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同床異夢

[정문일침 495] 김종필과 조남기

marineset 2023. 6. 1. 00:12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6/25 [11:11]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한국 정치인 사망소식을 접할 때마다 느끼지만, 한국 정계는 정치인에 대한 평가가 무척 너그럽다. 6월 23일 92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도 예외가 아니어서 큰 별, 거목, 로맨티스트 따위로 불리면서 여러 정당 정객들의 찬사와 애도가 이어졌다. 일본 노정객들도 조의 메시지를 발표한 건 당연한 일이라고 보이는데, 미국에서는 나설만한 인물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러저런 기사들을 주동적 혹은 수동적으로 접하다가, 한국 어느 정객의 평가에 생각이 깊어졌다. 5· 16만 없었다면 김종필이 참 멋진 정치인이었다는 취지였다. 
헌데 1961년의 5· 16이 없었다면 김종필이 뒷날 수십년 정계에서 활약한 JP로 될 수 있었을까? 김종필이 5· 16에 끼이지 않았더라면 그 시절 수많은 예비역 중령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뒷편에서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김종필과 비슷한 시기에 역시 충청도에서 태어나 6월 17일에 91세를 일기로 세상 뜬 인물이 눈앞에서 겹쳐진다. 1927년 4월 20일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태어난 조남기다. 
다른 길을 걸은 두 사람은 6. 25전쟁기간에 군관과 장교로서 양쪽에서 복무했다. 김종필이 육군 대위로서 정보계통에서 근무할 때, 조남기는 중국인민지원군의 퇀급(연대급) 간부로서 지원군 사령부에서 사령원 펑더화이(팽덕회)의 통역으로 일하다가 후에는 후근(후방)업무를 관장했다. 당시 직위는 사령부 작전처 참모, 운수과 부과장, 과장이었던 조남기가 더 높았고 맡은 일도 훨씬 중요했으니 여러 주요 전역들의 물자보장을 책임지고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장 건설에서도 큰 기여를 했다. 
전후 계속 정보계통에서 일하면서 소령을 거쳐 중령으로 진급했던 김종필이 1960년 육군본부 정보국 행정처 처장으로 있다가 항명파동에 말려들어 예편하고 별다른 직업이 없던 차에 처삼촌 박정희 소장과 함께 군사정변을 일으켜 “5. 16 군사혁명”이라고 불렀으며 그때로 부터 정계에서 활약했다. 
1960년대 한국의 혼란함이 5· 16세력들에게 기회를 주었고 1990년대 초반까지 이르는 군부세력들의 집권을 만들어냈다. 
같은 시기에 조남기는 1958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와 더불어 귀국한 다음 1959년부터 옌볜(연변)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사단급 옌볜군분구에서 정치부 부주임, 주임, 부정치위원, 정치위원으로 일했다. 군사계급과 직위는 김종필보다 높았으나 변방에서 소문 없이 일하는 일꾼이었다. 중국에서는 영관이나 소장이 군사정변을 일으킨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고 어느 군인의 말대로 국방부장이 정변을 일으키려 한다더라도 중공 당조직의 보이지 않던 힘에 의해 무산된다. 
1961년에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뒤이어 정객으로 대변신해 국제정치무대에 나선 김종필과 달리 군에서 계속 근무하던 조남기는 1966년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에 소극적이었다가 타격을 받아 한동안 일하지 못했고 1973년 4월부터 지린성(길림성) 퉁화(통화) 군분구 정치위원, 지린성 군구 정치부 주임을 역임했다. 
1978년 4월 처음으로 지방사업을 맡게 되어 옌변 조선족 자치주 주당위원회 제1서기, 주 혁명위원회 주임(지금은 주장이라 함)이 되었는데, 굳이 이름지어 말하면 지방급 스타였다. 
1960년대부터 김종필은 조남기보다 훨씬 유명했고 직무도 높았으나 기복과 굴곡도 심했다. 
그와 달리 조남기는 비교적 안정된 출세가도를 달려 지린성 부성장, 지린성 당위원회 부서기, 서기로 일하면서 군에서는 군분구 제1정위, 지린성 군구 부정위 등 직을 역임했는데, 1985년 3월 지원군 부사령원으로서 직속상관이었으며 당시 중국인민해방군 후근부 부장이었던 훙쉐즈(홍학지)의 발탁으로 완전히 군으로 돌아가 해방군에서 총참모부와 총정치부와 더불어 “3총부”로 꼽히던 총후근부 부부장, 부장을 역임했고, 1988년 9월 중국인민해방군이 군사칭호 제도를 재실시할 때 최고 계급 상장이 단 17명에게 수여될 때 그중의 한 사람으로 되었다. 상장들 가운데서 군대내 경력이 제일 짧았고 후근계통에 그보다 경력이 오랜 사람들이 수두룩했으나 그가 후근부 부장과 상장으로 된 건 훙쉐즈와 중국의 실제 1인자 덩샤오핑(등소평)이 그 능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92년~ 1995년 해방군 군사과학원 원장으로 있다가 퇴역한 조남기는 1998년 3월부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으로 되어 “국가영도자”반열에 올랐으며 조선족으로서는 최고로 출세한 명인으로 꼽힌다. 
조남기는 1998년인가 한국을 방문하여 고향에 찾아갔고 한국 언론들의 “금의환향”이라고 표현했다니까, 한국에서도 제법 알려지고 인정된 인물이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 없으나 1980년대 초반 김일성 주석이 소련과 동유럽 방문차로 중국을 경유할 때, 환영하는 중국 간부들에 대한 소개를 받다가 조남기에 이르러 “당신이 조남기요?” 하면서 친근감을 보였고 조남기보다 직급이 높은 한족 간부를 젖혀놓고 조남기를 자기 신변에 앉히더니 이야기를 나눴다 한다. 그만큼 조남기라는 이름을 김일성 수상이 잘 알았고 높이 평가했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조남기는 중국에서 조선족과 한족들의 존경을 받는 외에, 반도의 남북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군사과학원의 군인들이 쓴 《조남기전》이 2000년대 초반에 나와 권위적인 자료로 꼽힌다. 또한 그의 인간됨과 처사를 회억한 글들도 적잖이 있다. 
1945년 12월에 입대하여 평생 군대에 몸을 담았고 1947년 2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뒤 평생 중공당원으로 활동한 조남기는 사후 신화통신이 발표한 부고에서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 오랜 시련을 거친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 무산계급 혁명가, 걸출한 민족사업  영도자, 우리 군 현대 후근건설의 영도자(中国共产党的优秀党员,久经考验的忠诚的共产主义战士,无产阶级革命家,杰出的民族工作领导人,我军现代后勤建设的领导者)”라는 공식 평가를 받았고, 실제와 부합되는 이 평가는 이후 역사에 남게 된다.


당을 여러 번 바꾸고 “삼당 합당”, “DJP연합”등으로 정계판도를 바꿨던 김종필은 자서전을 쓰지 않겠노라고 밝혔으나 2015년 《중앙일보》에 증언록을 100여 회 연재했고 2권본  《김종필 증언록 세트》도 출판했다. 자서전과 증언록이 무슨 실질적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는데, 2016년 말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가 터져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사퇴요구에 직면했을 때 박근혜는 5000만 국민이 달려들어 내려오라고 해도 앉아있을 것이라고, 그 고집을 꺾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육영수 여사의 나쁜 점만 물려받았다면서 육 씨의 불미스러운 언행들을 까밝혔다. 그가 그려낸 육영수 이미지는 한국인들이 알던 것과 전혀 달랐고 증언록에서 미화했던 모습과도 달랐다. 물론 그가 이야기한 박정희 이미지도 말하는 시기에 따라 달라지곤 했다. 남에 대한 묘사와 평가가 이처럼 변덕스러우니, 그의 증언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김종필 증언록》은 소설 정도로 간주하는 게 현명한 처사겠다.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한다. 김종필의 경우 정치인들의 높은 평가와 달리 네티즌들의 평가는 인색하고 야박해 인용하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공식 평가와 민간 평가의 선명한 차이는 이후에도 두고두고 역사의 쟁론거리로 되리라 짐작된다. 계산하는 게 많아서 입에 바른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는 정치인들과 달리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민간인들의 평가야말로 더 오래 남지 않을까? 후세 사람들은 지금의 민간인들과 마찬가지로 훨씬 객관적인 평가를 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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