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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의학] 이 해 박는집

marineset 2023. 5. 25. 01:28
[역사로 보는 의학] 이 해 박는집 
 VOM 매거진 / SNUH 이야기 

2015.04.15. 15:40

                                                                 


고종 황제, 이방인에게 입을 벌리다

1926년 6월 10일, 서울의 종로. 구름처럼 모여든 군중 사이로 순종 황제의 상여가 지나가고 있다. 서글픈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나라 잃은 것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데, ‘태정태세문단세…’의 마지막 임금(황제)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런데 이 사진을 보노라면 왼쪽 상단에 우스꽝스런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 해 박는집’. 간판에는 의치(義齒)까지 그려져 있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치과병원과는 달리 보철(補綴)만 부각된 이름이다.

​사진. 서울 종로의 이 해 박 집(1926) - ‘이 해 박는 집’이라는 간판은 오늘날의 일반적인 치과병원과 달리 보철(補綴)만 부각된 이름이다. 이러한 곳들에서는 실제로 입치사들이 간단한 발치(拔齒)와 보철 시술을 맡았다.

기록에 의하면, 고종 황제도 1903년에 보철 시술을 받았다. 황제는 앞니가 하나 빠져 일본 고베에서 개업하던 미국인 치과의사 소어스(James Souers)를 불러왔다. 그러고는 마음 놓고 식사를 하기 위해 낯선 이방인에게 입을 벌렸다. 소어스는 사기질 치아를 금죔쇠로 끼워 맞추는 보철 시술을 했다. 황제는 시술 대가로 거금을 지불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치과의사가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 보철만 담당하는 입치사(入齒師)는 치과의사와 어떻게 달랐을까?

 


입치사, 수적으로 치과의사를 압도하다

우리나라에 치과의사는 1893년에 등장했다. 일본인 치과의사 노다(野田應治)가 우리나라에 건너와 인천과 서울에서 개업한 것이다. 그 후 치과병원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1914년 의사규칙과 함께 치과의사규칙이 반포됨에 따라 정규 치의학교육을 받은 치과의사들도 등장했다. 또한 이 해에는 일본 유학 출신의 함석태가 한국인 최초로 치과병원을 개업했다. 이 무렵 서울의 치과의사는 일본인 4명, 미국인 1명 정도였다.

​사진. 서양인 치과의사의 출장진료 광고 - 중국이나 일본에서 활동하던 서양인 치과의사들은 간간이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출장진료를 하곤 했다. 「독립신문」 1899년 5월 5일자에, 치과의사 슬레이드(Harold Slade)가 서울 정동의 한 영국인 집에 머물고 있으니 틀니를 할 사람은 시술을 받으라는 광고가 실렸다.

그럼 입치사는 무슨 일을 했으며, 언제 등장했을까?
입치사는 ‘이 해 박는 집’, ‘잇방’, ‘치술원(齒術院)’, ‘입치세공소(入齒細工所)’, ‘구강치아미술원(口腔齒牙美術院)’ 등 재미있는 간판을 내걸고 간단한 발치(拔齒)와 보철 시술을 했다. 말 그대로 이를 해 넣는 기술자다. 이 직업은 일본에서 들어왔다. 1906년 일본에서 치과의사법이 개정되면서 발 붙일 곳이 사라진 상당수의 일본인 입치사들이 1907년 이후, 입치사의 영업을 허가했던 우리나라로 본격적으로 건너온 것이다. 한국인 입치사도 속속 등장했다. 1907년 서울 종로에서 개업한 최승룡을 비롯해 일본인 입치사의 보조로 일하던 사람들이 잇방을 차렸다.

입치사들이 빠른 속도로 한국 시장을 점유하면서 치과의사의 입지가 좁아져 버렸다. 그래서 일본인 치과의사들은 입치사 제도를 폐지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아예 입치사와의 경쟁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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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니에 놀라더니, 어느새 장식으로 금니까지

한국인들의 구강 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었다. 의료선교사 알렌의 기록에 의하면, 한국인은 누구나 진주같이 하얀 치아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보철은 발달하지 않았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 것이 상식이었다. 한국인에게 보철은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알렌에 따르면, 한 외국인 선장이 주막에서 밥을 먹은 후 입에서 틀니를 빼자 구경하던 한국인들이 기겁하며 도망쳤다고 한다.

외국인들의 발달된 치과술, 특히 국소마취제를 사용한 무통발치(無痛拔齒)는 한의사에게 의존해 오던 한국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치과 전문의는 아니었지만, 알렌만 해도 제중원에서 발치술이나 구강외과 시술을 행했다. 반면 틀니나 보철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감은 상당했다. 어떤 이는 일본인 치과의사 노다에게 보철 시술을 받은 후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려한 나머지 의치의 연결 고리에 금 대신 백금을 썼다.

하지만 이런 기피증도 얼마 후 사라져갔다. 오히려 돈푼깨나 있는 부자, 모양내기 좋아하는 멋쟁이나 기생들 사이에서 액세서리 삼아 중철치 측절치 등 건전한 치아에 전부 금관 또는 개면 금관을 해씌우고 번쩍거리며 다니는 것이 일대 유행이 되었다.

1920년대 이후 치과의사가 늘어나면서 구강 위생에 대한 대중적인 계몽 활동도 본격화되었다. 특히 1928년에는 일본치과의사회가 6월 4일을 ‘충치예방데이’로 정했는데, 한국에서도 한성치과의사회가 충치예방데이 행사를 실시했다. 당시 서울 같은 도회지의 아이들은 과자나 사탕 등 단 것에 노출되어 충치 발생이 늘고 있었다. 이에 치과의사들은 충치 예방책으로 칫솔 사용을 적극 권장하기 시작했다.

사진. 구강위생 보급 작품 현상 모집 포스터 - 1934년 구라브(클럽)치약회사가 구강위생 계몽 작품을 현상 모집했다. 초중등학생의 서예, 포스터, 작문 등 2천여 점이 들어왔다.​

김상태 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흥미진진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는 한국근대의료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진과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의료사』, 『제중원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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