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임진강(臨津江) * 조청미(趙淸美)

marineset 2023. 5. 2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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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의 꽃, 프리마돈나 조청미(趙淸美). 북한 예술로 읽다(6)


이철주 편집기획위원
승인 2016.08.17 17:44



1957년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사는 경상도 출신의 탄광 징용자로 총련 상공회 초대회장을 지낸 동포 상공인 조봉대와 진영례의 7남매 중 3녀로 태어나, ‘우리학교’인 규슈(九州)조선중고급학교로 진학해 우리말과 민족예술을 배웠다. 소조 활동시 성악, 피아노, 발레, 피겨스케이팅 등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여 온 그녀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 온 것은 16살 때였다.

1973년 7월30일 국립평양만수대예술단이 일본을 최초로 방문했다. 아사히신문 공동주최로, 8월2일부터 동경, 나고야, 오사카, 교토 등 7개 도시를 9월7일까지 순회한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와 ‘무용 음악 앙상블’ 공연이 있었다. 이 공연을 무려 5번이나 관람하면서 감동을 넘어 영혼을 관통한 듯한 전율을 느꼈다던 그녀는 무작정 예술단 일행을 따라 시노모세키행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평양음악무용대학(현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 진학과 만수대예술단 입단이라는 꿈을 가졌다. 결국 당시 총련 후쿠오카 상공회 회장인 아버지와 여성연맹 간부였던 어머니를 설득해 평양행을 허락 받았다.

그 시절에 ‘북조선’으로의 귀국은 가히 열풍 수준이었다. 해방 직후 고향으로 귀국시 재산을 가지고 가는 것을 제한한 기만적인 미군정과 일본 정부 때문에 귀국을 미루거나 남았던 이들은 여전한 일제의 차별과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기민정책으로 외면한 한국 정부와 달리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북측이었다. 재일조선인들을 ‘북한 공민’으로 선언하고 일본측에 권리와 인권을 지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1957년 4월8일에는 ‘조선학교’에 첫 교육 원조금과 장학금을 보내주었으며, 이후에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원이 이루어졌다. 동포 사회는 이것을 ‘생명수’라 부르며 환호했고, 이것이 현재의 북과 재일동포 사회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초가 되었다.


 


평양에 간 그녀는 대동강변에 자리 잡은 총련간부 자녀 합숙소에서 지내며, 평양음악무용대학 예비과를 거쳐 같은 해 10월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하였다. 2번의 변성기와 소아결핵으로 난관도 많았지만, 이화여대 출신의 월북 성악가인 조경, 강시종, 왕혜숙 교수 등의 지도를 받으며 착실하게 성악가의 길을 밟을 수 있었다.

1979년 최우등으로 졸업을 한 조청미가 1980년 처음 배속된 곳은 ‘피바다가극단’이었다. 평양음악무용대학 연구원(대학원) 수재학부를 병행하며 실력을 쌓아가던 그녀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1987년 10월이다. 당에서 심사 끝에 프랑스 툴루즈국제성악콩쿨(Toulouse International singing competition) 참가를 허락한 것이다. 제33차 콩쿨의 요강은 칸타타, 오페라 아리아, 프랑스 노래 등을 겨누는 것으로, 26개국에서 105명이 참가를 했다. 2차 심사 직전 감기 몸살에 걸려 위기가 찾아 왔지만, 3차 결선 결과 소련과 캐나다 참가자에 이어 3위로 입상을 했고, 동시에 특별상까지 수상을 하였다.

국내에서의 입지는 이미 탄탄대로였다. 1983년 3월부터 혁명가극 ‘피바다’에서 주인공인 을남 어머니 역에 캐스팅되어 ‘피바다’의 2대 어머니로 활동 중이었다. 1971년 7월17일 초연한 날부터 ‘피바다’의 1대 어머니 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북측 최고의 성악가 중 한명인 김기원으로부터 바통을 이어 받은 것이다.




1990년 9월14일 국립평양예술단의 단원으로 조청미는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십수 년 전 동경하던 평양 예술가들을 따라다녔던 철없던 소녀가 이제는 북측을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되어 고향집을 찾은 것이다. 비록 한반도를 닮은 정원을 집에 둘 정도로 통일을 열망하던 아버지는 그 사이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피바다 주역을 맡은 첫 공연에도, 국제콩쿨의 현장에도 함께해 준 어머니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후쿠오카의 자랑’이라는 현수막이 거리에 내걸렸고, 그녀는 ‘재일조선인의 꽃’이 되었다.

1991년부터 윤이상연구소의 겸임가수로도 활동을 한 바 있는 조청미는 윤이상 선생의 가르침을 가슴에 담고 산다고 한다. “예술가는 정치에 등 돌리지 말고 정치에 밝아야 하며, 예술가는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합니다.”




이철주 편집기획위원은 10년 넘게 남북 사회문화교류 영역에서 활동해 온 문화기획자다. 금강산가극단 내한공연 제작, 평양조선국립미술관 내한전 합의, 사할린 남북 해외 청소년 평화미술전 주관, 조선무용50년-북녘의 명무, 철원노동당사 DMZ평화음악회, 조선학교 중등교육 70주년 기념 꽃송이콘서트 등을 제작했다. 현재는 남북합동음악회와 평화미술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 이철주 님은 10년 넘게 남북 사회문화교류 영역에서 활동해 온 문화기획자다. 금강산가극단 내한공연 제작, 평양조선국립미술관 내한전 합의, 사할린 남북 해외 청소년 평화미술전 주관, 조선무용50년-북녘의 명무, 철원노동당사 DMZ평화음악회, 조선학교 중등교육 70주년 기념 꽃송이콘서트 등을 제작했다. 현재는 남북합동음악회와 평화미술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철주 편집기획위원 news@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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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조청미|북한가요

림진강 맑은 물은 흘러흘러 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고향 남쪽땅 보고파도 못가니
림진강 흐름아 원한싣고 흐르냐


강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울고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벌 이삭마다 물결우에 춤추니
림진강 흐름을 가르지를 못하리라


내고향 남쪽땅 보고파도 못가니
림진강 흐름은 원한싣고 흐르느냐
림진강 흐름은 원한싣고 흐르느냐


개작된 가사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임진강 하늘 높이 무지개 서는 날
옛 친구 들판에서 내 이름 부를 때
내 마음 고향모습 추억속에 사라져도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내고향 북녁땅 가고파도 못가니
림진강 흐름을 가르지를 못하리라
림진강 흐름을 가르지를 못하리라

조청미


현재 북한의 혁명가극 '피바다' 의 주인공 을남 어머니역을 열연하고 있는 인민배우이자 북조선의 프리마돈나 '총련의 딸'조청미(47)는 북한에서 팬 레터를 많이 받는 배우로 알려져 있다.


1957년 일본 후쿠오카(福岡)현에서 태어난 총련 출신이다.


총련계 조선중고급중학교를 마친 그는 1973년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유학했다. 이 대학을 졸업한 후 1980년 북한 피바다가극단에 입단, 성악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83년 3월부터 혁명가극 피바다에서 어머니역을 맡았던 그는 1987년 10월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성악대회에서 3위에 입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87년 12월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평양에서 수차례 개인음악회를 갖기도 했다.


1989년 3월 독창 '빛나라 정일봉'을 불러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로부터 중음(中音)을 잘 표현했다는 찬사를 들었으며, 1997년 11월에는 배우로서는 최고 영예인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조청미가 부른 노래로는 가요 '산으로 바다로 가자', '우리의 청춘시절', 영화음악 '마음의 깃을 찾아'(영화 <내가 본 나라> 주제가), '조국의 품에 안겨' 등이 있다.

 

朴世永

1902년 7월 7일 ~ 1989년 2월 28일, 86세

경기도 고양군 출신 월북 시인.

송영과 함께 배재고보에 입학하여 교원 강매, 이중화의 영향을 받아 문학을 하기 시작했다. 3.1 운동 당시 송영과 함께 등사신문을 발간해 독립사상을 고취했으며 배재고보 졸업 후 상하이로 갔다. 문학단체 염군사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황포강반>을 발표했고 귀국후에는 1925년 연희전문에 편입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카프 문학운동에 참가했으며, 송영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동시를 다수 창작하였다. 1928년에는 고향 고양군에서 교원을 역임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동시, 동극을 발표하였다. 1937년 시집 《산제비》를 펴낸 이후 해방까지 절필하였다. 해방 후 1946년 월북하여 조선문학작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출판부장을 역임했고 1947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인 애국가를 작사했다. 한국전쟁 기간에는 종군작가로 참전하여 군무자들의 문예 활동과 창작을 지도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에는 요직을 두루 겸하였고, 1955년에는 몽골 방문 경험을 토대로 <몽고방문시초>를 썼다. 1962년에는 그의 대표작인 서사시집 <<밀림의 역사>>를 썼는데, 북한에서 이 작품은 조기천의 <<백두산>>과 함께 북한의 2대 걸작 서사시로 평가받았다.

그가 지은〈림진강〉은 1950년대에 지은 유행가로, 대한민국에 두고온 가족들과 벗들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노래인데 가사 내용 중에 남한의 궁핍한 경제상을 북한의 풍족한 협동벌의 모습과 대조시켜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담으려 했다. 이 노래가 남한에서 유행하자, 정부는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탄압하였지만 1990년대에 다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재일교포 가수 김연자가 서울에서 진행된 텔레비전 음악회에서〈림진강〉을 노래하여 남한에서도 림진강을 다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양희은, 김용우, 적우 등이 리메이크하여 불렀으며, 북조선에서는 재일교포 출신의 성악가 조청미가 불렀다. 이 노래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널리 불렸는데, 2005년 조총련을 주제로 한 일본 영화 박치기의 주제가로 남한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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