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korailhs

대한민국의 철도

marineset 2023. 6. 1. 06:56


대한민국의 철도는 대한제국 시절, 1899년에 개통된 경인선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요 간선 노선은 이후에 일본을 중심으로 한 열강의 침탈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6년간 일본에 점령당하며 군사·정치적 목적에 의해 생겨났다. 주권을 찾은 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세웠지만 극빈한 후진국이어서, 유엔·미국 등에서 차관을 들여와 일부 간선을 건설하고 철도 차량을 수입했다.

1960~70년대 산업화 시대까지만 해도 철도는 자동차·항공운송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여객·화물수송에서의 지위는 확고했지만, 1980년대 들어 시설의 노후화나 서비스의 부재 등으로 심각한 재정 악화와 서비스의 퇴보를 보였다. 그래서 지속적인 노후 시설 대체와 서비스 개선 등으로 모습을 일신하고 있고, 도로수송의 적체나 항공수송의 고운임에 비해 저운임·신속·대량수송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도시철도를 제외한 일반철도는 2005년까지 철도청을 통한 국영 체제였고, 2005년부터 지금까지는 한국철도공사에 의한 공영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적자가 쌓여갔지만 국가에서 보조금을 지급하므로 다소 방만한 경영을 계속했는데(2014년 흑자 달성), 일부에서 이를 개혁하자는 주장이 나타나 같은 해 12월에 수서고속선을 한국철도공사의 자회사가 운영하는 소위 "경쟁 체제"가 도입되었다. 경쟁 체제 찬성론자는 이것이 경영합리화 작업의 일종이며 차후 서비스의 질이 높아져 이용하기에 편해질 것이라 보지만, 하지만 반대론자는 국가의 기간망인 철도를 여러 기업에서 운영한다면 시설물 구입이나 직원 채용 등에서 예산을 추가로 사용하게 되므로 되려 낭비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1899년에 현재의 서울 지역에서 개통한 서울전차를 시작으로, 대한민국의 대도시들에는 도시철도라고 불리는 자체적인 철도 교통망을 갖추게 되었다. 1974년에는 서울특별시에, 1985년에는 부산광역시에, 1997년에는 대구광역시에, 1999년에는 인천광역시에, 2004년에는 광주광역시에, 2006년에는 대전광역시에 개통되었다. 2014년 1월 현재 수도권 전철은 19개의 노선이(인천 포함), 부산 도시철도는 5개의 노선이, 대구 도시철도는 2개의 노선이, 광주·대전 도시철도는 1개의 노선이 운행 중인데, 도시의 수송력을 분담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역사

개화기

1889년 주미대리공사인 이하영이 서양의 철도 모형을 가지고 귀국하며 철도 부설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이에 철도의 효용성을 느낀 고종은 철도의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이때 정부는 사설 회사에 운영권을 주는 방식으로 건설하고자 하였다. 1896년 미국인 모스가 경인선의 부설을 추진했으나, 일본이 1899년에 이를 인수하여 같은 해 9월 18일에 경인철도주식회사에서 운영하는 노량진 - 인천 구간을 개통했다. 바로 이 경인선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철도이다. 이후 일본 외의 외세 또는 한국인을 시켜 철도를 건설하고자 했으나, 대부분 일본이 인수해 개통했다.

1898년에는 미국이 추진했던 경부선의 부설권 또한 일제가 인수하여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세우고, 1901년 미국의 건설 장비를 사들여 착공했다. 1903년에 경부철도주식회사에 기존의 경인철도주식회사를 합병한 뒤, 1905년 1월에 개통하였다. 삼랑진-마산 구간인 마산선은 박기종의 영남지선철도회사에서 부설권을 얻었다가 일제가 경부철도주식회사로 매수해, 1905년에 군용철도로 개통하였다. 경의선은 프랑스 회사가 부설권을 얻었다가 한국인에게 넘어갔다가 일본이 러일 전쟁 때 부설하여 1906년에 완공하였다. 한편 1899년에 일종의 도시철도로서 서울전차가 개통하였는데, 이는 1909년에 일본에 매각되었다.

1910년~1924년

1910년 8월 29일에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일본에 편입되며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고, 일제는 한반도를 X자로 종단하는 간선 철도를 계획하였다. 호남선은 서울-목포 간 경목선으로 계획되어 프랑스가 운영권을 요구하다가 한국인이 설치한 회사에 권리를 주었으나, 일본의 압력으로 취소되어 1911년에 최초로 착공해 1914년에 완전 개통했다. [1] 경원선은 서울-원산-경흥(웅기)의 선로를 건설하는 것으로 계획하여 한국인 박기종이 부설권을 획득하여 착공했다가 자금이 없어 포기했고,[2] 일본이 부설권을 획득하여 1910년에 착공해 1914년에 완전 개통했다. 앞서 건설된 경부선과 경의선에 더하여 호남선과 경원선이 완공됨으로써 주요 간선이 완성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물자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추가로 철도 노선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위 4개의 노선을 짓느라 재정적 여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에 민간 자본이 사철을 건설한 뒤 이를 매수해 국유화하는 방법을 이용하려고 했다. 총독부는 1912년에 '조선경편철도령'을 발표하여 경편 철도의 건설을 명문화하였으며, 2년 뒤 사철 업체에 대한 보조금을 마련하되 총독부에서 사전 답사를 통해 지정한 '예정노선' 대로 건설한 경우에 우선적으로 지급하였는데, 최초에 해당 회사의 주가총액의 6%까지였던 보조율은 1918년과 그 이듬해에 각 7%·8%로 인상되었다.[3] 1920년에는 조선경편철도령이 조선사설철도령으로 개편되었으며, 이듬해 조선사설철도보조법의 등장으로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명문화되었다.[4] 전북철도가 1914년에 이리-전주 간 협궤 전북선을, 개천철도가 1916년에 신안주-개천 간 협궤 개천선을, 도문철도가 1916년부터 1924년까지 청진-동관진 간 도문서부선을, 조선중앙철도가 1921년에 대구-포항·경주-울산 간 협궤 경동선(慶東線)과 1921년에 조치원-청주 간 충북선을, 남조선철도가 1922년과 1925년까지 각각 전남선과 경남선을, 서선식산철도가 황해선을, 조선산업철도가 1924년부터 1931년까지 김천-경북안동 간 경북선을, 금강산전기철도가 1923년부터 1931년까지 철원-내금강 간 금강산선을 건설하였다.

1910년부터 한반도의 국유 철도를 운영하던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1917년에 폐지되고, 국유 철도 운영이 남만주철도에 위탁되었다. 1923년에는 조선중앙철도·남조선철도·서선식산철도·조선삼림철도·조선산업철도·양강척림철도의 6개 회사가 합병해 조선철도로 발족하였다.

1925년~1944년

1925년에 남만주철도의 위탁 경영이 해제되었다. 1927년에 12년 동안 3억 2천만 엔을 들여 한반도 전체에 국유 철도망을 건설할 목적으로 '조선 철도 12년 계획'이 입안되는데, 이에 따라 총독부는 필요한 노선을 건설하고 이미 사철 회사가 운영중인 노선은 매수하여 국유화하기로 하였다.[5] 이때 조선철도의 경동선(慶東線)·경남선·전남선, 전북철도의 전북선, 개천철도의 개천선, 도문철도의 도문선이 매수되었다[6].

위의 계획에 따라 1935년에 동해남부선을, 1936년부터 1942년까지 경경선을 건설하였다. 1944년에 경부선이 원활한 물자 수송을 위해 복선화되었는데, 해방 전까지 이를 제외한 철도는 모두 단선이었다.

한편, 일본의 자본이 유입되며 사철은 지속적으로 건설되었다. 조선삼림철도가 함북선을, 조선경남철도가 1927년과 1931년까지 각각 경기선과 충남선을, 조선경동철도가 1930년과 1937년까지 각각 수려선과 수인선을, 남조선철도가 광려선을[7], 신흥철도가 신흥선을, 단풍철도가 1939년에 단풍선을, 평북철도가 1939년에 평북선을, 다사도철도가 1939년에 다사도선을, 조선평안철도가 1938년에 평안선을, 경춘철도가 1939년에 경춘선을, 북선척식철도가 표준궤로 개궤된 함북선을 건설하였다. 이중 수려·수인선은 1942년에 조선철도에 양도되어 경동선(京東線)으로 통합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군수 물자 조달을 위해 일부 철도를 철 조달을 위해 철거했다. 이때 금강산선, 안성선 안성-장호원, 경북선 예천-안동 등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노선은 공사를 계속 진행하였지만, 일제의 패망으로 당시 건설하던 동해중부선이나 영동선의 영주-철암 구간 등은 공사가 중단되었다.

1945년~1959년

1945년 해방 이후, 38선 이북 소군정 지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의 철도는 해당 문서를 참조하라.
1945년 8·15 해방 이후 철도가 남북으로 분할되어, 8월 24~26일 즈음에 남북간의 철도 연결 운행이 북측(당시는 소군정)에 의해 중단되었다.[8] 당시에 분단된 노선으로는 경의선, 경원선, 토해선[9]이 있다. 1946년에는 미군정이 정한 법률에 의해 사철인 충북·경춘·안성·장항·수려·수인선이 국유화되었다.

해방 이후 석탄을 철도로 운송하여 자급자족할 목적으로 각 지역의 탄광과 연결되는 삼척탄광선, 영월탄광선, 단양탄광선을 건설하고자 하였다.[10] 세 노선은 각각 영암선·영월선·단양선으로 명칭이 바뀌어 착공하였고, 모두 공사는 진행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어 영주-철암 구간의 영암선과 제천-영월 구간의 영월선은 1955년에야 개통되었다. 또한 영월-함백 구간의 함백선을 1957년에 개통해 영월선을 통합시켰다. 이후 철도의 미싱 링크를 연결하는 공사를 착수하여 1958년에 충북선의 충주-봉양 구간을 개통했다.

한국 전쟁의 결과 한반도의 군사분계선을 관통하는 철도 구간이 파괴되었다. 경의선과 경원선은 군사분계선 전후의 선로 자체가 끊기게 되었고, 동해북부선과 금강산선은 운행이 영구히 중지되었다.

1960~70년대

1961년에 능곡-가능 간 능의선이 개통되었다. 1963년 5월에는 영암선·철암선·삼척선·동해북부선이 영동선으로 통합되었고, 통리-심포리 간의 인클라인이 폐지되고 우회 선로가 개설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능의선 가능-의정부 간이 연장되었다. 1966년 1월에는 예미-고한 간 정선선이 개통되었고, 점촌-예천 간 경북선이 복구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경북선의 예천-영주 구간이 개통되며 경북선이 완공되었다. 1967년에는 태백선 증산-정선 구간이 개통되었다. 1968년에는 경전선 진주-순천 구간이 개통되며 경전선이 완공되었다. 1969년에는 문경선 진남-문경 구간이 개통되었다. 1975년에는 태백선의 고한-백산 구간과 영동선의 철암-북평 구간이 개통되며, 산업선 전기철도가 완성되었다.

철도의 전철화 사업도 활발히 추진되었다. 1972년 3월에 전기 기관차가 최초로 도입되었는데, 이때 8000호대 전기 기관차의 초기 도입분 66량이 운행을 개시하였다. 1973년에 중앙선의 청량리-제천 구간이, 1974년에는 경부선의 서울-수원·경원선의 용산-성북·경인선 전 구간이 전철화되었다. 한편, 기관차의 디젤화가 진행되어 1967년에 증기 기관차가 일반 영업 운행을 종료하였다. 증기 기관차는 1980년대 이후 일부 차량이 관광열차로 운행하다가 중단되었으며, 1990년대에 901호 증기 기관차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해 교외선에서 관광 목적으로 운용하였으나 이 또한 현재 운행하지 않는다.

열차의 운행 속도는 계속 빨라졌다. 1960년부터 서울-부산 간 무궁화호가 운행되었다. 1962년부터는 재건호가 서울-부산 간을 6시간 10분에 주파하였고, 1966년에는 같은 구간에 맹호호가 운행하였다. 1969년에는 새마을호의 전신인 관광호가 운행되기에 이른다. 이 외에도 1963년에 등장한 서울-여수 간 풍년호, 1966년에 등장한 서울-대전 간 청룡호, 1967년에 등장한 서울-부산진 간 비둘기호 등이 있었다. 1974년에는 상록·비둘기·통일·은하호가 통일호로, 태극·백마호가 풍년호로 통합되는 등 특급 등급 열차명이 다수 변경되었다.

1968년에 육상 교통에 대한 투자를 철도의 증설에서 도로망 건설로 전환하였다.[11] 이 시기 이후로 2004년에 경부고속선이 개통되기 전까지 신규로 건설된 간선·지선 철도가 없었으며, 1972년에 수려선이 영동고속국도로 기능이 대체되며 폐선된 것이 그 증거이다. 한편, 1974년에는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어 도시 철도가 등장하였다.

1980~90년대

1980년에는 김포선과 경춘선의 성동-성북 구간이 폐지되는 한편으로, 충북선 전 구간이 복선화되었다. 경부선과 함께 간선의 축을 이루는 호남선은 점차 복선화되었는데, 1985년에는 익산-정주 구간에서, 1987년에는 정주-장성 구간에서, 1988년에는 장성-송정리 구간에서 이루어졌다. 1986년에는 경원선의 성북-의정부 구간이 복선 전철화되었고, 1991년에는 경부선의 영등포-구로 구간이 3복선화 되었다. 1995년에는 수인선이 폐지되면서, 협궤 철도가 사라졌다.

서울-부산 간에 물자와 수송이 집중되어서, 기존의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국도만으로는 모두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경부선을 2복선화하거나 경부고속국도의 차선을 대폭 확장하는 방안을 고려하다가, 경부고속선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1992년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새로운 동차 형태의 차량이 등장하였다. 1980년에는 새마을호 등급의 우등형 디젤 동차가, 1985년에는 무궁화호 디젤 동차가, 1996년에는 통근형 디젤 동차가 도입되었다. 특히 1987년에 도입된 새마을호 디젤 동차는 새마을호의 고급화를 이끌었다. 대체로 디젤 동차가 도입되었으나, 예외적으로 1980년에 우등형 전기 동차가 우등 등급으로 운행을 개시하였다.

도시 철도 또한 지속적으로 길이가 늘어났다. 서울에서는 1980~1984년에 2호선 본선과 성수지선이, 1985년에 3호선과 4호선이 건설되며, 1기 지하철 건설이 일단락되었다. 이후 서울시내의 교통 수요가 급증해 2기 지하철이 계획되었다. 계획에 따라 1995~96년에 5호선이, 1997년에 7호선 장암-건대입구 구간이, 1997~1999년에 8호선이, 1993년에 3호선 양재-수서 연장 구간이, 1992~96년에 2호선 신정지선이 건설되었다. 광역 전철로는 1988년에는 1호선과 직결되는 안산선 금정-원곡 구간이[12], 1994년에는 4호선과 직결되는 과천선 선바위-금정 구간이, 1996년에는 3호선과 직결되는 일산선 지축-대화 구간이 개통되었다. 부산에서는 1985년부터 1994년까지 순차적으로 1호선이 개통되었고, 1999년에는 2호선 호포-서면 구간이 개통되었다. 또한 대구에서는 1997년부터
1998년까지 1호선 진천-안심 구간이 개통되었다.

2000년대~현재

경부선의 과다한 여객 수요를 분산시키기 위해 2004년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었고, 2015년 호남고속철도가 개통되었다. 또한 2007년에는 사설 철도인 인천공항철도가 개통되었다. 남북철도 연결사업을 통해, 남북간 단절된 경의선과 동해북부선의 일부 구간을 개통했다. 1996년 1월 1일부로 운행이 중지되지 되었던 수인선은 2004년 12월 28일부터 표준궤 복선 전철화 사업이 시작되어 2012년 6월 30일 시흥시 오이도역과 인천광역시 연수구 송도역 사이의 구간이 재개통되었다.

여객 운송

간선 노선

지하철 및 광역전철을 제외한 대부분의 철도는 한국철도공사가 운행한다. 이 철도는 전국 각지를 연결하고 있다. 한편 1967년에는 일반 여객용 증기기관차가, 1995년에는 협궤 철도가 사라졌고, 경부선과 호남선의 과다한 여객 수요를 분산시키기 위해 2004년·2015년에 경부고속철도와 호남고속철도가 각각 개통되었다. 또한 2007년에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여객 영업을 하는 사설 철도인 인천공항철도
가 개통되었는데, 이 노선을 운영하는 회사는 한국철도공사의 자회사로 편입되었다가 다시 사유화되었다. 한편 간선 철도망과 간선 고속도로망의 길이는 약 3000km로 거의 같은데, 이는 다른 세계 주요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철도 인프라 과소 현상이라는 지적이 철도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13]

도시철도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의 지하철입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은 서울 지하철 1호선(서울역 ~ 청량리)이다. 1971년 4월 12일 착공하여 1974년 8월 15일 개통하였는데, 이는 세계에서 22번째로 지어진 지하철 노선이다.[14] 이 구간은 도로를 뜯은 후에 지하 구조물을 만든 후 다시 메우는 방식인 개착식 공법으로 만들어졌는데, 지금은 도로사정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서울역 ~ 청량리 구간과 함께 서울역 ~ 인천 간의 경인선, 구로 ~ 수원 간의 경부선 구간을 직결 개통하였으며 이들 구간은 기존의 선로를 복선 전철화하여 운용하였다.

서울특별시의 경우, 1970~80년대에 개통된 지하철을 1기 지하철, 1990년대~2000년대 초반에 개통된 지하철을 2기 지하철, 2000년대 후반부터 개통된 지하철을 3기 지하철이라고 부른다. 현재 수도권 지역에는 1·2·3·4·5·6·7·8·9호선·분당선·경의중앙선·경춘선·공항철도·신분당선·인천 1호선·의정부 경전철·용인 경전철이 운영되고 있다. 1기 지하철은 서울메트로에서, 2기 지하철은 서울도시철도공사에서, 9호선은 서울시메트로9호선에서, 분당선·중앙선·경의선·경춘선·1호선 일부·일산선·과천선·안산선은 한국철도공사에서, 공항철도는 코레일공항철도에서, 신분당선은 신분당선주식회사에서, 인천 1호선은 인천교통공사에서 운영한다. 한편, 인천광역시의 지하철은 수도권 전철과 연계된 동일한 요금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수도권 전철의 일부로 보지만, 수도권 전철과 별도의 지하철로 보는 시각도 있다.

1980년대에 부산광역시에서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이 개통된 것을 시작으로, 지방의 각 광역시에서 도시철도가 점차 영업을 개시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부산에는 1·2·3·4호선·부산김해경전철이, 대구에는 1·2·3호선이, 대전과 광주에는 각각 1호선이 운영되고 있다. 각 노선은 도시에서 세운 공기업이 운영하고 있으며, 예외적으로 부산과 김해시를 오가는 부산김해경전철은 민간 기업이 운영한다.

도시 철도 노선은 현재에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새로이 건설되는 노선을 경량 전철로 지을 계획이며, 경기도에서는 노면 전차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화물

오래됨오래됨 화물열차로는 시멘트나 컨테이너 등을 수송하며, 때로 공화차라 불리는 회송되는 빈 화차도 운행한다. 한편 우편물이나 곡물 등을 수송하는 화물열차는 분류상 여객열차의 범주에 들어간다.

2001년 기준으로 각 운송 수단별 화물 운송 분담률은 도로가 74.2%, 해운이 19.5%, 철도가 6.3%, 항공이 0.1%이다. 다만 자가용 화물차를 포함할 경우 도로는 83.1%, 해운은 12.8%, 철도는 4.1%, 항공은 0.03%를 차지하게 된다.

관광

대한민국에서는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철도를 이용한 관광 문화는 그닥 발달하지는 않은 편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일부 관광열차가 운행하였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해 운행이 중단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 다양한 관광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강릉-삼척 구간을 운행하는 바다열차가 등장했는데, 코레일관광개발에서 개발해 CDC를 개조한 열차로 1시간 20분간 58km를 달리는
상품이다.[15]

2008년에 레일크루즈 해랑이라는 고급 관광열차가 개발되었다. 이는 남아공의 블루트레인을 벤치마킹한 여행 상품이며, 철저히 고급화해 1인당 요금은 100만원 전후 수준이다.

2013년에 '대한민국 5대 관광벨트'가 선정되었는데, 중부내륙벨트·동남블루벨트·남도해양벨트·서해골드벨트·평화생명벨트가 바로 그것이다.[16] 2013년 4월에는 중부내륙벨트를 달리는 O-train과 V-train이, 같은 해 9월에는 남도해양벨트를 달리는 S-train이 운행하기 시작했다. 2014년 5월에는 평화생명벨트에 DMZ-train이, 2015년 2월에는 서해골드벨트에 G-train이 영업을 개시하였다. 동남블루벨트는 남도해양벨트에 통합되었고, 중부내륙벨트에서 분리된 강원청정벨트에 2015년 1월부터 A-train이 운행하고 있다.[17]

운영

1894년 7월 갑오경장 관제공포 이후 조선 정부는, 내각 아래 공무아문에 철도국을 설치하였다. 철도국에는 참의 1명과 주사 2명이 임명되어 공식적으로 철도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어서 7월 6일 농상공부 직제를 개편하여 철도국을 농상공부에 이관하고, 철도사(司)를 설치하여 감독 1명과 사장 1명, 기사 2명, 주사 2명, 기수 5명 등 11명을 두었다. 아울러 7월 21일에는 다시 농상공부의 직제를 개편하고 철도사를 철도국으로 개칭함과 동시에, 세칙은 농상공부대신이 부령으로 정하도록 하였다. 조선 정부는 국유철도를 직접 설치하지 않고, 부설권을 민간에게 부여한 뒤에 관리 감독하는 정부 기관으로 철도국을 설립했는데, 이는 영국과 미국의 초기 철도와도 유사한 방식이다.

1917년 7월 31일, 국유철도의 운영이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위탁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폐지되었고, 서울에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이 설치되었다. 1925년 4월 1일에 다시 조선 총독부 직영 체제로 전환되었다.

철도청은 2004년 1월 1일자로 시설 보유와 건설 부문이 한국철도시설공단으로 분할되었다. 또한 2005년 1월 1일부터 철도 영업 부문이 한국철도공사(韓國鐵道公社)로 분할되어 출범하였으며[18], 2007년 5월부터 커뮤니케이션 명칭을 코레일(영어: Korail)로 일원화했다. 한국철도공사는 대한민국의 국유 철도 영업과 관련 사무를 담당하는 유일한 공기업이다. 2009년 9월에 본사를 정부대전청사에서 대전역 광장의 신 사옥으로 이전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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