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 있는 일제강점기시대 한국영화로, 2012년 2월 16일 등록문화재 제488호로 지정되었다.
1934년에 금강키네마사가 제작하여 그해 9월에 조선극장(朝鮮劇場)에서 개봉한 흑백 무성영화(無聲映畵)이다. 이형원(李馨源)이 제작을 맡았고 안종화(安鍾和)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하였다. 이명우(李明雨)가 촬영을 맡았고 이원용(李源鎔)·신일선(申一仙)·박호·김연실 등의 배우들이 출연하였다.
우직한 영복은 봉선네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7년 동안 열심히 일하였다. 그런데 주명구에게 봉선을 빼앗기고 영복은 고향이 싫어져서 늙은 어머니와 여동생을 두고 고향을 떠난다. 그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리고 서울에서 수하물 운반부로 일한다. 그리고 병든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며 가솔린 스텐드에서 일하는 영희를 만나 친해진다. 고향에 남은 영복의 동생 영옥은 어머니를 잃고 서울로 오는데 넓은 서울에서 오빠를 찾을 길이 막막하다.
그녀는 카페의 여종업원이 되고 같은 시골에서 상경한 개철과 어울리던 주명구의 계략에 넘어가 개철에게 몸을 더럽힌다. 그즈음 영희도 실직하고 직장을 찾아다니다가 개철 일당에게 걸려들게 된다. 영희의 소식을 접한 영복은 흥분하여 개철네 집으로 달려가는데 그곳에서 뜻밖에 동생 영옥을 만난다. 영복은 고향 소식과 개철과의 일을 듣고 한탄하고 개철을 찾아다닌다. 그는 결국 술집에서 그들 일당을 만나서 개철과 명구를 두들겨패준다. 그리고 영옥과 영희네 식구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신파적 줄거리를 가진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이다. 주인공들이 겪는 생활고와 불우한 환경은 운명에 의존하고 당대 현실을 묘사하기보다는 대중적 흥행을 도모하였다. 영화감독 이규환(李圭煥)은 연출, 촬영, 배우들의 연기 등을 높게 평가한 반면 연출자가 흥행과 작품성을 동시에 추구하였으나 흥행성에 치우친 감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1938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영화제에서 무성영화부문 6위를 차지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춘의 십자로 [靑春의 十字路] (두산백과)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신파적 줄거리를 가진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이다. 주인공들이 겪는 생활고와 불우한 환경은 운명에 의존하고 당대 현실을 묘사하기보다는 대중적 흥행을 도모하였다. 영화감독 이규환(李圭煥)은 연출, 촬영, 배우들의 연기 등을 높게 평가한 반면 연출자가 흥행과 작품성을 동시에 추구하였으나 흥행성에 치우친 감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1938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영화제에서 무성영화부문 6위를 차지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춘의 십자로 [靑春의 十字路] (두산백과)
최초의 한국영화 ‘의리적 구토’
한국영화야사ㅣ기획연재ㅣ시니어스타임즈 102호(2006-02-25) 2376 0
글-김화
기생·변사·대학생·인력거 추억 아른거려
“무대(양옥, 현관이 보이는 정원)에서 청년과 악한이 싸우다가 악한이 도망가자 청년이 뒤를 쫓아가는 데서 호루라기 소리가 난다. 무대에서 연기를 하던 배우들이 급히 퇴장함과 동시에 불이 꺼지며 천장에서 옥양목 스크린이 내려와 무대의 삼분의 일 정도 넓이로 중앙에 매여있는데 거기에 활동사진이 비친다.……… 험한 산비탈에서 악한과 청년은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는데 막 뒤에서는 대사를 주고받는다. 실랑이를 하다가 이윽고 악한이 청년에게 잡히자 당황한 악한이 품에서 단도를 꺼내서 청년을 찌르려고 하는 위기의 순간에 별안간 호루라기 소리가 또 나더니 순식간에 옥양목 스크린은 다시 천장으로 올라가고 불이 켜지지만 관객들은 조바심으로 애간장을 태우고, 극도의 긴장감으로 기침소리 한 마디 없이 조용하다.”
한국영화야사ㅣ기획연재ㅣ시니어스타임즈 102호(2006-02-25) 2376 0
글-김화
기생·변사·대학생·인력거 추억 아른거려
“무대(양옥, 현관이 보이는 정원)에서 청년과 악한이 싸우다가 악한이 도망가자 청년이 뒤를 쫓아가는 데서 호루라기 소리가 난다. 무대에서 연기를 하던 배우들이 급히 퇴장함과 동시에 불이 꺼지며 천장에서 옥양목 스크린이 내려와 무대의 삼분의 일 정도 넓이로 중앙에 매여있는데 거기에 활동사진이 비친다.……… 험한 산비탈에서 악한과 청년은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는데 막 뒤에서는 대사를 주고받는다. 실랑이를 하다가 이윽고 악한이 청년에게 잡히자 당황한 악한이 품에서 단도를 꺼내서 청년을 찌르려고 하는 위기의 순간에 별안간 호루라기 소리가 또 나더니 순식간에 옥양목 스크린은 다시 천장으로 올라가고 불이 켜지지만 관객들은 조바심으로 애간장을 태우고, 극도의 긴장감으로 기침소리 한 마디 없이 조용하다.”
한국영화 효시인 활동사진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한 부분이다. ‘의리적 구토’는 신극좌의 대표인 김도산이 감독·각본·주연의 1인 3역 맹활약을 했고 촬영은 일본 덴카스(천활영화) 소속인 히로가와가 담당했다. 출연은 김도산 외에 이경환, 윤혁, 김영덕 등. 제작자는 단성사 주인 박성필. 제작비는 당시 화폐로 5천원이 들었으며 35밀리 1권 분량의 짧은 무성영화였다. 필름에는 서울 전 시가지와 한강철교, 기차, 장충단공원, 명월관, 청량리와 홍릉 부근이 들어있어 관객들은 극장 안에서 야외장면을 편히 볼 수 있었다.
줄거리는 전형적인 권선징악(勸善懲惡)이 기둥이었다. 간악한 계모 밑에서 온갖 괴로움을 당하는 주인공 송산은 오로지 가문의 평온을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인고의 세월을 보낸다. 하지만 계모일당은 간교한 흉계로 집안의 재산을 가로채고 가문을 파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그동안 술타령으로 괴로운 심경을 달래며 세월을 보내던 송산은 결의형제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응보의 칼을 뽑는다는 내용의 활극물이었다.
활동사진 연쇄극 ‘의리적 구토’는 그 무렵 인기내리막 길에 있던 신파극에 활기를 불어준 계기가 되었다. 신파극의 위기상황에서 김도산의 신극좌가 연쇄극으로 단성사에서 흥행대박을 터뜨리자 다른 신파 극단에서도 연달아 활동사진 연쇄극 제작에 열을 올렸다. 이기세 일행의 문예단은 ‘황혼’ ‘지기’(知己)를, 임성구 일행의 혁신단에서는 ‘학생절의’ ‘친구의형살해’ ‘보은’ 등을 공연했다.
활동사진이 관객들의 인기를
모으자 연쇄극이 아닌 극의 틀을 갖춘 본격적인 장편 극영화가 1923년부터 제작되었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서 선전영화로 제작한 ‘월하의 맹세’ ‘국경’ ‘춘향전’ 등의 제작으로 무성영화 시대로 돌입했다. ‘월하의 맹세’는 윤백남이 손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영화로 이 영화에서 이월화가 최초의 여배우로 등장했다. 이 영화는 1924년 4월 9일 총독부 고관, 언론인 등 저명인사 100여명을 경성호텔에 초대하고 시사회를 가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시사회로서 무성영화 시대의 화려한 막을 올렸다.
무성영화 제작이 활성화되면서 가장 큰 애로사항은 여배우 부족이었다. 아쉬운 대로 신파극에서 여배우를 징발해 출연시켰지만 이것도 절대인원이 부족해서 남배우가 여장하고 여배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제일 손쉬운 해결책이 기생을 여배우로 데뷔시키는 것이었다.
1924년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기생 강명화의 자살사건을 내용으로 한 영화 ‘비련의 곡’(悲戀의 曲) 여주인공 강명화 역에는 실제 기생인 문명옥이 출연해서 화제가 되었다. 당대 명월관 기생으로 이름을 떨치던 강명화는 경상도 제일의 대지주 아들인 장병천과의 이루지 못 할 사랑을 비관하고 온양온천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남자의 장래 희망을 빌며 자살한다. 이 영화는 1967년 강대진 감독, 윤정희 주연의 ‘기생 강명화’란 제명으로 리메이크 되어 흥행에 성공했다.
또 당시의 기생들은 남자배우와는 끈끈한 연정을 불태웠다. 그 무렵 남자배우들은 자기가 출연한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면 변사실에 나와서 기생들의 프러포즈를 기다리고 있는 게 관례였다. 영화가 끝나면 기생들은 자기 이름이 적힌 명함과 함께 인력거를 보내서 남배우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인기 있는 남자배우에겐 기생명함이 하루 저녁에도 두 서너 개씩 겹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면 남배우는 주위 동료에게 “누가 멋있고, 돈을 잘 쓰느냐?”고 묻고 골라서 인력거를 탔다. 당시 인기 있는 배우나 변사는 양복, 구두, 넥타이, 심지어는 내복까지 전부 기생들이 해줬다. 배우나 변사뿐만 아니라 미남 대학생도 기생 덕으로 학교를 다녔다.
인력거를 타고 기생집 문 앞에 다다르면 보약냄새가 코를 찌른다. 집안으로 들어가면 기생은 술상을 차려 놓고 몸단장하고 새색시처럼 눈을 아래로 깔고 기다리고 있다. 집안에 가야금 소리가 은은히 퍼지는 가운데 술잔을 기울이며 실컷 재미를 보다 나오고 싶을 때 집을 나오면 되는 것이다.
기방출입으로 가장 유명한 남배우는 활극배우 이원용이었다. 이원용은 한강철교에서 떨어져도 끄떡하지 않는 일급 활극(액션)배우로 봄에 기생집에 들어가면 가을에 나올 정도였다. 아무리 혈기왕성한 활극배우라도 가을에 나올 땐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뼈만 남아서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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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0월 28일 매일신보 광고
[책갈피 속의 오늘]1923년 ‘월하의 맹서’ 시사회
입력 2007-04-09 03:04:00 수정 2009-09-27 14:17:23
“활동사진을 볼 때도 연초가 필요. 연초를 무료로 받고 활동사진을 보려면 2등석 1매에 화접 1개, 폐비 1개 증정. 3등석 1매에 화접 1개, 코스모스 1개 증정.”(부산일보, 1917년 4월 3일자)
한국에서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한 초기. 무성영화(활동사진) 상영은 담배회사의 판촉 행사로 인기를 끌었다. 대부분의 상영관은 목조였고 화재도 빈번했지만 활동사진관에서는 관객의 흡연을 금지하지 않았고, 극장 내 매점에서도 담배를 팔았다.
당시 상영된 영화는 ‘대열차강도’(1903년) ‘쿼바디스’(1911년) ‘폼페이 최후의 날’(1913년) ‘나폴레옹 일대기’(1914년) 등 해외 무성영화였다.
안종화의 ‘한국영화 측면비사’는 당시 처음 영화를 접했던 이들의 놀라움을 전한다.
“불이 꺼진다. 이어 화차가 달려 나온다. 관중석은 수라장이 된다. 혹시 화차와 충돌할까봐 관객들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아우성치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난 다음은 더욱 가관이다. 관중들이 무대로 몰려들어 스크린을 들춰보느라고 일대 혼잡을 이뤘다. 조금 전에 본 화차의 출처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영화는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의리적 구투’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연극과 영화를 번갈아 보여 주는 ‘연쇄극(키노 드라마)’이었다. 연극을 하다가 액션 장면에서는 한강철교, 장충단, 노량진에서 미리 촬영한 필름을 상영해 주는 식이었다.
한국 최초의 극영화는 1923년에 4월 9일 첫 시사회를 가진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서’이다. 조선총독부 체신청에서 지원한 저축장려영화였다. 이 영화에는 최초의 여배우인 이월하(1905∼1928)가 출연해 스타덤에 올랐다. 이월하는 이후 ‘해의 비곡’ ‘뿔 빠진 황소’ ‘기나가의 비밀’ 등에 출연했으나 말년은 비참했다. 조선 권번의 기생이 됐다가 일본으로 간 뒤 그곳에서 음독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초기 영화는 총독부와 일본 자본, 촬영 기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이후 조선인의 자본과 기술, 연기로 제작된 영화가 쏟아졌다. ‘장화홍련전’ ‘아리랑’ 등 일제강점기 한국인이 만든 영화는 100편이 좀 넘는다. 이들 영화는 당시 조선의 민족의식과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만 제대로 보존된 게 거의 없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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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키네마사 작품으로 1934년 9월에 개봉되었고, 이명우(李明雨)가 촬영을 담당하였다. 이원용(李源鎔)·신일선(申一仙)·이복본(李福本)·최명화(崔明華)·양철(梁鐵)이 출연하였다.
당시의 통속적인 신파조에서 탈피하여 건전한 작품을 추구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제작되었고, 이 작품에 출연한 박연(朴淵, 본명 창수)이 출자하였다.
애인과 혼인하기 위하여 애인의 집에서 7년 동안 데릴사위로 살았으나, 그 애인을 주명구에게 빼앗긴 영복은 어머니와 누이동생 영옥을 남기고 상경하여 서울역의 수하물 운반부가 된다.
한편, 영옥은 어머니가 죽은 뒤 오빠를 찾아 상경하나 만나지 못하고 카페의 여급이 되어 일하다가 주명구의 농간으로 난봉꾼에게 몸을 더럽히고 만다. 영복은 서울에서 영희를 만나 사귀게 되는데, 영희 또한 주명구 일당에게 걸려들게 되자, 그들에게 복수하고 영옥을 찾아내어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 허덕이는 청춘의 애정과 갈등을 그리고 있으며, 일본에도 수출되었다. 1938년에는 최초의 영화제인 조선일보영화제에서 ‘무성영화 베스트10’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통속오락극이지만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평가받았다.
당시의 통속적인 신파조에서 탈피하여 건전한 작품을 추구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제작되었고, 이 작품에 출연한 박연(朴淵, 본명 창수)이 출자하였다.
애인과 혼인하기 위하여 애인의 집에서 7년 동안 데릴사위로 살았으나, 그 애인을 주명구에게 빼앗긴 영복은 어머니와 누이동생 영옥을 남기고 상경하여 서울역의 수하물 운반부가 된다.
한편, 영옥은 어머니가 죽은 뒤 오빠를 찾아 상경하나 만나지 못하고 카페의 여급이 되어 일하다가 주명구의 농간으로 난봉꾼에게 몸을 더럽히고 만다. 영복은 서울에서 영희를 만나 사귀게 되는데, 영희 또한 주명구 일당에게 걸려들게 되자, 그들에게 복수하고 영옥을 찾아내어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 허덕이는 청춘의 애정과 갈등을 그리고 있으며, 일본에도 수출되었다. 1938년에는 최초의 영화제인 조선일보영화제에서 ‘무성영화 베스트10’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통속오락극이지만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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