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複雜單純

6·25전쟁 불패 신화 강뉴 부대

marineset 2023. 6. 9. 04:01
[기고] 6·25전쟁 불패 신화 강뉴 부대
2015. 04. 09 15:14 입력 | 2015. 04. 10 09:44 수정 

김 남 금 중령 합동군사대학교 교관

에티오피아 강뉴 부대는 6·25전쟁에 참전해 253전 전승과 함께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었던 전설의 부대다. 이들은 어떻게 불패의 신화를 남겼을까?

 파병 장병들은 모두가 자원자로 구성된 황실의 근위대원들이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이들에게 ‘강뉴’라는 부대 명칭을 부여했다. 강뉴는 에티오피아어로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와 ‘격파’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산 집단의 침략을 격파하고 혼돈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원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담겨 있었다.

 에티오피아는 1951년 4월 1진을 시작으로 1956년 4월 군사고문단까지 총 6037명을 파병했다. 이들은 미 7사단 32연대에 배속돼 화천·금화·양구·철원 등 최전방에서 적과 싸웠다. 이 중 124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다.

 강뉴 부대는 적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정찰간 적과의 교전을 비롯해 고지탈환과 사수, 진지방어 등 253번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특히 1952년 10월, 금화지구 ‘철의 삼각지’를 사수한 것은 이들의 용맹성을 잘 보여준다. 강뉴 부대는 철의 삼각지로 오르는 주 저지선 계곡에 1개 중대를 배치했다.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의 공격은 집요했다. 하지만 강뉴 부대는 4시간 동안의 백병전을 벌여 적들을 패퇴시켰다. 중공군은 수백 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결국 에티오피아의 방어선을 뚫는 것을 포기했다.

 강뉴 부대원들은 부대가 위험에 처하면 장교와 부사관들이 가장 먼저 적진으로 돌진해 포위망을 뚫었다. 전투 중 부상자와 사망자를 전장에 남겨두지 않았고, 포로가 발생하면 끝까지 추적해 구출했다. 파병 장병들에게 내린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명령 “버아셔너프 터멀리셔”(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러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를, 이들은 절대 충성으로 결행했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의 침공으로 5년간 식민지배를 받았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망명으로 떠돌며 국제연합에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간절히 호소했다. 그러나 국제연합은 이를 외면했다. 에티오피아의 6·25전쟁 참전은 뼈아픈 역사를 통해 자유 수호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는 역사적으로 우리와 공통점이 많다. 30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서 900여 회의 외침을 받았으나 한 번도 이민족을 침략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고유문자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1974년부터 1991년까지 공산화되면서 사회 인프라가 무너지고 경제가 낙후되면서 지금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강뉴 부대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참전용사들은 300여 명만이 생존해 있다. 그러나 이들이 보여준 진정한 용기와 충성심, 빛나는 희생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에서 산화한 300 스파르타 영웅들의 기념탑에 새겨진 시모니데스의 글귀처럼 말이다. “이곳을 지나가는 행인이여, 내 조국에 들르거든 내 말 전해주시오! 우리는 조국이 우리에게 내린 명령을 다 이행하고 여기 기꺼이 묻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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