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제국주의가 일으킨 재앙
전쟁
국가 : 연합국(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vs.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 등)
연도 : 1914~1918년
목차
제국주의 국가들,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다
유럽의 화약고에서 전쟁의 불씨가 타오르다
발칸 반도의 전쟁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다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이 대결을 벌이다
전 세계 제국주의 국가들이 참전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약 천만 명이 죽고 약 2천만 명이 부상을 당한 큰 싸움이었어요. 이 전쟁은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났지요. '세계 대전'은 여러 나라들이 한꺼번에 전쟁에 참가해서 붙은 이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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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유럽에는 산업이 발달하여 공장에서 많은 물건을 만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물건을 만들 원료와 내다 팔 시장이 필요했지요.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원료도 풍부하고 물건을 팔 시장도 넓었어요. 그래서 유럽 나라들은 군대를 동원해 두 대륙을 지배하고 식민지를 건설했어요. 이런 나라들을 '제국주의 국가'라고 해요.
당시 식민지가 가장 많았던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였어요. 그 뒤를 이어 독일도 식민지를 확보하려고 나섰지요. 1900년대 초에 영국, 프랑스, 독일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서로 식민지를 많이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어요. 독일은 이 경쟁에 뒤늦게 뛰어들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에 불만이 많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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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아프리카 식민 정책을 풍자한 그림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곳은 발칸 반도였어요. 발칸 반도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점에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전쟁이 많았던 곳이에요. 그래서 '유럽의 화약고'라 불렸지요.
발칸 반도는 1300년대부터 오스만 제국이 지배했어요. 그런데 오스만 제국의 힘이 약해지자 1878년에 이곳에 위치한 세르비아가 독립을 했지요. 세르비아는 주변 지역을 하나로 합쳐 국가를 세우려 했어요.
하지만 1908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 주변 지역인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차지해 버렸어요. 이에 화가 난 한 세르비아 청년이 1914년에 사라예보(보스니아의 수도)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일이 일어났어요. 이것이 바로 사라예보 사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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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의 암살 장면
1914년, 오스트리아는 사라예보 사건을 이유로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어요. 그러자 슬라브족 나라인 러시아가 세르비아 편에 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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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와 전투를 준비하는 세르비아 포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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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본문 이미지 1
당시 오스트리아는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 동맹'을 맺고 있었어요. 동맹의 내용은 세 나라 중 하나라도 다른 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군사를 보내 서로 돕자는 것이었지요.
한편,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 동맹 관계에 있었어요. 이것을 '삼국 협상'이라고 해요. 삼국 협상의 목적은 서로 연합해서 독일이 힘을 키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지요.
독일은 1888년에 빌헬름 2세가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었어요.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이런 독일의 움직임이 달갑지 않았지요. 특히 영국은 식민지 확보 문제로 독일과 갈등을 빚고 있었어요.
이런 배경으로 삼국 동맹의 동맹군과 삼국 협상의 연합군이 싸우게 되었어요. 이 중 삼국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는 중립을 지키다가 나중에 연합군 쪽으로 돌아섰어요. 당시 이탈리아는 영국과 싸울 힘도 없었고, 오스트리아와 영토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전 세계 제국주의 국가들이 참전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나라들은 독일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였어요.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를 이기고 세계의 초강대국이 되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프랑스를 공격하여 파리를 점령하고, 그 뒤에 러시아와 싸운다는 전략을 세웠지요.
그런데 독일의 예상과는 달리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어요. 동맹군과 연합군 모두 참호전(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서 총을 쏘며 벌이는 전투)을 펼쳐 전쟁은 더욱 길어졌지요.
한편, 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고 중국까지 넘보고 있었어요. 일본은 전쟁에 참여하여 아시아에서 세력을 넓히고 싶어서 중국에 있던 독일 기지를 점령하고 연합군 편에서 싸웠어요. 그리고 유럽과 맞닿아 있던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는 동맹군 편을 들어 싸웠지요. 이렇게 온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어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다
1915년, 독일 해군은 영국의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침몰시켰어요. 이 일로 100명이 넘는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자 미국은 독일에 항의했어요. 하지만 독일은 그 뒤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어요. 화가 난 미국은 중립을 포기하고 1917년 4월, 연합군에 참여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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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여 명이 희생된 루시타니아호 격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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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본문 이미지 2
흥미진진 전쟁 상식!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U보트
1917년, 독일은 영국으로 가는 모든 배를 공격하겠다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발표했어요. 하지만 이 작전은 오히려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결과를 불러왔지요.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의 잠수함 U보트는 큰 활약을 했어요. U보트는 영국 군함을 몇 차례나 침몰시켜 영국 해군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지요. 제1차 대전에는 독가스, 수류탄, 전투기, 탱크 등 새로운 무기가 많이 등장했는데, 잠수함도 그중 하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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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때 사용된 U보트
[네이버 지식백과]
제1차 세계 대전 - 유럽의 제국주의가 일으킨 재앙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 2014.12. 5., 양오석, 조봉현, 권성호, 서울대학교 뿌리깊은 역사나무)
가브릴로 프린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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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vrilo Princip출생사망성별국적경력직업
형무소에서 찍은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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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7월 2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오블랴이 (현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제10주 보산스코그라호보 오블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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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4월 28일(23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헤미아 테레진 (현재의 체코 테레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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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
사라예보 사건의 당사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과 조피 초테크 폰 호엔베르크 여공작 부부를 암살함 | |
암살자 |
가브릴로 프린치프(보스니아어: Gavrilo Princip, 세르비아어: Гаврило Принцип / Gavrilo Princip, 1894년 7월 25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오블랴이(Obljaj) ~ 1918년 4월 28일 체코 테레진)는 남슬라브족의 통일을 목표로 삼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초기 생애[편집]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보산스코그라호보 인근에 위치한 오블랴이 마을에서 페타르 프린치프(Petar Princip)와 마리야 프린치프(Marija Princip, 결혼 이전의 성(姓)은 미치치(Mićić))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린치프에게는 9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6명의 형제가 유아 시절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세르비아 정교회 주교는 병약한 프린치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대천사 가브리엘에서 이름을 딴 "가브릴로"(Gavrilo)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프린치프의 부모는 무슬림 대지주 밑에서 일하던 빈농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였던 페타르는 청년 시절에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봉기에 가담했지만, 봉기 이후의 삶이 어려워지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보스니아 북서부에서 달마티아로 물자를 수송하는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1903년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낸 프린치프는 교장으로부터 세르비아어 서사시를 선물로 받았다. 13세 시절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관학교로 입학시키려는 형 요반(Jovan)의 요구에 따라 사라예보로 이주하게 된다. 그렇지만 요반은 동생을 사관학교로 입학시키려던 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상업학교에 입학했다. 요반은 삼림 벌채 공장에서 일하면서 얻은 수입으로 동생의 수업료를 지불했다.
1910년에 프린치프는 고향으로 귀환하면서 김나지움에 진학했다. 프린치프는 1910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독을 역임하고 있던 마리얀 바레샤닌(Marijan Varešanin)의 암살을 시도한 혐의로 처형된 보그단 제라이치(Bogdan Žerajić)의 영향을 받으면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심취하게 된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운동[편집]
프린치프는 1911년부터 세르비아 육군 장교들이 결성한 비밀 결사 조직인 흑수단, 보스니아의 범슬라브주의 혁명 조직인 청년 보스니아 대원으로 활동했다. 이들 단체는 범슬라브주의의 한 갈래로 나온 남슬라브주의 운동을 주장했다. 남슬라브주의 운동은 1878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세르비아 왕국이 주도하였으며 남슬라브족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 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878년에 체결된 베를린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점령 상태에 놓이게 된다. 1908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을 설립했다.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인 프린치프를 비롯한 남슬라브주의자들은 보스니아가 독립하여 세르비아와 합치는 것을 원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부추기는 세르비아를 제지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1912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최한 혐의로 김나지움에서 퇴학당했다. 프린치프는 사라예보에서 280km 정도 떨어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를 도보로 횡단했다. 프린치프는 흑수단의 게릴라 활동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키가 기준에 미달해서 거부당하고 만다. 실의에 빠진 프린치프는 사라예보에 있던 동생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프린치프는 청년 세르비아 대원 15명과 함께 훈련소에서 암살, 폭탄 제조 훈련을 받았고, 나중에 베오그라드로 귀환하게 된다.
사라예보 사건[편집]
흑수단 대원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추정상속인이었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과 그의 아내인 조피 초테크 폰 호엔베르크 여공작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14년 6월 28일에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군사 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프린치프의 동료였던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타고 있던 차량에 수류탄을 던졌는데 차량 밑에 떨어진 수류탄이 터지면서 16명이 중상을 입었다. 차브리노비치가 수류탄을 던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린치프는 라틴 교 인근에 위치한 거리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권총으로 저격하여 암살했다. 프린치프는 사이안화물 성분이 들어간 캡슐을 삼키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독약이 불량품이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뒤를 이어 권총 자살을 시도했지만 발포하기 직전에 군중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당국은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세르비아 당국에 세르비아 영토 내에서 사건의 수사를 하게 해달라는 등의 요구를 담긴 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락한다고 밝혔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프린치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당국으로부터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범행 당시에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고, 법원으로부터 징역 20년을 선고받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전에 테레진 감옥에서 25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했다.
가브릴로 프린치프(보스니아어: Gavrilo Princip, 세르비아어: Гаврило Принцип / Gavrilo Princip, 1894년 7월 25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오블랴이(Obljaj) ~ 1918년 4월 28일 체코 테레진)는 남슬라브족의 통일을 목표로 삼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초기 생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보산스코그라호보 인근에 위치한 오블랴이 마을에서 페타르 프린치프(Petar Princip)와 마리야 프린치프(Marija Princip, 결혼 이전의 성(姓)은 미치치(Mićić))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린치프에게는 9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6명의 형제가 유아 시절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세르비아 정교회 주교는 병약한 프린치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대천사 가브리엘에서 이름을 딴 "가브릴로"(Gavrilo)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프린치프의 부모는 무슬림 대지주 밑에서 일하던 빈농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였던 페타르는 청년 시절에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봉기에 가담했지만, 봉기 이후의 삶이 어려워지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보스니아 북서부에서 달마티아로 물자를 수송하는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1903년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낸 프린치프는 교장으로부터 세르비아어 서사시를 선물로 받았다. 13세 시절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관학교로 입학시키려는 형 요반(Jovan)의 요구에 따라 사라예보로 이주하게 된다. 그렇지만 요반은 동생을 사관학교로 입학시키려던 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상업학교에 입학했다. 요반은 삼림 벌채 공장에서 일하면서 얻은 수입으로 동생의 수업료를 지불했다.
1910년에 프린치프는 고향으로 귀환하면서 김나지움에 진학했다. 프린치프는 1910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독을 역임하고 있던 마리얀 바레샤닌(Marijan Varešanin)의 암살을 시도한 혐의로 처형된 보그단 제라이치(Bogdan Žerajić)의 영향을 받으면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심취하게 된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운동
프린치프는 1911년부터 세르비아 육군 장교들이 결성한 비밀 결사 조직인 흑수단, 보스니아의 범슬라브주의 혁명 조직인 청년 보스니아 대원으로 활동했다. 이들 단체는 범슬라브주의의 한 갈래로 나온 남슬라브주의 운동을 주장했다. 남슬라브주의 운동은 1878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세르비아 왕국이 주도하였으며 남슬라브족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 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878년에 체결된 베를린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점령 상태에 놓이게 된다. 1908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을 설립했다.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인 프린치프를 비롯한 남슬라브주의자들은 보스니아가 독립하여 세르비아와 합치는 것을 원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부추기는 세르비아를 제지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1912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최한 혐의로 김나지움에서 퇴학당했다. 프린치프는 사라예보에서 280km 정도 떨어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를 도보로 횡단했다. 프린치프는 흑수단의 게릴라 활동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키가 기준에 미달해서 거부당하고 만다. 실의에 빠진 프린치프는 사라예보에 있던 동생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프린치프는 청년 세르비아 대원 15명과 함께 훈련소에서 암살, 폭탄 제조 훈련을 받았고, 나중에 베오그라드로 귀환하게 된다.
사라예보 사건
흑수단 대원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추정상속인이었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과 그의 아내인 조피 초테크 폰 호엔베르크 여공작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14년 6월 28일에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군사 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프린치프의 동료였던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타고 있던 차량에 수류탄을 던졌는데 차량 밑에 떨어진 수류탄이 터지면서 16명이 중상을 입었다. 차브리노비치가 수류탄을 던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린치프는 라틴 교 인근에 위치한 거리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권총으로 저격하여 암살했다. 프린치프는 사이안화물 성분이 들어간 캡슐을 삼키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독약이 불량품이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뒤를 이어 권총 자살을 시도했지만 발포하기 직전에 군중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당국은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세르비아 당국에 세르비아 영토 내에서 사건의 수사를 하게 해달라는 등의 요구를 담긴 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락한다고 밝혔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프린치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당국으로부터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범행 당시에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고, 법원으로부터 징역 20년을 선고받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전에 테레진 감옥에서 25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했다.
출처: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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