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도 봄에 리비아 보건 노동청 위촉에 의하여 대우건설 의료진으로 선발되어 리비아에 갔다. 김포공항에서 타이항공을 타고 방콕 경유 로마까지 가고, 알이탈리아 항공으로 갈아타고 리비아 제2 도시 벵가지에 도착하니 거의 48시간만에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었다. 경유지에서 몇 시간씩 대기하고...참 지루한 여정이었다.
그 당시 대우건설은 벵가지 시내에 아파트, 병원, 학교, 도로 등 많은 공사현장이 있었고 사막 한 가운데에도 여러군데에 비행장과 도로걸설이 한참이었는데 나는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신규 수주받은 사막현장에 선발대로 팔려갔다.
벵가지와 트리폴리를 잇는 국도는 지중해 해변을 따라 길고 지루하게 연결되고 중간 중간에 낙타들이 출현하기도 하며 로드킬 당한 낙타도 수 없이 보게 되었다.
대형 트럭을 얻어타고 불모지로 가는 신세가 되었다. 벵가지 트리폴리 고속도로 중간 즈음에 시르테라는 곳에 건설본부에서 운영하는 마치 군대의 퍄견대 비슷한 중간 휴게소 겸 숙소가 있어서 끼니도 때우고 하룻밤 신세를 진 후 또 떠나가는데 주위는 온통 사막이었다. 날씨도 엄청 덥고 흙먼지 바람이 불어대는 벌판을 지나는 여정이었으니 참으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중간 중간에 마을이 나오면 잠시 음료수 사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또 강행군 하였다. 벵가지를 떠난지 하룻만에 Al Jufra의 주도인 Houn을 거쳐 또 사막을 질주하여 소크나(Sawknah)라고 하는 시골 동네를 뒤로하고 방향감각도 없는 사막 한 가운데 조그만 표지판만 달랑 꽃혀있는 캠프에 도착했는데, 컨테이너 숙소 한 동과 천막으로 된 간이 식당이 전부였다.
나는 이곳의 의무실장 겸 산업재해 관리원으로 일 하게 되었는데 나 포함 20명정도의 선발대가 소크나(Sawknah)-샤리프(Ash Shwayrif) 간 238Km의 군용도로 건설현장인 DC-20 요원이 된 것었다.
다음날부터 아무 차나 얻어타고 서울 대전 거리 정도 되는 훈(Houn)으로 나가서 현지병원 관계자들을 만나고 의무실 운영과 관련한 기자재 및 의약품 지원 요청 업무를 하면서 병원뿐 아니라 보건소, 치과에 소속된 의료진과 얼굴 알리기 업무를 병행하게 되었다.
한국 근로자도 리비아 정부에 의료보험을 들었기에 현지병원 이용은 물론 의약품 지원도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또한 현지 경찰서와 비행장 담당자를 만나서 중상 환자 발생시 수도 Tripoli의 종합병원으로 신속 후송하는 절차 등에 관하여 자문을 구하고 수질오염 등 풍토질환이 의심되면 역학조사를 실시하는 부서의 책임공무원도 찾아가고, 전갈이나 맹독성 뱀 등에 물리게 될 경우 응급으로 사용할 수 있는 해독주사제 등을 구하러 다니다 보니 너무 바쁜 일상이 계속되었다.
업무를 대충 마치면 전화국앞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쓰디쓴 커피 한 잔 마시며 대우현장에 자재를 운반하는 트럭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그 차를 얻어타고 현장 캠프로 돌아가는데 너무 힘들었지만 그 때는 젊은 나이니까 잘 견디었던것 같다.
일단 구급약품만 얻어서 컨테이너 숙소 구석에 풀어놓고 혹 작업하다가 다치는 근로자가 있으면 일차 처치를 하고 좀 심한 상태이면 현지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출장 외진(外診)형태의 시스템을 유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속건물이 완성되었다. 숙소는 물론, 사무실, 식당, 창고, 정비소, 공무, 중기사무소, 연구실, 그리고 내 손으로 의무실 내부 시설도 만들었다.
어느정도 체계가 잡히니까 앰블런스도 지원받아 환자 이송이나 대민업무도 한층 편하게 수행하게 되었다. 매 순간마다 사고 발생의 위험이 잠재하기에 정신교육과 산업재해 예방교육이 필수였고 그런 업무가 내 몫이었다.
이 현장은 약 3년의 공사기간이 소요되는 프로젝트였는데 공사가 피크로 진행될때에는근로자의 수가 내외국인 합쳐서 1,000명 정도 되었으니 일도 많고 탈도 많고 환자도 많았으며 속칭 나이롱환자는 더 많았다.
그래도 작업현장에서 다치는 경우도 자주 있고 환경적요인인 열질환 환자도 거의 매일 발생하였다. 공상환자는 반드시 지방 노동청 분소에 보고하여야 현지병원 입원 및 치료가 가능하기에 번거러웠지만 그게 내 업무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현지병원의 행정업무는 리비아 현지공무원이 맡고 의료진은 인도. 파키스탄, 이집트, 수단인들이 많았다. 그리고 북한 간호인력도 있다고 들었는데 직접 조우한 적은 없다.
나는 여기서 만 2년을 근무하고 잠시 귀국하였다가 벵가지에 있는 가리우니스 이공대학 의무실에서 1년 더 일 했다.
사막 현장 2년의 기간 중... 사망사고가 2건 발생하여 가슴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근로자간의 폭력이 사망으로 이어져 소생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결국 가해자는 현지경찰에 체포되고 지방검찰에서 조사받고 더 남쪽에 있는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그 사건의 통역을 내가 맡아서 했지만 형량에 큰 도움은 못 주고,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국내로 송환되어 과실치사죄로 복역하다가 출소했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은 아스콘 운반트럭 기사였는데 돈 욕심에 하룻만에 마무리짓는 통상 야리끼리..라고 하는 무리한 수송업무를 수행하다가 전복사고로 현장에서 사망한 사고였다.
사망자의 국내 이송을 위한 제반 서류 등 행정업무를 현지 유관기관에서 마치고 고인의 시신을 냉동차에 싣고 Tripoli 종합병원 영안실로 가서 안치하고 나면 고인들의 귀국행 비행기 탑승 등 나머지 업무는 Tripoli 건설본부에서 처리해 주기에 다시 사막 현장으로 돌아오면 심신이 녹초가 되지만 사막 한 복판에 감춰 놓은 야자대추를 발효시킨 막걸리 한 잔이 피로를 씻어 주고는했다.
처음 리비아에 갔을때 궁굼한것중 하나는 인구가 200만명 정도밖에 안 되는 나라이지만 석유덕분에 부국이 되었다고는 하는데 사람들 차림새나 품성이 결코 잘 사는 나라의 국민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매 가구마다 회색 반트럭(픽업트럭)이 한 대씩 있었는데 왜 한결같이 회색일까 하고 호기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독재자의 전철이 되어버린 당시의 국가지도자 가다피 대령이 전 국민에게 하사한 선물이라는걸 알고 한 참 웃었다.
그 당시 리비아를 중동 아프리카 국가 중 사회주의 체재의 성공 모델이라고 하였으나 군인과 경찰이 지배하는 전형적인 공포 분위기였다. 북한과 먼저 수교하였고 북한은 군사고문단을 위시해서 많은 근로자와 기술인력이 파견되어 외화벌이를 하였다. 리비아 자국민의 인적 두뇌자원이 빈약하다보니 공무원 외에는 모두 외국인의 손을 빌려야 사회가 유지되는듯 보였다. 세금도 없고 교육, 의료 등 모든 복지가 무료이니 국민들의 근로의식이나 서비스정신이 형편없었다.
35년도 넘은 기억인데.. 지금 그들의 삶은 과연 어떠한가......독재자의 종말은 리비아인은 물론 지구상 독재자로 군림하는 지도자들에게 어떤 교훈을 남겼을까?
그래도 우리는 그네들 덕분에 우리나라가 힘든 시절에 작으나마 애국(?)의 밑거름이 되어 경제적 성취를 얼마만큼은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Memories of Libyan Desert Photo Note
2018-11-29 Everg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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