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눈뜨며 의병 활동에 뛰어들다
김병로[金炳魯, 1887.12.15(음)〜1964.1.13] 선생은 1887년 12월 15일(음) 전라북도 순창 복흥면 하리에서 사간원정언을 지낸 아버지 김상희와 어머니 장흥 고씨 사이에서 삼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 호는 가인(街人)이다.
고향 인근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 할아버지 김학수가 세상을 뜨면서 슬픔에 잠겼던 선생은, 이듬해에는 아버지까지 여의는 슬픔을 맛보았다. 외아들이었던 선생은 10살이 채 못 되어 가장이 되었다. 할머니 박씨는 선생을 위해 집안에 독서당을 만들어 한문 공부를 하도록 하였고, 선생은 다방면에 걸친 독서에 전념하였는데 심지어 의서(醫書)와 산서(山書)까지 섭렵할 정도였다. 1899년에는 4살 연상인 연일 정씨 정교원의 딸과 결혼하였다. 선생과 아버지 모두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결혼을 서둘렀던 이유였다. 이듬해 할머니마저 세상을 뜬 이후 어머니를 모시고 집안을 책임지게 되었다.
한학 공부를 하며 사서삼경 중에서도 [중용]과 [대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선생은 1902년 당대의 거유(巨儒)였던 간재 전우의 문하가 되었다가 1904년 무렵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목포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군함을 견학한 뒤 ‘우리의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서구의 물질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른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선생은 먼저 친구 4~5인과 함께 ‘일신학교(日新學校)’라는 간판을 걸고 강사를 초청하여 영어, 일어, 산수 등을 비롯한 신학문을 배웠다. 또 [미국독립사], [이태리독립사], [월남망국사], [애급망국사] 등을 읽으며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선생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울 방법을 찾던 중, 이듬해 5월 면암 최익현이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18세의 나이로 채상순 등 5~6명의 포수들과 함께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이처럼 올곧은 선비정신을 강조하던 간재 및 면암과 인연을 맺으면서 선생은 국권회복운동의 일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면암의 의병부대가 해산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독서로 소일하던 선생은, 한때 부안, 영광, 순창 등지를 돌아다니며 난세를 구원할 ‘기인(奇人)’을 찾아 방황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광양의 백낙구, 담양의 기우만, 이낙범, 정읍의 유이삼, 유화숙, 운봉의 박문달 등과 함께 의병투쟁을 위한 계획을 세웠고, 그 뒤 채상순과 함께 김동신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순창의 일본인 관청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때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채상순의 모습은 선생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일제가 ‘호남대토벌작전’이라 불렀던 가혹한 탄압 때문에 의병투쟁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선생은 대신 계몽운동, 자강운동으로 눈길을 돌려 고정주가 설립한 창흥의숙(昌興義塾) 고등과 속성과정에 입학하였다. ‘호남 신교육의 요람’이라고도 불렸는 창평은 당시 신학문의 열기가 뜨거웠는데, 이 때 선생은 고광준, 김성수, 백관수, 송진우등과 교우관계를 맺었고 이후 평생의 동지로서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사이가 되었다.
일본 땅에서 변호사의 꿈에 도전하다
창흥의숙을 졸업한 선생은 더 많은 지식을 쌓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자 일본유학을 결심하고 1910년 일본 도쿄로 떠났다. 선생의 1차 유학이었다. 도쿄에서 고광준과 함께 기거했고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등과도 함께 유학생활을 하였다. 선생은 우선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법과 청강생이 되었다. 이 무렵 이미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유에 대하여 훗날 선생은 “일정(日政)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하려” 했으며, 변호사가 되면 첫째 아무리 일본경찰이라도 변호사를 쉽게 폭행하거나 구금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둘째 변호사 수입을 사회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쓸 수 있고, 셋째 공개법정에서라도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며 인권옹호와 사회방위를 위한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도쿄에 ‘경술국치’의 비보가 전해졌다. 가뜩이나 생활고에 시달리던 선생은 망국(亡國)이라는 정신적 충격까지 겹쳐 귀국했고, 심신을 추스리며 잠시 교회에 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폐결핵 진단을 받은 뒤 요양을 위해 한동안 다른 활동을 잠시 접어야 하였다.
건강을 되찾은 선생은 광주에서 자형과 함께 잡화상을 운영하다가 1911년 가을 다시 도쿄로 2차 유학에 나섰다. 이듬해 메이지[明治]대학 법과 3학년에 편입한 후 일요일마다 재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在東京朝鮮人留學生學友會) 집회에 나갔다. 당시 이 학우회는 재일유학생들의 구심체로서 단순한 친목이나 교류를 넘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913년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선생은 광주 경편철도(輕便鐵道) 사무소 측으로부터 전무 자리를 제의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가산을 정리하여 다시 3차 유학길에 올랐다. 선생은 메이지대학과 주오[中央]대학에서 공동운영하는 법률고등연구과에서 공부하는 한편, 니혼대학 법과에도 학적을 두고 학업에 매진하였다. 그러면서 재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 간사부장과 금연회(禁煙會) 운영의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914년 창간된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에서는 창간호부터 편집자로도 활동하였다. 불철주야 공부하여 능력을 인정받은 선생은 야마우치(山內) 박사의 권유로 일본 변호사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서류를 제출하였으나 “일본인 이외에는 현행 변호사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허락할 수 없다”는 내각회의의 결정에 따라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약자의 편에, 좌우의 중심에 서다
광주학생독립운동 판결 보도기사, <동아일보> 1930년 2월 27일자. ‘광주학생 49명 최고 8개월 언도’라는 제목으로 일제가 선고한 판결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당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조사를 맡았던 김병로 선생은 "가혹한 판결"이라며 일제를 비판하였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니혼대학 법과 졸업장과 메이지대학ㆍ주오대학 공동운영 법률고등연구과 수료증을 받은 선생은 1915년 귀국하여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 조교수로서 강단에 서게 되었고, 사법협회 기관지 <법학계>의 편집도 맡았다. 3ㆍ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경성전수학교 조교수를 사임하고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가 되었으나, 1년 만에 사임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어 서대문 자택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이어 경성조선인 변호사회에서 활동하여 상의원(1924), 부회장(1925), 회장(1926) 등을 맡았다. 또한 조선변호사협회 이사장(1924)을 맡기도 하였다.
변호사로 개업한 뒤 선생은 독립운동 관련사건 관련자들을 위한 무료변호를 많이 하였다. 그리고 1923년에는 권승렬, 김태영, 이인, 허헌 등 변호사들과 함께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설립하였다. 한 사람이 사건을 맡으면 그 보수로 다른 회원들과 공동연구하여 변론한다는 취지였으며, 일반 형사사건을 맡아 받은 수임료로 애국지사들의 무료변론과 사식차입 등의 활동을 벌이고 그 가족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선생이 맡았던 사건 중 정치색이 짙은 이른바 ‘시국사건’으로는 1921년 보합단(普合團) 사건, 1923년 김상옥 의거, 제2차 의열단 사건, 1926년 6ㆍ10만세 사건, 1927년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고려혁명당 사건, 정의부(正義府) 사건, 1928년 제1차 간도공산당 사건, 1929 대구학생 비밀결사 사건, 통의부(統義府) 사건, 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 수원고등농림학교 흥농사(興農社) 사건, 1931년 제3차 간도공산당 사건,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 등이 있었다. 또 안재홍(1928)ㆍ안창호(1932)와 같은 민족지도자들의 변호도 맡았다. 선생은 일제가 우리 민족을 억압하기 위하여 제정ㆍ적용한 보안법, 치안유지법, 신문지법, 집회취체령 등과 맞서 싸우며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함으로써 그 자신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하여도 노력하였다. 1928년 전라북도 옥구군에서 소작쟁의를 벌인 농민들, 1929년 집단파업을 한 함경남도 원산부두 노동자들과 형평사(衡平社) 조합원들, 1929년 경상남도 진주노동조합사건 관련자들의 변호를 맡은 점을 보아도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선생의 깊은 애정을 알 수 있다. 또 1927년 함경남도 장진군의 군민들로부터 부지강제수매에 대한 진정을 받았을 때, 1929년 갑산에서 화전민 박해사건이 일어났을 때, 1930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농민 살상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두 직접 현지로 가서 조사를 한 뒤 대책을 강구하는 열의를 보였다.
교육문제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진 선생은 1920년 조선교육협회 창립 발기인, 1922년 보성전문학교 상임이사, 1924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산하 고등보통학교 기성회 발기인 등을 맡았다. 특히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발기인을 맡았으며, 이듬해에는 김성수와 함께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회금보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1921년 동아일보사 법률고문을 맡았고, 1924년 동아일보사 간부들이 친일파들의 협박을 받은 이른바 ‘식도원(食道園)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규탄하는 민중대회 발기준비위원을 맡았다. 또 1927년 전조선변호사대회에서 신문지법과 출판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등 언론의 자유를 지키는 데에도 힘썼다. 이밖에 1923년 조선물잔장려운동에도 참여하고 1931년 충무공유적보존운동기금 관리위원을 맡은 점 등으로 선생의 민족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창립총회 기념사진(1923.03.30). 1920년대 초 우리의 힘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일어난 문화운동이 바로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이다. 김병로 선생은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발기인을 맡으면서 학교 설립을 위해 활동하였다.<출처: 독립기념관>
이어 선생은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하여 당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던 세력들을 통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1927년 창립된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였고,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광주를 찾아 진상을 조사하고 일제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며 시정을 촉구하였다. 이듬해에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신간회 ‘해소론(解消論)’이 대두되자 이에 반대하며 민족협동전선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결국 신간회는 ‘해소’되고 말았다. 선생은 한때 사회주의 조직인 북풍회(北風會)에도 관여하는 등 좌ㆍ우의 이념에 구애되지 않고 민족의 독립을 위한 단결과 협동을 호소했다.
이처럼 민족을 위해 다방면에서 활동한 선생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29년 선생이 연사로 나서는 집회가 당국으로부터 금지되기도 했고 신간회 간부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였으며 1931년에는 6개월 동안 변호사 정직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선생은 1934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잠시 은둔생활을 하였고, 1945년 패망이 임박한 일제가 민족지도자들을 살해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자 가평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던 중 8ㆍ15 해방을 맞았다.
초대 대법원장으로 건국에 동참하다
해방이 되자 선생은 건국운동의 일선에 나섰다.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발표한 135명 위원 명단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발표한 인민위원 명단에도 선생의 이름이 올랐으나 선생은 이를 부인하였다. 그 대신 8월에 백관수․원세훈 등과 함께 고려민주당을 창당하고 이를 확대하여 다시 조선민족당을 창당하였다. 이어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창당발기위원, 임시의장, 중앙감찰위원장, 서울지부 집행위원장, 법제조사분과위원장 등을 지냈다. 선생은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서 건국운동에 투신했다.
여운형의 건준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건준을 방문하여 좌우합작을 제의하기도 하였고, 아놀드 군정장관이 건준과 인공을 매도하자 이를 비판하는 논평을 내는 등 좌우세력을 모두 포용하는 건국운동을 벌이려 하였다. 1946년 서울에서 반탁운동을 벌이다 체포된 학생들을 변호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46년에는 비상국민회의 임시의장, 비상국민회의 법제상임위원장,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산하경제전문위원회 위원, 민족통일총본부 간부, 1947년에는 도산기념사업회 발기인, 민족자주연맹 결성 준비위원회 위원 등을 맡으며 해방정국의 한복판에서 활동하였다.
미군정청에서도 선생의 능력과 명망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선생은 1946년 미군정청 사법부 법전기초위원회 위원, 미군정청 사법부장, 1947년 사법부 내 6인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사법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이러한 선생이 대한민국 사법부의 첫 수장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48년 8월 5일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에 임명되어 국회의 인준을 받았다. 이 밖에도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 법조협회 회장을 맡아 사법부의 발전을 위하여 애썼다.
하지만 선생은 이승만 대통령과 친일파 처벌을 놓고 갈등을 빚게 되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강한 의지를 보인 선생은, 반민족행위자들의 처벌이 민족적 과제임을 천명하고 신속ㆍ공정한 재판을 강조하였다.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인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법 개정을 요청했을 때에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던 중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1950년 골수염 치료를 위하여 왼쪽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후 선생은 1957년 12월 대법원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정년퇴임 하였다.
독재 정치를 비판하며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김병로 선생의 별세와 사회장 보도기사,<동아일보> 1964년 1월 19일자. ‘크신님 그는 가셨네’라는 제목으로 사회장으로 치러진 김병로 선생의 장례식 광경과 애도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출처: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재야 법조인이 되어서도 선생은 정부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1958년 법관회의의 대법원장 제청권을 없애려는 정부를 규탄하였으며, 영일을구 선거무효판결을 오판이라고 한 이재학 국회부의장의 발언을 사법부 모독이라고 비판하였다. 또 진보당 사건 1심 판결에 불만을 품은 시위대가 법원에 난입하자 그 배후를 규명하여야 한다고 항변하였고 민의원이 변칙적으로 통과시킨 신국가보안법에 반대하며 변칙통과 자체가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일제와 맞서 싸웠던 선생이 이제는 독재와 맞서 싸우는 선봉에 서게 된 것이다.
1959년에는 민권수호국민연맹 고문과 재일동포송북반대국민위원회 고문을 맡았고, 이 해 정부가 <경향신문>을 폐간시키자 ‘경향신문 폐간은 위헌 불법이다’라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하였다. 또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부정선거는 천추의 한이 될 것’이라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하여 이 대통령에게 경고를 하기도 하였다. 또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급서하자 장면 부통령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하라는 기자회견을 열어 부정부패한 정권을 교체하자고 호소하였다.
이승만 장기독재와 3ㆍ15부정선거에 분노한 민중들이 4ㆍ19혁명을 일으키자 선생은 재야 정치지도자들과 함께 사태수습을 위한 대정부건의안을 발표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에는 비상대책위원회 지도위원 명의로 과도정부의 개편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또 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역설하는 등 민주주의 실현과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이어 선생은 민주당을 선택하는 대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유법조단 대표로 순창에서 1960년 제5대 민의원선거에 출마하였고 결국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1961년 5ㆍ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듬해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을 통하여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였고 <사상계>에 ‘군정연장과 국민투표에 대하여’를 기고한 뒤 야당지도자들과 함께 군정의 종식을 촉구하였다. 아울러 1963년에는 윤보선, 이인 등과 단일야당 결성을 추진하다가 여의치 않자 자신이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하고 최고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후에도 야권통합을 계속 추진하여 허정의 신정당, 이범석의 민우당 등과 무조건 합당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들은 ‘국민에게 보내는 성명’을 발표하여 반드시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대통령 단일후보를 내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어 세 당이 통합한 국민의당 창당 발기대회가 열려 선생이 대표최고위원, 이범석과 허정이 최고의원을 맡았다.
하지만 야권후보 단일화는 순탄치 않았다. 선생과 윤보선, 이범석, 허정 등은 논의를 거듭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한 채 국민의당은 결국 허정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며칠 뒤 민정당은 돌연 국민의당 참여를 포기하고 윤보선을 대통령후보로 내세우게 되었다. 선생은 민정당 및 국민의당 대표최고의원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이 해 연말 병석에 누워 사실상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이미 70대 중반을 넘어선 선생은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1964년 1월 13일 선생은 인현동 자택에서 78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대쪽 같은 성품과 지조를 평생 잃지 않았던 선생은 지금까지도 법조인은 물론 국민들의 귀감으로 추앙받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발행일
발행일 : 2012. 10. 30.
[네이버 지식백과] 김병로 [金炳魯] - 청년 의병에서 대한민국 대법원장까지 (독립운동가)
사법부 독립 초석 쌓은 김병로 대법원장 가문, 법조인 고위관료 등 많아
김병로 대법원장은 지금의 기준과 관행에 비추어 보더라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원리와 원칙을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새해 첫날 국회의장을 비롯한 3부 요인들이 이승만 대통령에 새해 인사를 갈 때에도 김병로 대법원장은 삼권분립 하의 사법부 대표가 행정부의 대표인 대통령한테 새해 인사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끝내 경무대를 방문하지 않았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려는 김병로 대법원장의 단호한 태도와 별개로, 그의 직계 후손들 중에는 거물급 법조인이 많이 눈에 띤다. 대표적인 인물이 대법관과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윤영철(尹永哲·80) 씨다. 가인(佳人) 김병로의 장남 김재중(金載重: 1907-1955)의 4녀 김종윤(78) 씨가 윤영철 전 헌법재판소장의 부인이고, 윤씨의 손위동서가 신민당 국회의원과 대변인으로 이름을 날린 이택돈(李宅敦: 1935-2012) 변호사다. 윤씨의 손아래 동서가 경제기획원 차관,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을 거쳐, 건설부 장관을 지낸 이진설(李鎭卨·79) 씨다.
김재중의 장남이자 김병로의 장손인 김원규의 맏사위가 서울북부지방법원장과 서울가정법원장을 지낸 뒤, 법무법인 화우의 고문으로 있는 이윤승(李胤承·65) 변호사다. 이윤승 변호사의 바로 아래 동서가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과 지식경제부장관을 지낸 최중경(崔重卿·62) 씨다. 청와대 경제수석과 지식경제부장관으로 재직할 때 보여준 강한 캐릭터로 ‘최틀러’로 불리기도 했던 최 씨는 2016년부터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을 맡아, 연임 중이다. 김재중의 차남인 김형규의 맏사위가 이명박 정부 시절 조달청장을 지내다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 대사로 나가 원자력발전소 수출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권태균(權泰鈞·63) 씨다. 권태균 씨가 UAE 대사로 부임할 당시 4촌 동서인 최중경씨는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있었다.
김병로의 장남 김재중의 장녀인 김혜규(86) 씨의 시아버지는 대검찰청 검사와 심계원(현재 감사원) 차장을 지낸 김완섭(金完燮: 1898-1975) 씨고, 김완섭 차장의 부친은 대한제국의 판사와 변호사를 지낸 김병도(金秉度: 1875-1947) 씨다. 김혜규 씨의 시가(媤家)를 통해 김병로 가문은 또 다른 거대한 법조가문과 연결된다.
김혜규의 시동생은 대구고법원장과 사법연수원장을 지낸 김재철(金在澈·79) 변호사이고, 김 변호사의 손아래 처남이 노태우 대통령 시절 청와대 사정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유후(金有厚·77) 전 광주고검장이다.
다시 김병로 가문으로 돌아가자. 일찍 작고한 김병로의 차남 김재열(金載烈: 1914-1942)의 장남이 김종인(金鍾仁·78) 전 국회의원(보사부장관)이다. 김종인 전 의원의 부친은 일제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으나 일찍 작고하는 바람에 판사로 임명되지 못했다고 한다. 김종인 의원의 처삼촌이 김정렴(金正濂·94) 씨로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무려 9년 3개월 동안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김종인 전 의원의 매형은 박봉환(朴鳳煥: 1933-2000) 전 동자부장관으로, 나중에 증권감독원장을 3연임하기도 했다. 박봉환 전 정관의 장녀 박현정(55) 씨는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를 맡아 조직원들과 마찰을 빚다 물러났다.
얽히고 설킨 한국 지배세력의 혼맥은 끝없이 펼쳐진다. 동아일보 김재호 사장의 증조부인 인촌 김성수와 장인 고정주(高鼎柱: 1863-1933) 규장각 직각의 창평 고씨 가문, 그리고 가인 김병로 대법원장 가문은 겹사돈을 맺어 거대한 하나의 가벌(家閥)을 이룬다. 대법관을 비롯한 법조인과 고위 관료, 정치인, 대학교수 등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취재: 신학림 전문위원, 박중석
데이터: 최윤원, 임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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