다는 소장 쩐도가 미군에게 사살됐다는 기자회견이었다. 로안의 역할은 쩐도의 주검이 맞다고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과연 그 주검이 쩐도냐는 의심이 제기됐다(실제로 다음날 주검이 없어졌다는 보도가 나온다). 뗏 공세 기간 중 베트콩의 사기를 꺾으려는 심리전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베트콩의 표적이 되다
어쨌거나 로안은 승리자였다. 한 달간의 뗏 공세 전투에서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군은 각각 2천 명 정도가 죽었지만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그 10배 가까운 3만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남부 지역 베트콩 조직은 완전히 구멍이 났다. 뗏 공세 작전을 이끈 북베트남 국방상 보응웬잡 장군은 “이제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희귀한 공격 방식으로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결코 생각하지 못한, 또한 생각할 수 없는 군중봉기가 결합된 총공격”(1968년 1월 베트남노동당 제14차 중앙회의)을 기획했다지만, 참패였다. 보응웬잡은 사이공의 허를 찌르기 10일 전부터 2개 사단을 동원해 비무장지대 아래쪽 케산의 미 해병 전초기지를 집중 공격했다. 이를 막기 위해 미군의 B52 폭격기가 출격하고 병력 7만5천 명이 배치됐다. 적 정예부대를 북부에 잡아놓고 설에 중부와 남부를 효과적으로 치려는 전략이었다. 뗏 공세는 군사적으로 완전히 실패했다(정치적 승리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룬다). 남베트남 치안 책임자 로안은 의기양양했을지 모른다.
베트콩들은 로안을 잊을 수 없었다. 동지를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능멸한 대가를 돌려줘야 했다. 치명상을 입히거나 처단해야 했다. 석 달 뒤 사이공 거리. 베트콩 화기부대의 포 조준경에 로안의 얼굴이 잡혔다. 드디어 그가 쓴맛을 볼 차례였다.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구엔 & 응웬: 변화된 베트남어 표기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게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쓰는 성 ‘응웬’(Nguyen)이다. 가령 보응웬잡을 이전에는 보구엔잡으로 썼다. 티에우(Thieu)의 경우 티우였다. 한국 사람들에겐 ‘티우 대통령’이 익숙하다. 정확한 이름은 응웬반티에우. 고딘디엠(Ngo Dinh Diem)은 응오딘지엠, 구엔곡로안(Nguyen Ngoc Loan)은 응웬응옥로안이 맞는 표기다. ‘응웬’은 ‘응우옌’으로도 쓴다. 트란(Tran)의 경우 ‘쩐’이나 ‘짠’이 정확하다. 베트남어에서 ‘tr’은 ‘ㅉ’ 발음이다. ‘Nha Trang’의 정확한 발음은 ‘나트랑’이 아닌 ‘냐짱’이다.
Eddie Adams의 사이공 처형
이 사진으로 퓰리처 상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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