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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단] 土禪 함석태와 澗松 전형필

marineset 2023. 5. 25. 01:27

[논 단] 土禪 함석태와 澗松 전형필

권훈 논설위원
기자
등록 2015.01.20 10:04:33
제621호




‘간송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서울 성북동 어귀에 있는 작은 미술관 전시회를 계기로 간송 전형필(1906~1962)의 문화재 사랑이 재조명되고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문화재를 지키려는 일념으로 전 재산을 쏟아부으며 거장들의 걸작을 수집하였다. 전형필이 수집한 소장품의 면면을 보면 김정희, 정선, 심사정, 김홍도 등의 작품으로 모두가 국보급이다. 지금의 간송 미술관을 탄생시킨 그의 애국심은 독립투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간송 전형필은 문화 독립 운동가라 말할 수 있다.

간송 전형필에 견줄 만한 인물이 있는데 바로 치과의사 함석태(1889~?)이다. 그는 최초로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한 한국인(1914년 2월 5일), 우리나라 최초의 치과 개원의(1914년 6월 19일경),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한성치과의사회의 초대 회장(1925년)과 같은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전형필과 함석태는 서로 다른 점도 있지만, 공통점이 참 많다.

함석태는 평안북도 영변군의 부잣집 독자로 태어나 약관의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 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함석태보다 17살이 어린 전형필은 서울의 대부호 아들로 태어났고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함석태는 25세에 서울 남부 곡교에 건물을 신축하여 치과를 개원하였고, 전형필은 26세에 서울 종로구 관훈동의 한남서림을 인수하여 문화재 수집을 시작하였다.

함석태와 전형필은 독립운동가 오세창(1864~1953)의 권유로 문화재 수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함석태는 특히 도자기를 좋아해서 호를 ‘토선(土禪)’이라 하였고 전형필은 오세창으로부터 ‘간송(澗松)’이라는 호를 선사 받았다. 두 사람은 근현대 미술 애호가 및 수장가 14인에 포함되었고 1940년 5월에는 조선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 십대가 산수풍경화전’에 함께 출품할 정도로 비슷한 수장품을 소유하고 있었다. 


함석태는 일본을 왕래할 때 항상 ‘금강산 연적’을 지니고 다녔는데 처음에는 일본 형사들에게 까다로운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의 골동품 집착에 대한 소문이 나서 연적만은 검사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의 그 연적은 지금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어 평양 조선 미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편 전형필은 본래 주인이 부른 가격보다 열 배를 주고 사들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6.25 전쟁 때 낮에는 가방에 넣어 다녔고 밤에는 베개에 보관하여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훈민정음 원본은 지금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방 전후 혼란시기에 함석태와 전형필은 선택의 차이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함석태는 일제 소개령에 따라 1945년 자신의 소장품들을 평안북도 영변으로 옮겼다. 해방 후 함석태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고 다만 그의 일부 소장품들은 지금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에 전시 중인데 차라리 그때 서울에 그대로 계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만 가득하다.

반면 전형필은 한국 전쟁 중 북한군에게 그의 소장품 전부를 뺏길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후 1962년까지 우리 문화재 보존을 위한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의 공로는 인정을 받아 1962년에는 문화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되었고 2014년에는 1등급 문화훈장 금관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지금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 가면 간송 전형필이 보존한 대작들을 감상할 수 있다(2014년 12월 14일~2015년 5월 10일).

함석태는 일제 강점기 시절 국민의 구강 보건을 위한 계몽 활동에 앞장섰고,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저작 기능을 회복시켜 주었고, 강우규 열사의 손녀 강영재를 입양하여 건강한 지성인으로 성장시켰고, 망국의 한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순종의 치통을 해소했고, 간송 전형필 못지않게 조국의 문화재 지킴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어두운 암흑의 시대에 다방면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여준 대한민국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 탄생이 올해로 126주년이 되는 해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어디에도 함석태 선생을 기리고 추모하는 공간을 찾을 수 없다. 늦게나마 우리 치과계에서라도 그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드렸으면 한다.

----------------------------- 한국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 ----------------------------------------

함석태는(1889년~?)

함석태가 졸업할 당시 아직 치과 의사 면허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정식 치과 의사는 아니었다. 1913년 11월 15일 치과의사규칙이 발표되고, 1914년 3월 1일부터 법령이 실시되었고, 치과의사가 되려면 치과의사규칙에 따라 조선 총독의 면허를 받아야 했다. 1913년 12월 11일 치과의사규칙에 따른 취급 수속이 제정되어 치과의사의 업무가 의사·의생와 같이 경찰에서 취급하게 되었다. 함석태는 치과의사규칙에 따라 치과의사 면허 제1호로 등록하여, 1914년 2월 5일 치과의사 면허를 허가받았고, 그해 3월 11일 관보에 게시되었다. 그해 6월 함석태는 서울 삼각동 옛 제창국 자리에서 한성 치과의원을 개원하였다.

당시에는 순종 내외도 일본인에게 치과 진료를 받고 있었는데, 한국인이 치과 진료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성 치과의원을 찾았다고 한다.[2] 순종 내외가 진료를 받을 때 치료비는 따로 정하지 않고, 때에 따라 금시계나 금단추, 현금을 주었다.

서울에 있는 의사는 120여 명이었고, 그 가운데 치과 의사는 20여 명이었다. 일본인 의사들은 외국인, 예컨대 데이비드 에드워드 한(한국명 한대위)과 같은 외국인 의사가 개업하는 것을 꺼렸다. 또한 일본은 한국인이 치과의사와 같은 연구직·기술직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지 않았는데, 이는 그럼으로써 한국인이 사상이나 정치 분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함석태는 그러한 틈바구니에서 자리를 잡았고, 그의 뒤를 이어 1917년 한동찬(韓東燦)이 동경 치과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개업하였고, 1919년 김창규(金昌圭)가 동양 치과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광화문에서 개원을 하였다. 1921년 이희창(李凞昌)이 함석태와 같은 학교인 일본 치과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무교동에서 개업했으며, 이희창보다 1년 후배인 임택룡(林澤龍)이 1922년 세브란스 병원 치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개업이 힘들자 1924년 한국인 치과의사로는 함석태 한 사람만 개업하고 있다고 함석태가 자신의 글 〈구강위생(口腔衛生)〉에서 밝힌다.[4] 또한 그 글에서 구강 위생에 대해 한국인이 소홀함을 지적하였고, 전반적인 관심 부족 때문이라고 안타까워 한다.[2]

일제가 1922년 4월 1일 경성 치과의학교(京城齒科醫學校)를 인가하여 1922년 4월 15일 개교식을 가졌다. 그 학교에서 1925년 4월 15일 제1회 졸업생 한국인 23명이 배출되자, 함석태는 안종서, 김용진 등 십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한성치과의사회(漢城齒科醫師會)를 한국인만 회원으로 받아들여 조직하였다. 함석태는 함석태는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당당하게 치의학에 대한 사회에 인식을 환기시키는 것과 후진의 앞길을 열어주는 일에도 책임을 느꼈고, 그에 따라 한국인 치과의사가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조선치과의사회(朝鮮齒科醫師會)에서 소외되는 현실에서 한국인만의 치과의사회가 필요함을 공감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인 치과의사로서의 사회에 봉사가 되는 일이라면 어떠한 노력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의 성향이 나라와 동포를 사랑한 면도 있었다.

그리고 한성치과의사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조동흠이나 총독부의원 치과에서 조수로 근무하던 김연권도 공감하여 함께 참여했으리라 여겨진다. 한성치과의사회는 처음에 회원 7명으로 시작하였으며, 함석태는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끝-
 
---------------------------- 1923년 1월4일 동아일보 광고-------------------------------
 
경성부 삼각정 1번지; 한성치과의사회(1938년)  19380221.PNG  1938년 2월21일 동아일보; 한성치과의사회 임원 선출


病後療養中略禮恕諒

병을 앓고
요양중이니오니

간략한 예를
표함을

용서하고
양해하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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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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