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져보니] 김원봉이 국군 뿌리? 광복군 상황 어땠나
등록 2019.06.07 21:10 / 수정 2019.06.07 21:20
정치부강동원 기자
tuna@chosun.com
[앵커]
이렇듯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언급한 김원봉을 둘러싼 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문 대통령의 말 처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할 수 있었는지, 또 그 광복군이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됐는지 따져보겠습니다.
강동원 기자. 문 대통령의 말대로라면, 이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하면서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는 거죠?
[기자]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조금 사실과 다릅니다. 공산주의자였던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는 2년동안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해온 좌파 단체였는데요. 중국의 국공합작에 균열이 생기면서 의용대의 80%의 병력이 중국 공산당에 합류해버리는 일이 벌어졌죠. 결국 20%의 병력과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이 재정 지원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단일화 하겠다고 하자 할 수 없이 광복군에 합류한겁니다.
그런데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정치적 성향이 반대이기 때문에 쭉 대립했었고요. 이내용은 백범일지에 "김원봉이 임시정부 취소운동을 맹렬히 전개했다" 라는 등으로 기술이 돼있죠.
[앵커]
그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실제로 어떻습니까?
[기자]
조선의용대는 광복군의 1지대로 편입됐죠. 그런데 기존의 광복군에 비해 병력도 크게 모자랐고 주축도 2,3지대 였습니다. 광복군이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된건 맞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편입된 조선의용대 출신이 아닌 기존 광복군 출신 인물들이 국군의 뿌리가 됐죠.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지낸 이범석 전 총리역시 김원봉과 대립하던 기존 광복군 출신이었습니다.
[앵커]
오히려 조선의용대가 북한군 창설에 힘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건 무슨 얘깁니까?
[기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중공군으로 넘어간 80%의 조선의용대 출신들이 조선의용군이 됐고, 이들이 6.25 남침 당시 북한 인민군 주력부대로 발전됐다고 일부 서적에 기술돼 있습니다.
[앵커]
그렇다면 김원봉이 월북을 한 이유도 설명이 되는 것 같은데, 김원봉은 언제 월북을 했습니까?
[기자]
김원봉의 월북 시점은 1948년 4월 20일입니다.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거죠. 이후 김원봉은 북한의 초대 내각에서 우리나라 장관급인 국가검열상에 취임했습니다. 6·25 전쟁시에는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를 맡았고요. 전쟁에서 공훈을 세웠다는 이유로 노력훈장도 받았습니다. 전쟁 이후에도 최고인민위원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요직을 거쳤고, 환갑을 맞아서 노력훈장을 또 받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숙청당했다는 이야기가 정설이고요.
[앵커]
김원봉에게 훈장을 줄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습니다만, 대통령이 6·25전몰 장병의 넋을 위로하는 현충일에 왜 이런 인물을 언급해서 논란을 자초했는지 이해하기는 어렵군요. 잘 들었습니다.
100년전 항일의 함성 들리는 듯…3월에 가볼 만한 독립운동 유적지
밀양 중심가 해천변 상가에 약산 김원봉과 부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밀양시는 김원봉 생가 터에 의열기념관을 짓고, 주변을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로 조성했다. 밀양=최흥수기자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의 이 대사는 약산 김원봉과 밀양의 존재를 새삼 각인시켰다. 1898년 밀양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해 일제 수탈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항일투쟁에 앞장섰지만 독립유공자 서훈은 받지 못했다. 국가보훈처의 자문기구인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가 올해 3ㆍ1절을 계기로 독립유공자로 포상할 것을 권고했지만, 보훈처는 현행법상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고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까지 지냈지만, 1948년 월북 이후의 행적이 문제가 됐다. 그해 9월 김원봉은 북한 정권의 국가검열상에 올랐고, 이후 노동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고위직을 지냈다. 그러나 1958년 김일성이 옌안파를 제거할 때 숙청된 후, 북한 정권에서도 독립유공자로 대우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밀양 김원봉 생가 터에 지은 ‘의열기념관’은 그의 사망 연대를 물음표로 남겨 놓았다. 북한 정권에서 숙청당한 이후의 행적이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의 벽화. 영화 ‘암살’의 한 장면도 그려졌다. 밀양=최흥수기자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초입. 밀양에선 1919년 3월 13일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밀양=최흥수기자
밀양에 살면서 연좌제의 고초를 겪었던 34살 터울의 막내 여동생 학봉씨가 지난 24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그는 생전에 “광복 후 서울로 오빠를 만나러 갔더니 경찰이 먼저 와서 행적을 캐물은 적도 있었고, 화장실에서 허리춤도 올리지 못하고 잡혀가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회고하며, “독립운동가를 이렇게 핍박하는가 싶어 서글펐다”고 털어놓았다. 성당 지인이자 밀양 문화해설사인 이순공씨가 전해 준 말이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의열기념관은 김원봉과 의열단 뿐만 아니라 밀양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을 알리고 있다. 밀양=최흥수기자
해천 주변 내일동, 내이동은 전국에서 독립유공자가 가장 밀집한 곳이기도 하다. 밀양=최흥수기자
남북 모두에 외면당한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그러나 고향에서 시민의 일상과 다시 호흡하고 있다. 밀양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해천을 중심으로 양쪽 300여m 좁은 길이 지난해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로 조성됐다. 의열기념관 맞은편 상가 외벽에 김원봉과 부인의 초상이 그려졌고, 하천을 따라 태극기의 변천사, 밀양의 3ㆍ13만세운동 등을 주제로 한 그림이 이어진다. 해천은 밀양읍성의 해자 역할을 하는 ‘해자천’의 준말이다. 밀양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79명 중 해천을 중심으로 한 내일동ㆍ내이동 출신만 26명이다. 전국에서도 독립유공자가 가장 밀집한 곳이다. 의열기념관은 김원봉과 의열단뿐만 아니라, 약산과 죽마고우로 지냈던 윤세주를 비롯해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을 기리고 있다. 의열기념관에서 약 2km 떨어진 교동에는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이 별도로 있다. 곳곳에서 열린 만세운동에 관한 기록을 보면,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민초가 독립운동가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의 태극기 장식. 밀양=최흥수기자
3ㆍ1운동 100주년, 한국관광공사가 3월의 추천 여행지로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선정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연에 다가설수록 가슴 뭉클하고 코끝이 찡해 온다.
▦2대에 걸친 독립운동의 근거지, 괴산 홍범식 고택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빼앗기자 아버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아들에게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라는 유서를 남겼다. 아버지는 일완 홍범식이고, 아들은 소설 ‘임꺽정’의 저자로 잘 알려진 벽초 홍명희다. 괴산 읍내에 위치한 홍범식 고택 뒤로는 장군봉이 우뚝하고 앞으로는 동진천이 흐른다. 문화재청에 등록된 명칭은 '괴산동부리고가'지만, 일반적으로 ‘홍범식 고택’ 또는 ‘홍명희 생가’로 불린다.
충북 괴산의 홍범식 고택 사랑채. 아들 홍명희가 만세운동을 준비한 곳이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제월대 주차장의 벽초 홍명희 문학비. 그는 ‘임꺽정’ 작가보다 독립운동가 홍범식의 아들로 기억되길 원했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한 홍범식은 태인군수 시절 의병부대를 진압하려 출동한 일본군을 설득해 무고한 백성의 피해를 막았고, 금산군수 재임 때에는 국유화될 개간지를 사유지로 인정하는 위민정책을 펼쳤다.
홍명희는 고택 사랑채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그의 주도로 1919년 3월 19일, 시장 거리에서 1,500여명의 백성이 목놓아 만세를 외쳤다. 고택에서 약 4km 떨어진 달천 변 제월대 주차장에는 홍명희 문학비가 있다.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라는 저자의 말이 새겨져 있다. 훗날 홍명희는 자식들에게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이다”라고 했다. 제월대에선 괴산 산막이 옛길이 가깝다.
▦독립운동의 성지, 안동 내앞마을과 임청각
안동은 시ㆍ군 단위로는 전국에서 독립유공자(약 350명)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임하면 천전리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1894년 갑오의병부터 1945년 광복까지 약 50년간 펼쳐진 안동과 경북의 독립 투쟁을 소개하고 있다. 내용이 방대해 해설을 들어야 이해가 쉽다.
안동 임하면 내앞마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내부. 안동은 전국에서 독립유공자가 가장 많은 기초지자체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석주 이상룡의 생애와 활동을 기록한 임청각의 작은 전시관. 한국관광공사 제공.
독립운동기념관이 세워진 곳은 의성 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이다. 당시 내앞마을은 신학문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던 독립운동가의 요람으로, 안동 지역 애국계몽운동의 산실인 협동학교가 처음 열린 곳이기도 하다. 이 마을 출신 독립유공자만 20여명에 이른다. 그중에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김동삼과, 일가를 데리고 만주로 망명한 김대락도 있다.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로 내주었던 김대락은 나라를 잃은 뒤 만주로 떠났는데 이때 150여명의 주민이 함께 망명길에 나섰다. 현재 김동삼 생가와 협동학교 교사였던 ‘백하구려(白下舊廬)’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안동의 독립운동 유적에서 ‘임청각’을 빼놓을 수 없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이자 3대가 독립투쟁에 나선 독립운동가의 집이다. 지난해 석주의 손부 허은 여사가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면서 이 집에서만 10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됐다. 임청각 안 작은 전시관에 가족들이 걸어온 고되고 험난했던 여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 중앙선 철로에 99칸 가옥 중 일부가 잘려 나갔지만, 옛 형태를 복원하기로 해 몇 년 후에는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야경이 아름다운 월영교와 안동댐이 지척이다.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완도 소안도
완도 끝자락 작은 섬에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만 20명, 기록에 남은 독립운동가를 합하면 89명이다. 소안도에서는 일제강점기 내내 평화적 시위와 무력 항쟁, 교육 운동과 법정 투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항일운동이 전개됐다.
소안도 항일운동의 자긍심 ‘사립 소안학교’. 현재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작은도서관과 평생학습원이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소안도에서 완도로 나가는 만세호. 대한호, 민국호와 완도~소안도 구간을 하루 10여차례 운항한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시작은 ‘당사도등대 습격사건’이었다. 1909년 5명의 주민이 일본 선박의 항해를 방해하기 위해 섬 서남쪽 당사도의 해안절벽을 기어 올라 일본인 등대원 4명을 죽이고 등대를 파괴했다. 같은 해 ‘전면 토지소유권 반환청구소송’도 시작된다. 소안도는 왕실에 세금을 바치던 궁납(宮納) 섬이었는데, 1905년 친일 매국노 이기용이 토지를 사유화하자 소송을 벌였다. 일본 정부와 조선 왕실을 상대로 한 13년이라는 긴 법정 투쟁 승리는 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자발적 모금으로 1만원이 넘는 돈을 모았다. 소 한 마리가 70원이던 때였다. ‘사립 소안학교’에서 ‘사립’을 강조하는 이유는 주민들 스스로 세웠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소안학교에는 일장기가 없었고,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때문에 해남과 제주에서도 찾아와 성황을 이뤘지만, 1927년 항일운동의 배후로 지목돼 강제 폐교된다. 사립 소안학교는 2003년 복원해 평생학습원과 작은 도서관으로 운영 중이다.
소안도까지는 완도 화흥포 여객선터미널에서 하루 10~12회 여객선이 운행한다. 1시간이 걸린다. 3대의 여객선은 각각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다. 선착장에 내리면 가장 먼저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라 적힌 비석이 반긴다.
▦그날의 함성…천안 독립기념관과 아우내 장터
천안 독립기념관은 명실상부 겨레의 독립 의지가 집약된 곳이다. 천안 독립기념관은 온 국민이 모은 500억원의 성금으로 지어 1987년 8월 15일 개관했다. 가장 먼저 만나는 ‘겨레의 탑’은 높이 51m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한다. ‘겨레의 집’도 웅장하기는 마찬가지다. 길이 126m, 폭 68m, 높이 45m에 달하는 동양 최대 기와집으로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설계했다.
천안 독립기념관은 명실상부 겨레의 독립의지가 집약된 곳이다. 18일 오후 드론 100대가 독립기념관 상공에 태극기 형상을 그리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제공.
병천면 유관순 열사 생가. 만세운동 당시 전소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겨레의 집 내부의 ‘불굴의 한국인상’ 조각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을 상징한다. 겨레의 집 앞 태극기 한마당에는 815개의 태극기가 연중 게양된다. 독립기념관은 7개 전시관과 입체영상관으로 구성된다. 자료가 워낙 방대하고 전시관이 넓어 꼼꼼히 보려면 5시간 정도 걸린다. 미리 정보를 파악하고 동선을 짜서 방문하는 것이 좋다.
병천면 ‘아우내 장터’는 유관순 열사가 독립만세운동을 펼친 곳이다.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이던 유관순은 1919년 서울에서 3ㆍ1운동에 참가한다. 휴교령이 내려진 후 고향으로 돌아 온 그는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당시 3,000명이 모였다고 한다. 이 일로 5년형을 선고 받고 투옥된 그는 결국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한다.
유관순 열사 생가는 만세운동 당시 일본 관헌들에 의해 전소돼 빈터만 남은 것을 1991년 복원한 것이다. 생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의 유관순 열사 유적지에는 열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동상, 기념관이 있다.
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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