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은 철도인의 전통
조선시대에 교통수단이 병조(병조)의 관장하에 있었던 것을 보아도 교통과 전쟁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연기와 불꽃으로 적의 침략 위기를 중앙정부에 알리는 봉화와 공무로 급히 가는 사람이 타는 말인 파발마(파발마)를 관리했던 부서를 “역”이라 했다.
우리나라에 철도가 부설된 것도 일본이 한반도를 대륙침략의 교두보로서 군수품의 수송을 위한 목적이었고, 50년 한국전쟁시 적군은 군수품 보급의 차단을 위해 철도를 주요 공격목표로 삼았다.
이와같이 철도와 전쟁의 관계로 인해 한국전쟁에 얽힌 철도인의 애환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적진에 고립된 미 24사단장 ‘윌리암 F 딘’소장을 구출하기 위해 미군 특공대원 30명을 싣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다 장열한 최후를 마친 고 김재현 기관사의 무용담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마트면 숨겨질뻔한 이야기로서 동족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북한의 탄약과 병기를 적재한 열차를 고의로 충돌시켜 수송을 저지한 공산치하의 이동진(73) 기관사의 용감한 이야기도 있다. 북한군은 탄약과 병기를 수송하는 열차를 연합군의 포격을 피해 야간에만 운행하고 주간에는 터널속에 대피시켜 두었다. 탄약수송의 임무를 받은 이동진 기관사는 열차출발전에 운반장교의 눈을 피해 열차밑으로 들어가 열차를 정지시키는 제동코크를 잠궈서 열차가 오관터널(전라선 서도역과 남원역 사이)안에서 충돌케하여 많은 탄약과 병기를 파괴해 버린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 철도는 군인, 전쟁물자 수송 등 직간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153명의 철도직원이 산화하였다. 지금도 휴전선 주변에 위치한 월정리역 옛터에는 전쟁시 파괴된 기관차 한 대가 온몸에 탄흔을 남긴 채 그날의 참상을 말해준다.
용산 전쟁기념관과 부곡 철도박물관에는 한국전쟁때 철도직원들의 활동과 유품이 전시되어 그들의 애국적인 삶을 되돌아 보게 하고 있다. 열악한 근무여건속에서도 국가의 위난시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희생정신과 철저한 사명감은 오늘날에도 철도인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꿋꿋이 지켜나갈 것이다.
배 임 규/철도청 홍보팀장
발행일 : 2001-06-25 [중부]/조선일보
미카3-129 증기기관차
한국전쟁 당시 미 제24사단장 딘소장을 구출하기 위해 적진을 뚫고 들어갔던 기관차. 김재현 기관사와 미특공대 33명이 모두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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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증기기관차는 1889년 주미대리공사 이하영이 철도모형을 궁중에서 관람시켰으며, 1899년 서울∼인천(경인선) 개통 때 미국 브룩스에서 제작한 모걸(Mogull)형 탱크기관차가 등장한 것이 최초이다.
그후 1905년 푸러형 탱크기관차·터우형 텐더기관차를 미국에서 수입하였고, 1911년에는 아메리칸형 텐더기관차를, 1914년에는 과열증기기관차를 도입하였다. 1919년에는 미카형, 1921년과 1923년에는 파시형을 미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였고, 1915년부터 1919년 사이에는 바티형과 터우형을 남만주철도(南滿洲鐵道)의 사허공장[沙河工場]에서 제작한 것을 사용하였다.
국내에서는 1927년 경성공장(현 서울공작창)에서 처음으로 터우형 2량을 제작하였고, 그후 8·15광복 전까지 파시형·미카형 기관차를 소량 만들어 왔다. 광복 후에는 증기기관차를 제작하지 않았으며 디젤기관차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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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내가 겪은 6·25 - 잊을 수 없는 푸른 눈의 젊은이들
작성자 : 류기남 대한참전단체연합회장
얼마 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7명의 미국인 노병들이 경기도 평택 해군 제2함대 사령부 내 충무동산에 있는 서해교전 전적비를 찾아 전사자들의 넋을 위로했다는 보도를 접한 바 있다. 이들 미국인 참전노병들은 미국 ‘센트럴 매사추세츠 한국전 참전기념탑 건립위원회(Korean War Memorial Committee of Central Massachusetts)’ 회원들로 지난해 11월 매사추세츠주에 191명 전사자가 새겨진 참전기념탑 건립을 주도했던 사람들이라 한다. 이들은 서해교전 전사자들에 대해 “한국인들의 영웅은 곧 미국인들의 영웅이기도 하다”며 “보다 많은 이들에게 영웅들의 존재를 알릴 것”이라고 기념비 동판에 새겨진 한국 장병들의 얼굴을 한장 한장 정성스레 사진을 찍었다고 한
다. 이를 지켜보던 한 유가족은 눈물을 흘리며 “멀리 외국에서 아들들을 찾아와주니 고마워서 할 말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다 잊어가고 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우리사회에선 벌써 서해교전조차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러니 6·25야 더 말해 무엇 하랴. 6·25는 이미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잊혀진 전쟁이 된 지 오래다. 우리와는 달리 미국인들은 자유를 지켜낸 전쟁으로 6·25 한국전쟁을 지금도 잊지 않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미국 하원이 행정부에 대해 한국전 50주년을 기념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이나, 미 정부가 지난 95년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 공원에 한국전쟁 기념비를 세운 일 등은 우리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기념비에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다음과 같은 헌사(獻辭)가 새겨 있다.
“자유는 값있는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것 / 전사 미군 54,246명 (1950∼53년)/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 한번 만나본 일도 없는 사람들을 / 지켜주기 위해 / 나라의 부름에 응한 / 이 나라의 아들과 딸들에게 / 영광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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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THE MEMORIAL
General Douglas MacArthur said,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When the last veteran of the Korean War fades into history, he can do so knowing that a memorial will remind future generations of his/her sacrifices in defense of South Korea. The statues depicting fighting men on patrol represent the army, navy, Marine Corps, and air force working together for a common goal - victory. A granite mural of over two thousand sandblasted photographs honors the supporting services who provided supply, medical, spiritual, and fire support to the frontline units. The United Nations Wall on the opposite side lists the countries that provided troops, medical support, or supplies to help South Korea. These were: Australia, Belgium, Canada, Columbia, Denmark, Ethiopia, France, Greece, India, Italy, Luxembourg, Netherlands, New Zealand, Norway, Philippines, Republic of Korea, South Africa, Sweden, Thailand, Turkey, United Kingdom,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ll these elements point toward the Pool of Remembrance where the sacrifice of 54,246 American lives can be contemplated. It is here where an inscription summarizes the true meaning of the memorial: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한국전쟁 기념비 홈페이지/사진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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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요즘 사람들 중 공산 침략자들로부터 자유를 지켜낸 전쟁이라는 한국전쟁의 참의미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참의미를 모르니 잊혀진 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6·25 참전자들에게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전쟁이 바로 6·25다. 특히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한번 만나본 일도 없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이역만리를 찾아온 미국인들에 대한 잊지 못할 기억을 갖고 있다. 한국전에서 장성으로 적에게 포로가 된 유일한 사람인 딘 소장과 그를 구출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푸른 눈의 군인들이 그들이다.
6·25 당시 나는 스물다섯의 나이로 대전지역 철도건설대장을 맡고 있었다. 대전은 물론 이리, 청주, 김천까지가 관할구역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대통령 긴급명령 제6호로 철도종사자들을 군사수송요원으로 징발토록 했다. 당시만 해도 철도는 병력과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다른 일반공무원들과는 달리 철도종사자들은 전원 참전해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 철도참전자들은 자신을 지킬 무기도 없었고, 접전지역까지 물자와 병력을 수송해야 했기 때문에 희생이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일한 수송수단인지라 적의 타격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로 인해 287명이 순국했다.
전쟁이 터지고 유엔군이 대전에 입성한 것은 50년 7월2일이다. 당시 유엔군의 군수물자가 부산으로부터 수송되어 온 것을 하역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유엔군은 대전을 넘어 조치원까지 진출했지만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침략자들에 밀려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미 대전으로 내려와 있던 정부는 7월16일 김천으로 다시 피난했다. 원래 계획은 정부의 2차 피난지는 전주였으며, 이날 아침 6시 전주로 간다는 것이었는데, 새벽 5시쯤 연락이 오기를 김천을 거쳐 대구로 간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먼저 떠나고 군은 7월19일 후퇴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에 따라 최후의 열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총알이 뚫을 수 없는 철판으로 된 화물칸에 지휘본부를 마련하는가 하면 딘 소장의 승용차를 실을 준비까지 해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딘 소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 딘 소장은 충남도청 청사를 사령부로 쓰고 있었는데, 대전역과 도청 사이 있는 목척교에까지 적의 탱크가 나타나고 있는데도 사령관의 차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는 적의 탱크가 눈앞에 나타난 상황에서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어 딘 소장을 포기한 채 출발해야만 했다. 딘 소장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마지막 열차마저 적의 수중에 놓일 것이었다.
딘 소장을 포기하고 출발했지만 마지막 열차도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대전역을 출발하여 외곽지역인 판암동 세천터널로 진입하려는 순간 철길 양 쪽 포도밭에 매복해 있던 적으로부터 총알세례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미군과 우리 철도참전자들 여럿이 적탄에 쓰러졌다. 열차는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달렸다. 터널을 지났어도 안심이 안되었다. 대전역 이남 외곽지역까지 적이 출몰한다면 적군이 어디까지 내려왔는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오후 4시 경 옥천역에 진입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안도의 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런데 옥천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미군 장교가 “왜 사령관은 오지 않았느냐”며 사령관을 구하러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시 사령관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특공대가 구성되었다. 이에 따라 철도참전자 중 누군가가 20명의 특공대를 태우고 사지(死地)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기관사 김재현, 조수 황남호, 조수 현재영, 신호수 장시경 등 네 명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특공대를 태운 기관차가 특공대원 20명을 석탄차에 태우고 옥천역을 출발했다. 24명의 운명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기관차가 적의 사격을 무릅쓰고 대전역 구내로 진입한 것은 오후 5시 경. 특공대원들은 적과 교전을 벌이며 대전역 일대를 뒤졌지만 딘 소장을 찾을 수는 없었다. 30여 분 간 사투 끝에 특공대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미 공산군으로 새까만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특공대장의 지시에 기관사 김재현은 기관차를 발차시키는 레버를 잡아당겼다. 그 순간 기관차를 포위하고 있던 적의 사격이 기관차에 집중되었다. 특공대가 응사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특공대 20명은 그 자리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기관사 김재현도 적탄에 즉사했다. 신호수 장시경은 머리에 관통상을 당했으나 다행히 탄환이 피부 가까이를 지나 살아나기는 했지만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 조수 황남호와 현재영은 팔에 관통상을 당했으나 다행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기관사 김재현이 발차를 시켜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기관차가 전속력으로 달려주었던 덕분이다. 이들은 아직 생존해 있다.
그런데 딘 소장은 어떻게 된 것일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딘 소장은 무슨 까닭인지 늦게 사령부를 나서는 바람에 적에게 퇴로를 막혀버리고 만 것이었다. 딘 소장은 하는 수 없이 금산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나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나는 당시 영동역에 있었는데 이들 특공대의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령관을 구하기 위해 이미 적진으로 돌진해 들어간 용사들이나, 나라의 부름으로 참전한 우리 철도참전자들이 감연(敢然)히 사지(死地)로 가는 길에 나선 것이나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유와 번영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피 흘려 우리를 도와준 동맹국 미국에 대한 악감정을 확산시키려는 세력이 활개를 쳐 반미기운이 높아가고 있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또 6·25 참전자들에 대한 국가나 사회 일반의 예우가 말이 아닌 현실도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더욱이 민주화에 기여한 사람들은 국가유공자로 예우함과 동시에 엄청난 보상까지 해주는 터이기도 한다. 민주화도 나라가 있고 난 연후의 일이다. 그런데도 나라를 위기에서 건진 6·25 참전자들은 국가유공자로 예우하지 않고 있다. 그럼 누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목숨을 걸고 싸우려 할 것인가. 이 나라가 또 다시 침략을 받는다면 딘 소장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든 특공대원들과 같은 젊은이들이 이 나라에서도 나올 수 있을까. 이런 현실에서 6·25를 맞자니 착잡하고도 분통터진다.
[http://www.konas.net]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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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동 국립묘지 장교묘역>
이곳에는 대령이하의 장교, 5급이상의 군무원 등 4,518위가 안장되어 있다. 6.25전쟁 이전인 1949. 9.26.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중 적탄에 전사한 육군중위 양백호(제6묘역)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6.25전쟁 전후와 월남전 (305위) 당시 순직한 분들이 모셔져 있다.
이곳 장교묘역에는 월남전의 영웅인 이인호 소령을 비롯하여 강재구 소령, 김경진 소령, 권영주 중위 등 군인정신의 귀감이 되는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이 묘역에는 월남전때 종군기자였던 백광남 기자와 6.25때 윌리엄 F. 딘 장군 구출작전에 참여했다 순직한 김재현 철도기관사도 안장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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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n's Route동영상
딘 장군 5.jpg
무주군청 신호상씨 “살신성인 기관사 추모비 옮겨주세요”
[동아일보 2002-06-24 18:09]
“살신성인의 기관사를 제대로 추모하자는 제안을 철도청이 수용하지않으니….”
전북 무주군청 신호상(申虎相·53) 정책관리실장은 6·25를 맞을 때마다 당국의 무관심 속에 잊혀지고 있는 용감했던 한 기관사를 떠올리며 안타까움에 젖는다.
주인공은 1950년 7월 20일 대전이 북한에 함락되면서 적진 속에 홀로 떨어진 당시 미 제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1899∼1981)의 구출작전에 나섰다 순국한 김재현(金裁鉉·당시 29세) 기관사.
그는 미군 특공대 32명을 열차에 태우고 적의 수중에 들어간 대전으로 돌진하는 작전에 자원했다 특공대원 모두와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정작 위험에 빠졌던 딘 소장은 36일간 적진인 대전과 무주 등지로 도피해 다니다 결국 생포돼 종전 후 포로교환으로 돌아왔다.
신 실장은 관내 6·25 기념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다 딘 소장의 일화를 알게 돼 ‘별은 잠들지 않는다’는 책을 발간했고 이 과정에서 김 기관사의 행적을 알게 됐다.
“김 기관사의 추모비도 방문했죠. 대전 동구 판암동 경부선 철로의 상하행선 사이에 있는데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워요. 비문 내용도 여기저기 틀렸고요. 다만 이 길을 지나는 기관사들만이 경적을 울려 선배의 영령을달래주고 있었지요.”
그는“대전역광장에‘대전 블루스’ 노래비도조성하는 마당에 추모비를사람 왕래가 많은 곳으로 옮겨야 한다”며 철도청에몇차례 민원을 냈지만 허사였다.
철도청 관계자는 “여러 번 검토를 했으나 예산 확보가 좀처럼 쉽지 않다”고 말했다.
대전〓지명훈기자 mhjee@donga.com
순직비 약도 soonjik-map.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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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c) 2005 badoc All rights reserved
조선시대에 교통수단이 병조(병조)의 관장하에 있었던 것을 보아도 교통과 전쟁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연기와 불꽃으로 적의 침략 위기를 중앙정부에 알리는 봉화와 공무로 급히 가는 사람이 타는 말인 파발마(파발마)를 관리했던 부서를 “역”이라 했다.
우리나라에 철도가 부설된 것도 일본이 한반도를 대륙침략의 교두보로서 군수품의 수송을 위한 목적이었고, 50년 한국전쟁시 적군은 군수품 보급의 차단을 위해 철도를 주요 공격목표로 삼았다.
이와같이 철도와 전쟁의 관계로 인해 한국전쟁에 얽힌 철도인의 애환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적진에 고립된 미 24사단장 ‘윌리암 F 딘’소장을 구출하기 위해 미군 특공대원 30명을 싣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다 장열한 최후를 마친 고 김재현 기관사의 무용담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마트면 숨겨질뻔한 이야기로서 동족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북한의 탄약과 병기를 적재한 열차를 고의로 충돌시켜 수송을 저지한 공산치하의 이동진(73) 기관사의 용감한 이야기도 있다. 북한군은 탄약과 병기를 수송하는 열차를 연합군의 포격을 피해 야간에만 운행하고 주간에는 터널속에 대피시켜 두었다. 탄약수송의 임무를 받은 이동진 기관사는 열차출발전에 운반장교의 눈을 피해 열차밑으로 들어가 열차를 정지시키는 제동코크를 잠궈서 열차가 오관터널(전라선 서도역과 남원역 사이)안에서 충돌케하여 많은 탄약과 병기를 파괴해 버린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 철도는 군인, 전쟁물자 수송 등 직간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153명의 철도직원이 산화하였다. 지금도 휴전선 주변에 위치한 월정리역 옛터에는 전쟁시 파괴된 기관차 한 대가 온몸에 탄흔을 남긴 채 그날의 참상을 말해준다.
용산 전쟁기념관과 부곡 철도박물관에는 한국전쟁때 철도직원들의 활동과 유품이 전시되어 그들의 애국적인 삶을 되돌아 보게 하고 있다. 열악한 근무여건속에서도 국가의 위난시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희생정신과 철저한 사명감은 오늘날에도 철도인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꿋꿋이 지켜나갈 것이다.
배 임 규/철도청 홍보팀장
발행일 : 2001-06-25 [중부]/조선일보
미카3-129 증기기관차
한국전쟁 당시 미 제24사단장 딘소장을 구출하기 위해 적진을 뚫고 들어갔던 기관차. 김재현 기관사와 미특공대 33명이 모두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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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증기기관차는 1889년 주미대리공사 이하영이 철도모형을 궁중에서 관람시켰으며, 1899년 서울∼인천(경인선) 개통 때 미국 브룩스에서 제작한 모걸(Mogull)형 탱크기관차가 등장한 것이 최초이다.
그후 1905년 푸러형 탱크기관차·터우형 텐더기관차를 미국에서 수입하였고, 1911년에는 아메리칸형 텐더기관차를, 1914년에는 과열증기기관차를 도입하였다. 1919년에는 미카형, 1921년과 1923년에는 파시형을 미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였고, 1915년부터 1919년 사이에는 바티형과 터우형을 남만주철도(南滿洲鐵道)의 사허공장[沙河工場]에서 제작한 것을 사용하였다.
국내에서는 1927년 경성공장(현 서울공작창)에서 처음으로 터우형 2량을 제작하였고, 그후 8·15광복 전까지 파시형·미카형 기관차를 소량 만들어 왔다. 광복 후에는 증기기관차를 제작하지 않았으며 디젤기관차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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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내가 겪은 6·25 - 잊을 수 없는 푸른 눈의 젊은이들
작성자 : 류기남 대한참전단체연합회장
얼마 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7명의 미국인 노병들이 경기도 평택 해군 제2함대 사령부 내 충무동산에 있는 서해교전 전적비를 찾아 전사자들의 넋을 위로했다는 보도를 접한 바 있다. 이들 미국인 참전노병들은 미국 ‘센트럴 매사추세츠 한국전 참전기념탑 건립위원회(Korean War Memorial Committee of Central Massachusetts)’ 회원들로 지난해 11월 매사추세츠주에 191명 전사자가 새겨진 참전기념탑 건립을 주도했던 사람들이라 한다. 이들은 서해교전 전사자들에 대해 “한국인들의 영웅은 곧 미국인들의 영웅이기도 하다”며 “보다 많은 이들에게 영웅들의 존재를 알릴 것”이라고 기념비 동판에 새겨진 한국 장병들의 얼굴을 한장 한장 정성스레 사진을 찍었다고 한
다. 이를 지켜보던 한 유가족은 눈물을 흘리며 “멀리 외국에서 아들들을 찾아와주니 고마워서 할 말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다 잊어가고 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우리사회에선 벌써 서해교전조차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러니 6·25야 더 말해 무엇 하랴. 6·25는 이미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잊혀진 전쟁이 된 지 오래다. 우리와는 달리 미국인들은 자유를 지켜낸 전쟁으로 6·25 한국전쟁을 지금도 잊지 않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미국 하원이 행정부에 대해 한국전 50주년을 기념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이나, 미 정부가 지난 95년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 공원에 한국전쟁 기념비를 세운 일 등은 우리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기념비에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다음과 같은 헌사(獻辭)가 새겨 있다.
“자유는 값있는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것 / 전사 미군 54,246명 (1950∼53년)/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 한번 만나본 일도 없는 사람들을 / 지켜주기 위해 / 나라의 부름에 응한 / 이 나라의 아들과 딸들에게 / 영광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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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THE MEMORIAL
General Douglas MacArthur said,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When the last veteran of the Korean War fades into history, he can do so knowing that a memorial will remind future generations of his/her sacrifices in defense of South Korea. The statues depicting fighting men on patrol represent the army, navy, Marine Corps, and air force working together for a common goal - victory. A granite mural of over two thousand sandblasted photographs honors the supporting services who provided supply, medical, spiritual, and fire support to the frontline units. The United Nations Wall on the opposite side lists the countries that provided troops, medical support, or supplies to help South Korea. These were: Australia, Belgium, Canada, Columbia, Denmark, Ethiopia, France, Greece, India, Italy, Luxembourg, Netherlands, New Zealand, Norway, Philippines, Republic of Korea, South Africa, Sweden, Thailand, Turkey, United Kingdom,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ll these elements point toward the Pool of Remembrance where the sacrifice of 54,246 American lives can be contemplated. It is here where an inscription summarizes the true meaning of the memorial: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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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요즘 사람들 중 공산 침략자들로부터 자유를 지켜낸 전쟁이라는 한국전쟁의 참의미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참의미를 모르니 잊혀진 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6·25 참전자들에게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전쟁이 바로 6·25다. 특히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한번 만나본 일도 없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이역만리를 찾아온 미국인들에 대한 잊지 못할 기억을 갖고 있다. 한국전에서 장성으로 적에게 포로가 된 유일한 사람인 딘 소장과 그를 구출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푸른 눈의 군인들이 그들이다.
6·25 당시 나는 스물다섯의 나이로 대전지역 철도건설대장을 맡고 있었다. 대전은 물론 이리, 청주, 김천까지가 관할구역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대통령 긴급명령 제6호로 철도종사자들을 군사수송요원으로 징발토록 했다. 당시만 해도 철도는 병력과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다른 일반공무원들과는 달리 철도종사자들은 전원 참전해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 철도참전자들은 자신을 지킬 무기도 없었고, 접전지역까지 물자와 병력을 수송해야 했기 때문에 희생이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일한 수송수단인지라 적의 타격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로 인해 287명이 순국했다.
전쟁이 터지고 유엔군이 대전에 입성한 것은 50년 7월2일이다. 당시 유엔군의 군수물자가 부산으로부터 수송되어 온 것을 하역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유엔군은 대전을 넘어 조치원까지 진출했지만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침략자들에 밀려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미 대전으로 내려와 있던 정부는 7월16일 김천으로 다시 피난했다. 원래 계획은 정부의 2차 피난지는 전주였으며, 이날 아침 6시 전주로 간다는 것이었는데, 새벽 5시쯤 연락이 오기를 김천을 거쳐 대구로 간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먼저 떠나고 군은 7월19일 후퇴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에 따라 최후의 열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총알이 뚫을 수 없는 철판으로 된 화물칸에 지휘본부를 마련하는가 하면 딘 소장의 승용차를 실을 준비까지 해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딘 소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 딘 소장은 충남도청 청사를 사령부로 쓰고 있었는데, 대전역과 도청 사이 있는 목척교에까지 적의 탱크가 나타나고 있는데도 사령관의 차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는 적의 탱크가 눈앞에 나타난 상황에서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어 딘 소장을 포기한 채 출발해야만 했다. 딘 소장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마지막 열차마저 적의 수중에 놓일 것이었다.
딘 소장을 포기하고 출발했지만 마지막 열차도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대전역을 출발하여 외곽지역인 판암동 세천터널로 진입하려는 순간 철길 양 쪽 포도밭에 매복해 있던 적으로부터 총알세례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미군과 우리 철도참전자들 여럿이 적탄에 쓰러졌다. 열차는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달렸다. 터널을 지났어도 안심이 안되었다. 대전역 이남 외곽지역까지 적이 출몰한다면 적군이 어디까지 내려왔는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오후 4시 경 옥천역에 진입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안도의 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런데 옥천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미군 장교가 “왜 사령관은 오지 않았느냐”며 사령관을 구하러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시 사령관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특공대가 구성되었다. 이에 따라 철도참전자 중 누군가가 20명의 특공대를 태우고 사지(死地)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기관사 김재현, 조수 황남호, 조수 현재영, 신호수 장시경 등 네 명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특공대를 태운 기관차가 특공대원 20명을 석탄차에 태우고 옥천역을 출발했다. 24명의 운명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기관차가 적의 사격을 무릅쓰고 대전역 구내로 진입한 것은 오후 5시 경. 특공대원들은 적과 교전을 벌이며 대전역 일대를 뒤졌지만 딘 소장을 찾을 수는 없었다. 30여 분 간 사투 끝에 특공대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미 공산군으로 새까만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특공대장의 지시에 기관사 김재현은 기관차를 발차시키는 레버를 잡아당겼다. 그 순간 기관차를 포위하고 있던 적의 사격이 기관차에 집중되었다. 특공대가 응사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특공대 20명은 그 자리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기관사 김재현도 적탄에 즉사했다. 신호수 장시경은 머리에 관통상을 당했으나 다행히 탄환이 피부 가까이를 지나 살아나기는 했지만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 조수 황남호와 현재영은 팔에 관통상을 당했으나 다행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기관사 김재현이 발차를 시켜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기관차가 전속력으로 달려주었던 덕분이다. 이들은 아직 생존해 있다.
그런데 딘 소장은 어떻게 된 것일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딘 소장은 무슨 까닭인지 늦게 사령부를 나서는 바람에 적에게 퇴로를 막혀버리고 만 것이었다. 딘 소장은 하는 수 없이 금산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나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나는 당시 영동역에 있었는데 이들 특공대의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령관을 구하기 위해 이미 적진으로 돌진해 들어간 용사들이나, 나라의 부름으로 참전한 우리 철도참전자들이 감연(敢然)히 사지(死地)로 가는 길에 나선 것이나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유와 번영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피 흘려 우리를 도와준 동맹국 미국에 대한 악감정을 확산시키려는 세력이 활개를 쳐 반미기운이 높아가고 있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또 6·25 참전자들에 대한 국가나 사회 일반의 예우가 말이 아닌 현실도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더욱이 민주화에 기여한 사람들은 국가유공자로 예우함과 동시에 엄청난 보상까지 해주는 터이기도 한다. 민주화도 나라가 있고 난 연후의 일이다. 그런데도 나라를 위기에서 건진 6·25 참전자들은 국가유공자로 예우하지 않고 있다. 그럼 누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목숨을 걸고 싸우려 할 것인가. 이 나라가 또 다시 침략을 받는다면 딘 소장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든 특공대원들과 같은 젊은이들이 이 나라에서도 나올 수 있을까. 이런 현실에서 6·25를 맞자니 착잡하고도 분통터진다.
[http://www.konas.net]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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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동 국립묘지 장교묘역>
이곳에는 대령이하의 장교, 5급이상의 군무원 등 4,518위가 안장되어 있다. 6.25전쟁 이전인 1949. 9.26.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중 적탄에 전사한 육군중위 양백호(제6묘역)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6.25전쟁 전후와 월남전 (305위) 당시 순직한 분들이 모셔져 있다.
이곳 장교묘역에는 월남전의 영웅인 이인호 소령을 비롯하여 강재구 소령, 김경진 소령, 권영주 중위 등 군인정신의 귀감이 되는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이 묘역에는 월남전때 종군기자였던 백광남 기자와 6.25때 윌리엄 F. 딘 장군 구출작전에 참여했다 순직한 김재현 철도기관사도 안장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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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n's Route동영상
딘 장군 5.jpg
무주군청 신호상씨 “살신성인 기관사 추모비 옮겨주세요”
[동아일보 2002-06-24 18:09]
“살신성인의 기관사를 제대로 추모하자는 제안을 철도청이 수용하지않으니….”
전북 무주군청 신호상(申虎相·53) 정책관리실장은 6·25를 맞을 때마다 당국의 무관심 속에 잊혀지고 있는 용감했던 한 기관사를 떠올리며 안타까움에 젖는다.
주인공은 1950년 7월 20일 대전이 북한에 함락되면서 적진 속에 홀로 떨어진 당시 미 제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1899∼1981)의 구출작전에 나섰다 순국한 김재현(金裁鉉·당시 29세) 기관사.
그는 미군 특공대 32명을 열차에 태우고 적의 수중에 들어간 대전으로 돌진하는 작전에 자원했다 특공대원 모두와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정작 위험에 빠졌던 딘 소장은 36일간 적진인 대전과 무주 등지로 도피해 다니다 결국 생포돼 종전 후 포로교환으로 돌아왔다.
신 실장은 관내 6·25 기념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다 딘 소장의 일화를 알게 돼 ‘별은 잠들지 않는다’는 책을 발간했고 이 과정에서 김 기관사의 행적을 알게 됐다.
“김 기관사의 추모비도 방문했죠. 대전 동구 판암동 경부선 철로의 상하행선 사이에 있는데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워요. 비문 내용도 여기저기 틀렸고요. 다만 이 길을 지나는 기관사들만이 경적을 울려 선배의 영령을달래주고 있었지요.”
그는“대전역광장에‘대전 블루스’ 노래비도조성하는 마당에 추모비를사람 왕래가 많은 곳으로 옮겨야 한다”며 철도청에몇차례 민원을 냈지만 허사였다.
철도청 관계자는 “여러 번 검토를 했으나 예산 확보가 좀처럼 쉽지 않다”고 말했다.
대전〓지명훈기자 mhjee@donga.com
순직비 약도 soonjik-map.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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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소장 구출 작전'은 사실이 아니었다
[검증] 고 김재현 기관사 참여 작전·사망일 등 재확인 자료 나와... "보훈처 정보 정정해야"21.08.02 07:12l최종 업데이트 21.08.02 07:12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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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등이 6.25 당시 '딘 소장 구출 작전'에 참여해 순직했다고 소개한 고 김재현 철도기관사가 참여한 작전은 사실상 딘 소장 구출과는 무관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 김재현 기관사의 사망일도 7월 19일이 아닌 7월 20일로, 김 기관사가 몰던 기관차도 '미카3-129호'가 아닌 '미카3-219호'로 재확인됐다.
그동안 지역에서 김 기관사 등이 투여된 작전이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니고 작전일도 19일이 아닌 20일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돼왔지만, 이를 뒷받침할 명쾌한 자료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훈처는 지난 19일 6.25 전쟁영웅인 고 김재현 기관사 유족의 자택(대전광역시 동구)에 '국가유공자 명패'를 달았다. 미국 국방성은 지난 2012년 고인인 김 기관사에게 특별공로훈장(특별 민간봉사상)을 수여했다. 미 국방성이 미군을 위해 공헌한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훈격으로, 한국인 수상자는 고인이 처음이었다. (관련기사 : 6.25 전쟁영웅 김재현 철도기관사에 '국가유공자 명패' http://omn.kr/1ugu1)
2015년 대전 동구청은 철도공사와 함께 대전역 동광장 앞에 '기적을 울리는 사람들' 기념 동상을 세웠다. 이 동상에는 기관차의 기적을 울리는 김 기관사와 같이 작전에 참여해 다친 황남호 보조기관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사가 각각 묘사돼 있다.
보훈처 "민간인으로 '딘 소장 구출 작전' '군수 물자 후송' 참여"
보훈처가 밝힌 김재현 기관사의 공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공적은 '1950년 7월 19일 민간인 신분으로 미군 결사대와 함께 딘 소장 구출 작전과 군수 물자 수송에 참여해 기관차를 몰다 순직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김 기관사는 보훈처에서 선정한 '2020년 5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1983년 철도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 장교묘역에 안장됐고, 현재영은 2010년 국립대전현충원에, 황남호 부기관사는 2011년 국립임실호국원에 각각 안장됐다.
그런데 김 기관사가 투여된 작전 목적이 '딘 소장 구출'이 아닌 '화물열차 후송'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발굴됐다.
[순직일] 임재근 소장 "7월 19일 아닌 7월 20일"
대전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내 임재근 평화통일교육연구소장은 지난 20일 대전 원동에서 개최한 '딘 소장 구출 작전에 대한 재검토' 주제 발표를 통해 이 같은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우선 김 기관사가 사망일과 직결된 작전일은 많은 논란이 있었다. 북한군이 대전을 점령한 날은 7월 20일이었고, 이날 오후까지 딘 소장이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전역 작전을 시도한 날은 7월 19일이 아닌 20일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지만 이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1962년 현장(대전시 판암동)에 세운 '김재현 순직비'와 현충원 묘비에도 사망일이 7월 19일로 표기돼 있고, 작전에서 살아남은 현재영·황남호 보조기관사가 1983년 직접 작성한 경위서에도 '7월 19일 오후 5시쯤'으로 돼 있다.
이와 관련 이날 임 소장은 "1953년 교통부가 펴낸 <한국교통동란기> 자료를 보면 '7월 20일'로 표기돼 있다"고 밝혔다.
<한국교통동란기>(교통사편찬위원회)에는 "19일에는 (대전에) 약간의 군인과 잔류원이 남았을 뿐이고 20일에 딘 소장과 미군을 구출하기 위해 대전으로...(중략) 참혹한 주검을 당한 김재현군과 부상한 현재영, 구사일생한 황남호군..."으로 기재돼 있다. 이 책은 전쟁이 끝난 직후 여러 관계자를 인터뷰해 서술됐다는 점에서 사료 가치가 높다.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남쪽은 낙동강, 북쪽은 압록강>(원제,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1961년 미 육군성 발행)에도 "대전역에 도착했지만 곧바로 옥천으로 되돌아가게 됐고, 그 때가 7월 20일 오후 16시 45분"이라며 "세천터널 부근에서 적의 수류탄 투척과 총격을 받아 기관사가 죽었고, 화부가 기관차를 운행하여 옥천역에 닿았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날 임 소장은 이보다 더 결정적인 자료를 제시했다. 작전을 수행한 당시 미 24사단 사령부 정보참모부(G-2)의 보고서다. 미 24사단 사령부 정보참모부가 당시 철도운송사령부에 보낸 보고서에는 "(...) 기관사는 사망했고, 화부는 상처를 입었고...(중략) 기관차가 심하게 총격을 받은 상태로 들어왔다. 시각은 대략 20일 16시 45분경"이라고 돼 있다.
보고서에 기재된 보고일시도 '7월 20일 19시 7분'으로 돼 있다. 이 보고서는 작전을 직접 수행한 미 24사단의 현장 보고서라는 점에서 사실관계를 가장 잘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임 소장은 "작전 일과 김재현의 순직일은 기존 알려진 19일이 아닌 20일이 분명해 보인다"며 "19일로 잘못 알려진 것은 1962년 순직비를 세우면서 잘못 기재했고, 당시 언론이 정부 발표자료를 근거 삼아 19일로 보도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작전 목적] 작전 보고서 "장비 실린 화차 끌기 위해 대전으로"
작전 목적도 그간 알려진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니었다. 작전에 참여한 인원도 30여 명이 아닌 6명으로 추정된다.
<한국교통동란기>에는 "이원에서 미군 30명을 태우고 행방불명된 딘 장군을 구출하기 위해 대전으로 향했으나 가는 길에 총격을 받았고, 되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총격을 받아 김재현이 즉사하고 미군결사대 대부분도 전사했다"고 기록됐다.
현재영·황남호가 1983년 작성한 경위서에도 "딘 소장 구출을 위해 미군 결사대 30명과 함께 이원역을 출발, 미군 30명을 기관차 탄수차 위에 태우고, 탄수차 위에 기관총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보훈처 등이 밝힌 공적 내용과 같다.
하지만 1954년 뉴욕에 출판된 <장군 딘 이야기(GENERAL DEAN STORY)>와는 다르다.
미국 육군성(1961) 자료 "보급화차를 뽑아내기 위해"
국방부(1979) 자료 "분명한 건 '딘 소장 구출'은 사실 아니다"
대전역에 기관차를 보내라고 지시한 사람이 딘 소장이고, 김재현 기관사 등이 사망했다는 내용도 딘 소장이 직접 보고 받았다는 얘기다. 이 기록대로라면 작전은 딘 소장이 실종되기 전에 시작됐고, 작전 목적이 '딘 소장 구출'이 아닌 '군수물품을 실은 화물열차 후송'이었음을 보여준다. 딘 소장은 20일 오후 옥천 방향으로 퇴각 도중 금산 방향으로 길을 잘못 들었다가 북한군 공격으로 차량이 전복돼 실종됐다.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미국 육군성이 발행한 <남쪽은 낙동강, 북쪽은 압록강>(원제,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1961)에도 "20일 16시 전후에 딘 사단장 명령에 따라 16시 20분에 열차가 이원역을 출발했다"며 "호송병들과 함께 대전역으로 갔는데 이는 대전역의 보급화차를 뽑아내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딘 소장의 지시에 의해 화차를 끌기 위한 것'이라는 앞의 <장군 딘 이야기(GENERAL DEAN STORY)>의 주장과 같다.
특히 한국 국방부에서 펴낸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역작전기>(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79)에서 한국교통동란기(1953, 교통부 발행)와 당시 보조기관사였던 현재영의 증언과 앞의 미 육군성의 자료를 모두 검토한 후 "내용이 서로 상이하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열차 작전 목적이 딘 소장 구출에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536쪽)고 못 박았다.
작전에 직접 참여한 미 24사단 사령부 소속 병참부대원이 20일 정보참모부(G-2)로 보낸 당시 보고서에는 작전의 목적이 더 분명하게 적시돼 있다.
작전 목적이 화물열차를 끌어오기 위한 것임을 말해준다.
[참여 인원] 30여 명 아닌 6명?
보고서에는 작전에 참여한 미군 병사들의 이름도 명시돼 있다. 모두 6명(스몰우드 하사, 르모앙 상병, 맥컬럼 상병, 슈와르츠 상병, 시콜라 일병, 마호니 이병)이다. 보고서에는 "열차 경비병들은 적군의 총에 맞았지만, 무사히 돌아왔다. 스몰우드 하사는 엔지니어가 총에 맞은 후 기관차를 통제했으며, 총알구멍을 통해 배출된 증기로 인해 기관차가 멈춘 곳까지 기관차를 안전하게 가져왔다"고 보고했다.
관련 보고서에도 "기관사는 사망했고, 화부는 부상을 당했고, 엔진 위에 있던 병사들은 안전하다"고 적혔다.
임 소장은 "작전에 투여된 미군은 30여 명이 아닌 6명이고, 미군 사망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실제 같은 날 24보병사단 사령부의 의무일지에도 기관사와 화부 사망 외에 미군 사망자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기관차 이름] '미카3-129호' 아닌 '미카3-219호'
사실과 다른 점이 또 있다. 대전현충원 전시안내물을 비롯해 대부분 자료에 작전에 투여된 기관차가 '미카3-129 증기기관차'로 돼 있다. 하지만 실제 투여된 기관차는 열차번호가 전혀 다른 '미카3-219호'로 확인됐다.
앞의 <한국교통동란기>에도 당시 기관차를 'M3 219호'(미카3-219호)로 기재됐다. 작전에 참여한 황남호 보조기관사 역시 생전 경위서에 "당시 운전했던 기관차 '미카3-219호'는 김천 기관차 사무소에서 수리한 후 전후 수송업무에 한 후 20여 년 사용됐으나 디젤화로 폐차됐다"고 밝혔다. 관련 기관이 작전에 투여된 '미카3-219호'가 폐차돼 전시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편의상 남아 있는 '미카3-129호'로 바꿔 전시·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순직일·작전 목적·기관차 열차명 수정해야"
임 소장은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순직한 김 기관사 등의 공로를 인정해 추모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사망일을 19일에서 20일로 수정하고, 작전 목적도 '딘 소장 구출'에서 '화물열차 후송'으로, 투여된 기관차도 '미카3-219호' 정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기관사 순직과 미카3-129호 관련 조형물로는 기관사 김재현 순직비(1962년), 서울현충원 묘비(1983년), 대전현충원 호국철도기념관(2013년), 대전 동광장 앞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 동상(2015년), 서울현충원 유품전시관(2015년), 대전 역전지하상가 앞(대동천 동서교 인근) 열차 모형(2020년) 등이 있다.
보훈처에 따르면 김 기관사와 함께 철도 종사자로써 당시 교통부의 비상동원령에 따라 피란민, 병력·군수물자 수송이라는 임무로 6.25 전쟁에 참전한 분들은 약 1만9300명이며, 이 중 287명이 전사했다.
▲ 대전 동광장 앞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 동상(2015년). 김재현 기관사(가운데)와 증기기관차 석탄 공급용 삽을 쥔 현재영 보조기관사(오른쪽), 그리고 "통표"를 든 황남호 보조기관사(왼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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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등이 6.25 당시 '딘 소장 구출 작전'에 참여해 순직했다고 소개한 고 김재현 철도기관사가 참여한 작전은 사실상 딘 소장 구출과는 무관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 김재현 기관사의 사망일도 7월 19일이 아닌 7월 20일로, 김 기관사가 몰던 기관차도 '미카3-129호'가 아닌 '미카3-219호'로 재확인됐다.
그동안 지역에서 김 기관사 등이 투여된 작전이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니고 작전일도 19일이 아닌 20일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돼왔지만, 이를 뒷받침할 명쾌한 자료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훈처는 지난 19일 6.25 전쟁영웅인 고 김재현 기관사 유족의 자택(대전광역시 동구)에 '국가유공자 명패'를 달았다. 미국 국방성은 지난 2012년 고인인 김 기관사에게 특별공로훈장(특별 민간봉사상)을 수여했다. 미 국방성이 미군을 위해 공헌한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훈격으로, 한국인 수상자는 고인이 처음이었다. (관련기사 : 6.25 전쟁영웅 김재현 철도기관사에 '국가유공자 명패' http://omn.kr/1ugu1)
2015년 대전 동구청은 철도공사와 함께 대전역 동광장 앞에 '기적을 울리는 사람들' 기념 동상을 세웠다. 이 동상에는 기관차의 기적을 울리는 김 기관사와 같이 작전에 참여해 다친 황남호 보조기관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사가 각각 묘사돼 있다.
보훈처 "민간인으로 '딘 소장 구출 작전' '군수 물자 후송' 참여"
보훈처가 밝힌 김재현 기관사의 공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재현은 대전철도국 소속 기관사로 1950년 7월 19일 북한군이 점령한 대전역으로 가서 '미군 제24보병 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딘 소장은 한국 정부 수립을 도왔던 군정장관을 역임했다 - 기자 주).
작전 중 대전 세천터널 부근에서 매복한 적의 공격으로 미군 27명이 전사하고 김재현 기관사도 전신에 8발의 총상을 입고 전사했다. 현재영 부기관사도 팔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고, 황남호 부기관사가 기관차를 운전해 옥천역까지 퇴각했다. 이들의 희생은 병력, 군수물자 및 피난민을 수송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힘이 됐다.
그의 공적은 '1950년 7월 19일 민간인 신분으로 미군 결사대와 함께 딘 소장 구출 작전과 군수 물자 수송에 참여해 기관차를 몰다 순직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김 기관사는 보훈처에서 선정한 '2020년 5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1983년 철도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 장교묘역에 안장됐고, 현재영은 2010년 국립대전현충원에, 황남호 부기관사는 2011년 국립임실호국원에 각각 안장됐다.
그런데 김 기관사가 투여된 작전 목적이 '딘 소장 구출'이 아닌 '화물열차 후송'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발굴됐다.
[순직일] 임재근 소장 "7월 19일 아닌 7월 20일"
▲ 김재현 순직비(1962년), 서울현충원 묘비(1983년)에는 순직일이 1950년 7월 19일로 돼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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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교통부가 펴낸 <한국교통동란기>. 자료를 보면 작전일(순직일)이 "1950년 7월 20일"로 표기돼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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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내 임재근 평화통일교육연구소장은 지난 20일 대전 원동에서 개최한 '딘 소장 구출 작전에 대한 재검토' 주제 발표를 통해 이 같은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우선 김 기관사가 사망일과 직결된 작전일은 많은 논란이 있었다. 북한군이 대전을 점령한 날은 7월 20일이었고, 이날 오후까지 딘 소장이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전역 작전을 시도한 날은 7월 19일이 아닌 20일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지만 이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1962년 현장(대전시 판암동)에 세운 '김재현 순직비'와 현충원 묘비에도 사망일이 7월 19일로 표기돼 있고, 작전에서 살아남은 현재영·황남호 보조기관사가 1983년 직접 작성한 경위서에도 '7월 19일 오후 5시쯤'으로 돼 있다.
이와 관련 이날 임 소장은 "1953년 교통부가 펴낸 <한국교통동란기> 자료를 보면 '7월 20일'로 표기돼 있다"고 밝혔다.
<한국교통동란기>(교통사편찬위원회)에는 "19일에는 (대전에) 약간의 군인과 잔류원이 남았을 뿐이고 20일에 딘 소장과 미군을 구출하기 위해 대전으로...(중략) 참혹한 주검을 당한 김재현군과 부상한 현재영, 구사일생한 황남호군..."으로 기재돼 있다. 이 책은 전쟁이 끝난 직후 여러 관계자를 인터뷰해 서술됐다는 점에서 사료 가치가 높다.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남쪽은 낙동강, 북쪽은 압록강>(원제,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1961년 미 육군성 발행)에도 "대전역에 도착했지만 곧바로 옥천으로 되돌아가게 됐고, 그 때가 7월 20일 오후 16시 45분"이라며 "세천터널 부근에서 적의 수류탄 투척과 총격을 받아 기관사가 죽었고, 화부가 기관차를 운행하여 옥천역에 닿았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날 임 소장은 이보다 더 결정적인 자료를 제시했다. 작전을 수행한 당시 미 24사단 사령부 정보참모부(G-2)의 보고서다. 미 24사단 사령부 정보참모부가 당시 철도운송사령부에 보낸 보고서에는 "(...) 기관사는 사망했고, 화부는 상처를 입었고...(중략) 기관차가 심하게 총격을 받은 상태로 들어왔다. 시각은 대략 20일 16시 45분경"이라고 돼 있다.
보고서에 기재된 보고일시도 '7월 20일 19시 7분'으로 돼 있다. 이 보고서는 작전을 직접 수행한 미 24사단의 현장 보고서라는 점에서 사실관계를 가장 잘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임 소장은 "작전 일과 김재현의 순직일은 기존 알려진 19일이 아닌 20일이 분명해 보인다"며 "19일로 잘못 알려진 것은 1962년 순직비를 세우면서 잘못 기재했고, 당시 언론이 정부 발표자료를 근거 삼아 19일로 보도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작전 목적] 작전 보고서 "장비 실린 화차 끌기 위해 대전으로"
▲ 작전을 수행한 미 24사단 사령부의 정보참모부(G-2)가 당시 철도운송사령부에 보낸 보고서. 이 보고서에는 "시각은 대략 20일 16시 45분경"이라고 돼 있다. 목적도 "장비가 실린 화차(화물 객차)를 싣기 위해(끌기 위해)"라고 적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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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목적도 그간 알려진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니었다. 작전에 참여한 인원도 30여 명이 아닌 6명으로 추정된다.
<한국교통동란기>에는 "이원에서 미군 30명을 태우고 행방불명된 딘 장군을 구출하기 위해 대전으로 향했으나 가는 길에 총격을 받았고, 되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총격을 받아 김재현이 즉사하고 미군결사대 대부분도 전사했다"고 기록됐다.
현재영·황남호가 1983년 작성한 경위서에도 "딘 소장 구출을 위해 미군 결사대 30명과 함께 이원역을 출발, 미군 30명을 기관차 탄수차 위에 태우고, 탄수차 위에 기관총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보훈처 등이 밝힌 공적 내용과 같다.
하지만 1954년 뉴욕에 출판된 <장군 딘 이야기(GENERAL DEAN STORY)>와는 다르다.
7월 20일 미군 제24사단 수송 장교 햇필드(Raymond D. Hatfield) 대위는 사단의 보급품이 적재된 대전역의 화물열차를 후방인 영동으로 후송하고자 했으나, 한국인 기관사들이 기관차만 분리해서 도주했다고 분개하고 있었다. 이에 딘 소장은 영동에 있는 사단본부에 연락해 기관차를 다시 보낼 것을 지시했다.
두 번째 시도에서도 기관차가 대전역에 도착하자마자 되돌아갔다. 딘 소장이 그 이유를 묻기 위해 영동의 사단본부로 연락했을 때 기관사가 저격당해 죽고, 화부(fireman) 혼자 기관차를 몰고 돌아왔다는 회답을 들었다.
미국 육군성(1961) 자료 "보급화차를 뽑아내기 위해"
국방부(1979) 자료 "분명한 건 '딘 소장 구출'은 사실 아니다"
대전역에 기관차를 보내라고 지시한 사람이 딘 소장이고, 김재현 기관사 등이 사망했다는 내용도 딘 소장이 직접 보고 받았다는 얘기다. 이 기록대로라면 작전은 딘 소장이 실종되기 전에 시작됐고, 작전 목적이 '딘 소장 구출'이 아닌 '군수물품을 실은 화물열차 후송'이었음을 보여준다. 딘 소장은 20일 오후 옥천 방향으로 퇴각 도중 금산 방향으로 길을 잘못 들었다가 북한군 공격으로 차량이 전복돼 실종됐다.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미국 육군성이 발행한 <남쪽은 낙동강, 북쪽은 압록강>(원제,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1961)에도 "20일 16시 전후에 딘 사단장 명령에 따라 16시 20분에 열차가 이원역을 출발했다"며 "호송병들과 함께 대전역으로 갔는데 이는 대전역의 보급화차를 뽑아내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딘 소장의 지시에 의해 화차를 끌기 위한 것'이라는 앞의 <장군 딘 이야기(GENERAL DEAN STORY)>의 주장과 같다.
특히 한국 국방부에서 펴낸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역작전기>(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79)에서 한국교통동란기(1953, 교통부 발행)와 당시 보조기관사였던 현재영의 증언과 앞의 미 육군성의 자료를 모두 검토한 후 "내용이 서로 상이하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열차 작전 목적이 딘 소장 구출에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536쪽)고 못 박았다.
작전에 직접 참여한 미 24사단 사령부 소속 병참부대원이 20일 정보참모부(G-2)로 보낸 당시 보고서에는 작전의 목적이 더 분명하게 적시돼 있다.
16시 30분경 : 우리는 장비가 실린 화차(화물 객차)를 싣기 위해(끌기 위해) 대전으로 가는 기관차를 탔다. 대전에 도착하기 전에 있는 마지막 터널(세천터널 - 기자 주)을 지났을 때 자동화기로 총격을 받았다(...) 기관사가 기관차가 너무 많이 손상을 받아 어떤 화차도 끌 수가 없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 같은 터널(세천터널) 근처에서 심한 총격을 다시 받았다...(중략) 기관차가 손상됐고 주위를 보니 옥천에 도착해 있었다. 기관사는 사망했고 화부는 부상을 당했다.
작전 목적이 화물열차를 끌어오기 위한 것임을 말해준다.
[참여 인원] 30여 명 아닌 6명?
▲ 1954년 뉴욕에서 출판된 <장군 딘 이야기(GENERAL DEAN STORY)>. 이 자료에는 대전역에 기관차를 보내라고 지시한 사람이 딘 소장이고, 김재현 기관사 등이 사망했다는 내용도 딘 소장이 직접 보고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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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에는 작전에 참여한 미군 병사들의 이름도 명시돼 있다. 모두 6명(스몰우드 하사, 르모앙 상병, 맥컬럼 상병, 슈와르츠 상병, 시콜라 일병, 마호니 이병)이다. 보고서에는 "열차 경비병들은 적군의 총에 맞았지만, 무사히 돌아왔다. 스몰우드 하사는 엔지니어가 총에 맞은 후 기관차를 통제했으며, 총알구멍을 통해 배출된 증기로 인해 기관차가 멈춘 곳까지 기관차를 안전하게 가져왔다"고 보고했다.
관련 보고서에도 "기관사는 사망했고, 화부는 부상을 당했고, 엔진 위에 있던 병사들은 안전하다"고 적혔다.
임 소장은 "작전에 투여된 미군은 30여 명이 아닌 6명이고, 미군 사망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실제 같은 날 24보병사단 사령부의 의무일지에도 기관사와 화부 사망 외에 미군 사망자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기관차 이름] '미카3-129호' 아닌 '미카3-219호'
▲ 대전현충원 호국철도기념관(2013년)에 있는 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 안내문과 안내 사진. 하지만 당시 작전에 투여된 증기기관차는 129가 아닌 미카형 증기기관차 219호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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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다른 점이 또 있다. 대전현충원 전시안내물을 비롯해 대부분 자료에 작전에 투여된 기관차가 '미카3-129 증기기관차'로 돼 있다. 하지만 실제 투여된 기관차는 열차번호가 전혀 다른 '미카3-219호'로 확인됐다.
앞의 <한국교통동란기>에도 당시 기관차를 'M3 219호'(미카3-219호)로 기재됐다. 작전에 참여한 황남호 보조기관사 역시 생전 경위서에 "당시 운전했던 기관차 '미카3-219호'는 김천 기관차 사무소에서 수리한 후 전후 수송업무에 한 후 20여 년 사용됐으나 디젤화로 폐차됐다"고 밝혔다. 관련 기관이 작전에 투여된 '미카3-219호'가 폐차돼 전시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편의상 남아 있는 '미카3-129호'로 바꿔 전시·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순직일·작전 목적·기관차 열차명 수정해야"
임 소장은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순직한 김 기관사 등의 공로를 인정해 추모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사망일을 19일에서 20일로 수정하고, 작전 목적도 '딘 소장 구출'에서 '화물열차 후송'으로, 투여된 기관차도 '미카3-219호' 정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기관사 순직과 미카3-129호 관련 조형물로는 기관사 김재현 순직비(1962년), 서울현충원 묘비(1983년), 대전현충원 호국철도기념관(2013년), 대전 동광장 앞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 동상(2015년), 서울현충원 유품전시관(2015년), 대전 역전지하상가 앞(대동천 동서교 인근) 열차 모형(2020년) 등이 있다.
보훈처에 따르면 김 기관사와 함께 철도 종사자로써 당시 교통부의 비상동원령에 따라 피란민, 병력·군수물자 수송이라는 임무로 6.25 전쟁에 참전한 분들은 약 1만9300명이며, 이 중 287명이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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