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개황 PDF파일
1949. 변영태(卞榮泰) 특사 파견/대한민국 정부승인 교섭
공관약사 1949. 03. 03 수교
1954. 01. 19 마닐라에 한국 공사관 설치
1958. 02. 01 대사관으로 승격 /초대대사 김훈
필리핀은 6·25 전쟁기간 연인원 7천420명을 파병했고 이 가운데 112명이 전사했고 299명이 부상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에 필리핀 참전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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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주년 율동전투기념식 필리핀국립묘지에서 개최
“한국 전쟁은 결코 잊혀진 전쟁이 아닙니다. 한국전쟁은 영원히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제64주년 율동전투기념식이 지난 23일 오전 7시 30분에 필리핀 국립묘지 한국전 참전기념탑에서 필리핀 마틴 N 핀토 준장, PEFTOK 빌로리아 회장, 주필리핀대한민국대사관 이재환 공사, 한인총연합회 김근한 회장, 부인회 이화란 회장, 엄익호 재향군인회장, 이영백 민주평통동남아북부협의회장을 비롯한 관계자 및 PEFTOK 회원 및 가족, 필리핀 재향군인회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참전기념탑에서 헌화행사를 가졌다.필리핀정부를 대표해서 참석한 필리핀군 정보참모 마틴 N 핀토 준장은 주필리핀한국대사관 국방무관 김인수 중령과의 한국 인연에 대해 한국말로 소개하면서 필리핀과 한국은 혈맹으로 맺어진 우방이라고 강조했다.율동전투는 1951년 4월 23일에서 24일 양일간 필리핀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져 중공군을 몰아냈던 율동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필리핀은 한국전 당시 연인원 7,148명이 참전해 전사 112명과 부상 및 실종 약 350명의 희생이 있었다.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철의 삼각지에 있었던 율동전투로 중공군 1개 대대를 격퇴했다.
기념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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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고지 전투
"자유수호 전쟁 참여 보람..양국민 우방임을 잊지 말아야"
"한국 경제발전은 기적"
(마닐라=연합뉴스) 정재용 특파원 = "고지 하나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닷새 동안 유엔군과 중공군이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읍니다. 아직도 치열했던 `이리 고지전투'(Battle of Hill Eerie)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필리핀 한국전참전용사협회(PEFTOK)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콜로벤시오 도밍게스(79.예비역 대령) 씨는 지난 11일 마닐라에 위치한 참전용사협회 사무실에서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이같이 말했다.
이리고지 전투는 6.25 전쟁 때인 1952년 5월 18일부터 6월 21일 사이 강원도 철원군에 위치한 작은 산인 `이리고지'를 놓고 한국군 및 유엔군이 중공군과 벌인 전투를 말한다.
당시 이 고지에는 중공군이 강력한 진지를 구축해 버티고 있었으며, 유엔군들은 이 고지를 `섬뜩하다' `무시무시하다'는 뜻을 가진 `이리고지'로 불렀다. 아군은 한달여에 걸친 적극적인 공세 끝에 결국 이 고지를 차지했다.
이리고지의 전투에서는 미군 제 3사단에 배속돼 있던 필리핀 전투단이 큰 공을 세웠으며, 도밍게스씨도 이 전투에 참가했다.
도밍게스씨는 한국전이 한창이던 1952년 4월 필리핀 제 19전투단 소속 포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1년 가량 북한 및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다.
사병이었던 그는 6.25 전쟁 후에는 필리핀에 돌아가 장교 시험에 합격해 1982년 대령으로 제대할 때까지 30여년의 군생활을 했으며, 현재는 필리핀 한국전참전용사협회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도밍게스 씨는 "6.25 전쟁 당시 필리핀군은 다른 어느나라 군대보다 용감하게 싸웠다"면서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를 수호하는 전쟁에 참여한데 대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전투병을 파병한 국가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16개국에 이르지만, 필리핀이 참전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나라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필리핀은 북한군이 남침하자 미국,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군대를 파견한 나라였다. 총 7천420여명의 전투단을 파병, 전사 116명, 실종 16명, 부상 299명의 희생자를 냈다.
특히 1951년 4월 22일과 23일 이틀 동안 경기도 연천군 율동에서 필리핀 전투단이 1개 대대의 병력으로 중공군 3개대대와 치열하게 싸워 승리를 거둔 율동지구 전투는 한국 전쟁사에도 기록돼 있을 정도로 유명한 전투다. 연천군 연천읍 상리에는 율동지구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필리핀 참전비가 세워져 있다.
도밍게스 씨는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도 6.25 전쟁 참전용사였으며, 이번 필리핀 대선에서 사실상 당선된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50.자유당) 상원의원의 부친인 고(故)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전 상원의원도 6.25 전쟁을 종군기자로 취재했다"고 소개했다.
필리핀 500페소 지폐의 뒷면에는 종군기자 시절의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필리핀의 노병 가운데 3분의 1 가량이 현재 생존해 있다고 도밍게스 씨는 전했다.
참전용사들은 해마다 율동전투 승전기념일인 4월 23일 기념식을 거행한다. 또 필리핀 정부도 과거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 집권 시절부터 9월 7일을 `한국전 참전용사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도밍게스 씨는 한국과 필리핀 수교 60주년을 맞은 지난해에는 필리핀 참전용사들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열린 필리핀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도밍게스 씨는 "6.25 전쟁 당시에는 한국은 그야말로 폐허와 다름없었다. 도시에도 변변한 건물조차 없었다"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했던 한국이 이처럼 빠른 기간내에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은 기적과도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참전용사로서 한국이 날이 갈수록 잘 살고 국제사회에서 영향력도 커지고 있는데 대해 보람을 느낀다"면서 "필리핀과 한국이 목숨을 걸고 자유를 지켜낸 우방이라는 사실을 두 나라 국민이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도밍게스 씨는 우리나라 정부가 해마다 필리핀 참전용사 후손 150여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각종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소개한 뒤 "한국 정부가 필리핀 참전용사들과 가족들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대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지난해에는 필리핀 마닐라시의 국립묘지에 위치한 한국전 참전 기념비를 보수한데 이어 올해는 마닐라의 명소인 리잘 공원에 6.25참전기념 동상도 세워 다음달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국가보훈처는 또 필리핀군 총사령부 부근에 6.25전쟁 기념관도 건립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jjy@yna.co.kr
<영상취재 : 정재용 특파원, 편집 : 이세영 기자>
(끝)
The Battle of Hill Eerie refers to several Korean War engagements between the United Nations forces and the Chinese Communist Forces (CCF) in 1952 at Hill Eerie, a military outpost Battle
March 1952
In March 1952, Hill Eerie was the responsibility of the United States Army's 45th Infantry Division – Company K, 179th Infantry, commanded by Captain Max Clark.
On March 21, 1952, the twenty-six personnel of the third platoon, under the command of Lieutenant Omer Manley, set out to take over the outpost. Manley's men made up two rifle squads, a light-machine-gun squad and a 60-mm mortar squad.
Manley sent out two patrols to establish an ambush site around the hill. That night, both patrol squads sighted enemy activity. At 23:30, the Chinese attacked and a machine gun duel between the two sides ended after Captain Clark's troops on Hill 418 supported his men in the Eerie outpost with supporting machine-gun and mortar fire.
The battle continued on the morning of March 22 with the Chinese forces penetrating the outpost's perimeter and eventually overran Manley's men. Clark was then ordered to concentrate his artillery fire on Outpost Eerie after losing communications. At 01:30, Regimental Commander, Colonel Frederick A. Daugherty, ordered Clark to advance toward the hill and retake the hill.
Clark's men searched the area and found out that, of the 26 men who had defended the outpost, 8 were dead, 4 wounded, and 2 were missing (Lieutenant Manley and Corporal Joel Ybarra). They also recovered 31 enemy dead from around the hill and captured a wounded Chinese soldier. Later, Clark withdrew his troops to the main line of resistance.
May 1952
In May 1952, the 20th Philippine Battalion Combat Team, under the command of Colonel Querobin, engaged the Chinese forces at the town of Karhwagol, west of Chorwon; they were also involved in other major battles and assaults against the Chinese forces.
There were numerous closely fought battles on Hill Eerie, as well as on Hills 18, 200, and 19, ('Yoke', 'Uncle' and 'Old Baldy'), all in the T-Bone Hill area, but later the 20th were committed to the Beef Steak Hill area and in Alligator Sky.
Hill Eerie was a military outpost that changed hands many times and was a heavily fortified position with a commanding view of the plains below.
A series of raids were launched by the Filipinos, from May 18, led by Lieutenant Rodolfo Maestro, killing 28 CCF and a further 23 the next day, before disengaging with the enemy while tanks and artillery continued to bombard the outpost.
On May 21, 1952, Colonel Abcede ordered Major Felizardo Tanabe, the battalion's operations officer, to prepare the final assault on the Chinese position after several attempts to capture the outpost. Tanabe sent the 44-man 2nd reconnaissance platoon to sabotage the position.
The platoon was led by a young Filipino officer, a 1950 graduate of West Point's United States Military Academy, 2nd Lieutenant Fidel V. Ramos (future President of the Philippines).
Ramos divided the assault team into four groups of snipers, riflemen, scouts and forward observers, each with a radio operator, a messenger and a medic. The platoon was reinforced by some engineer demolition specialists and an artillery observer team. They left at 04:07.
The Filipino platoon crawled through rice paddies and scattered trees for two hours before it reach an irrigation ditch, about 400 meters from the top of the hill. Intelligence estimated the enemy strength to be one reinforced platoon of the Chinese Red Army.
The United States Air Force sent seven F-86 Sabre jet fighters to pound the enemy positions with napalm. There was also artillery support. After the bombardment, Ramos' men seized the front part of the trench network after discovering a hole in the blasted stack of barbed wire.
Close-quarter fighting raged as the retreating enemy fought back but the advancing Filipinos were gaining the upper hand. The scout team, led by Corporal Jose Palis, went into action on the right of the hill and was later joined by Lieutenant Ramos. Meanwhile, the rifle team, led by Sergeant Cipriano Drapeza, worked its way round to the left side of the hill while the sniper team, led by Second Lieutenant Yel Claveria, held the enemy's support from nearby Hill 191.
By 07:28, the Filipinos had demolished the Chinese bunkers and withdrawn from the top of the hill. Friendly tanks resumed their bombardment of Hill Eerie.
The assault lasted for two hours, Ramos' men suffered one injury while the Chinese had 1100 dead, 2540 wounded, whether from the supporting artillery, tanks and air strikes could not be determined. The battle was the final assault on Hill Eerie by the United Nations forces.
The Filipino battalion was replaced by the 2nd Battalion of the 179th United States Infantry.
June 1952
On June 16, 1952, the 19th Philippine Battalion Combat Team, under the command of Colonel Ramon Z. Aguirre, relieved the American battalion in the T-Bone ridge sector.
By June 18, the Chinese forces sought to recapture the area and launched an intense artillery and mortar barrage. The Filipinos held their ground and were able to repulse the Chinese attack.
On June 20, the Chinese forces launched another attack towards Hill Eerie and the rest of the T-Bone ridge area. At dawn, the Chinese had advanced sufficiently to engage in hand-to-hand fighting but the Filipino troops were able to hold the position.
By morning, the artillery battle continued but the allied forces successfully defended Hills Eerie and 191. As a result of the battle it was estimated that the CCF suffered 500 casualties while the Filipinos had 24.
The Filipino battalion was later relieved by the US 2nd Infantry Division on July 18, 1952.
1949. 변영태(卞榮泰) 특사 파견/대한민국 정부승인 교섭
공관약사 1949. 03. 03 수교
1954. 01. 19 마닐라에 한국 공사관 설치
1958. 02. 01 대사관으로 승격 /초대대사 김훈
필리핀은 6·25 전쟁기간 연인원 7천420명을 파병했고 이 가운데 112명이 전사했고 299명이 부상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에 필리핀 참전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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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주년 율동전투기념식 필리핀국립묘지에서 개최
“한국 전쟁은 결코 잊혀진 전쟁이 아닙니다. 한국전쟁은 영원히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제64주년 율동전투기념식이 지난 23일 오전 7시 30분에 필리핀 국립묘지 한국전 참전기념탑에서 필리핀 마틴 N 핀토 준장, PEFTOK 빌로리아 회장, 주필리핀대한민국대사관 이재환 공사, 한인총연합회 김근한 회장, 부인회 이화란 회장, 엄익호 재향군인회장, 이영백 민주평통동남아북부협의회장을 비롯한 관계자 및 PEFTOK 회원 및 가족, 필리핀 재향군인회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참전기념탑에서 헌화행사를 가졌다.필리핀정부를 대표해서 참석한 필리핀군 정보참모 마틴 N 핀토 준장은 주필리핀한국대사관 국방무관 김인수 중령과의 한국 인연에 대해 한국말로 소개하면서 필리핀과 한국은 혈맹으로 맺어진 우방이라고 강조했다.율동전투는 1951년 4월 23일에서 24일 양일간 필리핀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져 중공군을 몰아냈던 율동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필리핀은 한국전 당시 연인원 7,148명이 참전해 전사 112명과 부상 및 실종 약 350명의 희생이 있었다.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철의 삼각지에 있었던 율동전투로 중공군 1개 대대를 격퇴했다.
기념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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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고지 전투
"자유수호 전쟁 참여 보람..양국민 우방임을 잊지 말아야"
"한국 경제발전은 기적"
(마닐라=연합뉴스) 정재용 특파원 = "고지 하나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닷새 동안 유엔군과 중공군이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읍니다. 아직도 치열했던 `이리 고지전투'(Battle of Hill Eerie)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필리핀 한국전참전용사협회(PEFTOK)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콜로벤시오 도밍게스(79.예비역 대령) 씨는 지난 11일 마닐라에 위치한 참전용사협회 사무실에서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이같이 말했다.
이리고지 전투는 6.25 전쟁 때인 1952년 5월 18일부터 6월 21일 사이 강원도 철원군에 위치한 작은 산인 `이리고지'를 놓고 한국군 및 유엔군이 중공군과 벌인 전투를 말한다.
당시 이 고지에는 중공군이 강력한 진지를 구축해 버티고 있었으며, 유엔군들은 이 고지를 `섬뜩하다' `무시무시하다'는 뜻을 가진 `이리고지'로 불렀다. 아군은 한달여에 걸친 적극적인 공세 끝에 결국 이 고지를 차지했다.
이리고지의 전투에서는 미군 제 3사단에 배속돼 있던 필리핀 전투단이 큰 공을 세웠으며, 도밍게스씨도 이 전투에 참가했다.
도밍게스씨는 한국전이 한창이던 1952년 4월 필리핀 제 19전투단 소속 포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1년 가량 북한 및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다.
사병이었던 그는 6.25 전쟁 후에는 필리핀에 돌아가 장교 시험에 합격해 1982년 대령으로 제대할 때까지 30여년의 군생활을 했으며, 현재는 필리핀 한국전참전용사협회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도밍게스 씨는 "6.25 전쟁 당시 필리핀군은 다른 어느나라 군대보다 용감하게 싸웠다"면서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를 수호하는 전쟁에 참여한데 대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전투병을 파병한 국가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16개국에 이르지만, 필리핀이 참전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나라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필리핀은 북한군이 남침하자 미국,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군대를 파견한 나라였다. 총 7천420여명의 전투단을 파병, 전사 116명, 실종 16명, 부상 299명의 희생자를 냈다.
특히 1951년 4월 22일과 23일 이틀 동안 경기도 연천군 율동에서 필리핀 전투단이 1개 대대의 병력으로 중공군 3개대대와 치열하게 싸워 승리를 거둔 율동지구 전투는 한국 전쟁사에도 기록돼 있을 정도로 유명한 전투다. 연천군 연천읍 상리에는 율동지구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필리핀 참전비가 세워져 있다.
도밍게스 씨는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도 6.25 전쟁 참전용사였으며, 이번 필리핀 대선에서 사실상 당선된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50.자유당) 상원의원의 부친인 고(故)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전 상원의원도 6.25 전쟁을 종군기자로 취재했다"고 소개했다.
필리핀 500페소 지폐의 뒷면에는 종군기자 시절의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필리핀의 노병 가운데 3분의 1 가량이 현재 생존해 있다고 도밍게스 씨는 전했다.
참전용사들은 해마다 율동전투 승전기념일인 4월 23일 기념식을 거행한다. 또 필리핀 정부도 과거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 집권 시절부터 9월 7일을 `한국전 참전용사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도밍게스 씨는 한국과 필리핀 수교 60주년을 맞은 지난해에는 필리핀 참전용사들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열린 필리핀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도밍게스 씨는 "6.25 전쟁 당시에는 한국은 그야말로 폐허와 다름없었다. 도시에도 변변한 건물조차 없었다"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했던 한국이 이처럼 빠른 기간내에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은 기적과도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참전용사로서 한국이 날이 갈수록 잘 살고 국제사회에서 영향력도 커지고 있는데 대해 보람을 느낀다"면서 "필리핀과 한국이 목숨을 걸고 자유를 지켜낸 우방이라는 사실을 두 나라 국민이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도밍게스 씨는 우리나라 정부가 해마다 필리핀 참전용사 후손 150여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각종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소개한 뒤 "한국 정부가 필리핀 참전용사들과 가족들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대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지난해에는 필리핀 마닐라시의 국립묘지에 위치한 한국전 참전 기념비를 보수한데 이어 올해는 마닐라의 명소인 리잘 공원에 6.25참전기념 동상도 세워 다음달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국가보훈처는 또 필리핀군 총사령부 부근에 6.25전쟁 기념관도 건립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jjy@yna.co.kr
<영상취재 : 정재용 특파원, 편집 : 이세영 기자>
(끝)
The Battle of Hill Eerie refers to several Korean War engagements between the United Nations forces and the Chinese Communist Forces (CCF) in 1952 at Hill Eerie, a military outpost Battle
March 1952
In March 1952, Hill Eerie was the responsibility of the United States Army's 45th Infantry Division – Company K, 179th Infantry, commanded by Captain Max Clark.
On March 21, 1952, the twenty-six personnel of the third platoon, under the command of Lieutenant Omer Manley, set out to take over the outpost. Manley's men made up two rifle squads, a light-machine-gun squad and a 60-mm mortar squad.
Manley sent out two patrols to establish an ambush site around the hill. That night, both patrol squads sighted enemy activity. At 23:30, the Chinese attacked and a machine gun duel between the two sides ended after Captain Clark's troops on Hill 418 supported his men in the Eerie outpost with supporting machine-gun and mortar fire.
The battle continued on the morning of March 22 with the Chinese forces penetrating the outpost's perimeter and eventually overran Manley's men. Clark was then ordered to concentrate his artillery fire on Outpost Eerie after losing communications. At 01:30, Regimental Commander, Colonel Frederick A. Daugherty, ordered Clark to advance toward the hill and retake the hill.
Clark's men searched the area and found out that, of the 26 men who had defended the outpost, 8 were dead, 4 wounded, and 2 were missing (Lieutenant Manley and Corporal Joel Ybarra). They also recovered 31 enemy dead from around the hill and captured a wounded Chinese soldier. Later, Clark withdrew his troops to the main line of resistance.
May 1952
In May 1952, the 20th Philippine Battalion Combat Team, under the command of Colonel Querobin, engaged the Chinese forces at the town of Karhwagol, west of Chorwon; they were also involved in other major battles and assaults against the Chinese forces.
There were numerous closely fought battles on Hill Eerie, as well as on Hills 18, 200, and 19, ('Yoke', 'Uncle' and 'Old Baldy'), all in the T-Bone Hill area, but later the 20th were committed to the Beef Steak Hill area and in Alligator Sky.
Hill Eerie was a military outpost that changed hands many times and was a heavily fortified position with a commanding view of the plains below.
A series of raids were launched by the Filipinos, from May 18, led by Lieutenant Rodolfo Maestro, killing 28 CCF and a further 23 the next day, before disengaging with the enemy while tanks and artillery continued to bombard the outpost.
On May 21, 1952, Colonel Abcede ordered Major Felizardo Tanabe, the battalion's operations officer, to prepare the final assault on the Chinese position after several attempts to capture the outpost. Tanabe sent the 44-man 2nd reconnaissance platoon to sabotage the position.
The platoon was led by a young Filipino officer, a 1950 graduate of West Point's United States Military Academy, 2nd Lieutenant Fidel V. Ramos (future President of the Philippines).
Ramos divided the assault team into four groups of snipers, riflemen, scouts and forward observers, each with a radio operator, a messenger and a medic. The platoon was reinforced by some engineer demolition specialists and an artillery observer team. They left at 04:07.
The Filipino platoon crawled through rice paddies and scattered trees for two hours before it reach an irrigation ditch, about 400 meters from the top of the hill. Intelligence estimated the enemy strength to be one reinforced platoon of the Chinese Red Army.
The United States Air Force sent seven F-86 Sabre jet fighters to pound the enemy positions with napalm. There was also artillery support. After the bombardment, Ramos' men seized the front part of the trench network after discovering a hole in the blasted stack of barbed wire.
Close-quarter fighting raged as the retreating enemy fought back but the advancing Filipinos were gaining the upper hand. The scout team, led by Corporal Jose Palis, went into action on the right of the hill and was later joined by Lieutenant Ramos. Meanwhile, the rifle team, led by Sergeant Cipriano Drapeza, worked its way round to the left side of the hill while the sniper team, led by Second Lieutenant Yel Claveria, held the enemy's support from nearby Hill 191.
By 07:28, the Filipinos had demolished the Chinese bunkers and withdrawn from the top of the hill. Friendly tanks resumed their bombardment of Hill Eerie.
The assault lasted for two hours, Ramos' men suffered one injury while the Chinese had 1100 dead, 2540 wounded, whether from the supporting artillery, tanks and air strikes could not be determined. The battle was the final assault on Hill Eerie by the United Nations forces.
The Filipino battalion was replaced by the 2nd Battalion of the 179th United States Infantry.
June 1952
On June 16, 1952, the 19th Philippine Battalion Combat Team, under the command of Colonel Ramon Z. Aguirre, relieved the American battalion in the T-Bone ridge sector.
By June 18, the Chinese forces sought to recapture the area and launched an intense artillery and mortar barrage. The Filipinos held their ground and were able to repulse the Chinese attack.
On June 20, the Chinese forces launched another attack towards Hill Eerie and the rest of the T-Bone ridge area. At dawn, the Chinese had advanced sufficiently to engage in hand-to-hand fighting but the Filipino troops were able to hold the position.
By morning, the artillery battle continued but the allied forces successfully defended Hills Eerie and 191. As a result of the battle it was estimated that the CCF suffered 500 casualties while the Filipinos had 24.
The Filipino battalion was later relieved by the US 2nd Infantry Division on July 18,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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