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과 반역》-한국전의 진정한 영웅, 일본군지원병 출신들의 숨겨진 공적을 발굴한 책
趙甲濟
몇 년 전 애국활동가 모임이 6·25 동란 65주년을 맞아 故 李大鎔 장군을 초청, 강연을 들었다. 육사 7기 출신인 그는 남침 때 춘천을 사흘간 방어, 북한군의 전략을 흐트러놓은 6사단(사단장 金鐘五 대령)의 핵심인 7연대(연대장 林富澤 중령) 소속 중대장이었다. 李 중대장은 북진 때는 맨처음 압록강(초산 북방, 1951년 10월 하순)에 도달, 새파란 강물을 떠서 李承晩 대통령에게 보낸 이였다. 그때는 남북통일이 다 되었다고 믿었다고 한다. 압록강을 너머 만주 땅을 바라보면서 사흘간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 사흘간 자신만의 남북통일을 경험한 사람이다.
李 장군은 1975년 4월 사이공이 월맹군에 함락되자 탈출하지 못한 교민들과 함께 남았다가 5년간 옥살이를 하면서도 회유와 압박에 굴하지 않고 버티었다. 朴正熙 대통령의 특명에 따른 막후의 외교 교섭으로 1980년에 귀국하였다. 한국전에서 가장 잘 싸운 일선 지휘관중 한 분으로 꼽히는 그는 "6사단이 사흘간 춘천을 지켜낸 덕분에 국군이 서울 지역에서 포위되어 일망타진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
북한군 2군단(2개 사단)은 6월25일 당일에 춘천을 점령한 다음 덕소 부근에서 남한강을 너머 이천, 여주, 수원 지역으로 진출, 한강을 너머 남쪽으로 후퇴하는 국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춘천에서 3일간 지체하는 바람에 포위망을 만드는 데 실패하였다. 국군은 한강 남쪽에서 재정비, 싸우면서 후퇴할 수 있었다.
이대용 장군은 "춘천전투 때 내 밑에 있었던 소대장 네 명은 그 뒤 다른 전투에서 모두 戰死하였고, 상관이던 김용배 대대장도 전사, 나만 살아 남은 꼴이 되었다"고 했다. "전쟁에선 용감한 자는 죽고 비겁자는 살아 남는다는 말이 있다"고 덧붙였다.
李大鎔 장군은 월간조선과 한 인터뷰에서 6사단이 기습을 받고도 승리할 수 있었던 原因(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로 설명한 적이 있다.
『첫째, 有備無患(유비무환)의 원칙에 충실했다. 북한군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연대장의 지휘하에 壕(호)를 파기 시작했다. 춘천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이 일을 도왔다. 진지점령 훈련도 되풀이했다.
둘째, 공세적 방어로 대처했다. 6·25가 나기 전에 38선상에서 인민군과 전투를 해 보았고 이를 통해 「인민군도 별게 아니다」라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인민군이 대거 몰려내려 왔어도 겁을 먹지 않았다. 특히 7연대 2대대 사병들은 西北(서북) 청년 출신들이 많아 북괴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다. 공세적 방어로 최대의 전과를 올린 것이 옥산포 전투였다.
셋째, 砲兵(포병)의 화력 효과가 컸다. 인민군은 사람이 없는 곳에도 무작정 포를 쏴대었던 반면, 우리 포병부대는 전선의 가장 가까운 곳에까지 가서 포격을 했다. 그만큼 효과적이었고 낭비가 없었다.
넷째, 연대장(林富澤 중령)의 지휘통솔력이 탁월했다. 평소 사병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고 따뜻하게 보살폈는데 전투가 벌어지자 후방으로 빠져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최일선에 나와 독려했다. 존경하는 연대장이 포탄이 쏟아지는 戰場(전장)에 의연히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병들의 士氣(사기)는 백배 올라갔다.
다섯째, 地形(지형)의 유리함을 최대한 이용했다. 특히 강원도 지역은 산악지형이라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의 기동전은 그 효력이 반감된다. 우리 군은 이같은 利點(이점)을 십분 활용, 適材適所(적재적소)에 병력을 배치하고 기습전을 반복했기 때문에 소규모의 공격으로도 적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전쟁에선 우연이나 運이 통하지 않는다. 실력만이 통하는데 실력의 핵심은 준비와 훈련이다. 춘천대첩이라 불리는 이 전투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서울포위 3일 전쟁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미군 등 유엔군이 상륙, 반격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임부택 장군(중장까지 승진)은 자유세계를 구한 영웅으로 평가할 만하다. 역사적 영향력에서 춘천대첩은 한산대첩과 비교된다.
연대장 임부택은 일제 때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던 일본군 육군특별지원병 출신이다. 전남 나주 출생으로 1939년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훈련소를 졸업하고, 훈련교관으로 해방을 맞았다. 상사에 해당하는 조장이었다. 1946년 5월 조선경비사관학교 1기로 들어가 대한민국 국군 초급장교로 임관되었고 대대장으로 제주 4·3사건 진압에 투입되었다.
일본군으로부터 배운 군사기술을 공산군 쳐부수는 데 사용하였던 임부택 같은 지원병은 약 1만 7000명이고 이들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서 전투경험을 쌓았으며, 건국 전후의 創軍에 참여, 86명의 장성을 배출하였다. 송요찬, 최경록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용산 전쟁기념관을 지은 책임자인 故이병형 중장도 지원병 출신이다.
이들은 투철한 국가관과 군인정신, 그리고 반공의식으로 무장, 한국전 때 實戰에서 가장 잘 싸운 장교들로 평가된다. 나라가 없을 때 일본군의 일원으로 천황에게 충성하는 민족반역의 길을 선택했으나 대한민국이 서자 일본군 복무 시절 익혔던 정신력을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전환시켜 누란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했던 것이다. 민족반역을 덮고도 남을 국가에 대한 충성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지원병 출신었다는 점만 부각시켜 애써 평가절하 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鄭安基 박사가 조갑제닷컴을 통하여 최근 출판한 '충성과 반역'은 590페이지에 이르는 大作이다. 육군특별지원병 출신들의 가정형편, 지원동기, 전투경력, 역사적 역할을 최초로 정리, 평가, 한국전의 진정한 영웅들에게 마땅한 자리매김을 해준 책이다.
*1938~1943년 사이 실시된 육군특별지원병 모집에는 46 대 1의 경쟁을 기록하여 1만7000명이 뽑혔다. 이들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였다. 모두가 보통학교 졸업자들이었고 대체로 常民 출신이고 차남이 많았다.
*이들은 일본제국과 대한민국, 즉 두 개의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거나 목숨을 걸었다.
*일본 육사, 만주 군관학교, 일제 학병출신과 함께 創軍의 4대 인맥을 형성하였다.
*조선인 사회에선 민족적 자치능력을 기른다는 측면에서 이 지원병 제도를 요구하고 환영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육군특별지원병을 지원한다는 것은 한 개인의 입장에선 죽기 아니면 살기의 가혹한 결단이었다. 이런 사생결단을 두고 강제동원으로 치부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지극히 단순화하고 왜곡하는 것이다."(著者 鄭安基)
*대표적인 지원병 출신 한국군 장성인 함병선은 일본군 공정부대 출신이다. 준위로 해방을 맞았다. 버마,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뉴기니에서 작전했다. 공수부대, 즉 정진단 소속 1만4000명 가운데 85.7%인 1만2000명이 戰死(전사)하였다. 그는 이런 實戰(실전)경험으로 한국전에서 북한 공산군과 싸웠다. 북한 공산군 장교들 중엔 소수의 소련군 출신과 함께 모택동 군대 출신이 많았다. 모택동 군대에 비교하여 일본군은 월등한 전투력을 가졌다. 그런 일본군 출신의 한국군 장교들이 한국전의 실전에서 더 우세하였을 것이다.
*지원병 출신들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일본군 제19사단은 1944년 12월 필리핀 루손 섬에서 작전했다. 사단 병력 1만2328명 중 66.8%인 8233명이 전사하였다. 조선인 지원병은 1888명 중 941명이 전사하였다. 49.8%. 이런 경험이 북한국을 쳐부수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전쟁 경험을 통하여 국가의 적과 싸우는 국민으로 鑄造(주조)되었다. 일제에 대한 충성심은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자연스럽게 조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갈등없이 전환되었다. 북한공산집단이란 사대주의적 반역집단으로부터 조국을 지킨다는 것은 이들의 의무요 명예였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저자는 이렇게 썼다.
<1938년 이래 조선인들은 근대국가의 국민이라는 '하나의 정치적 다발'로 묶여지는 '정치적 유대 결속'을 경험하면서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제대로 된 국민됨을 준비하였다. 국가의 목적에 대한 자발적 참여와 희생을 미덕으로 하는 근대국가의 국민으로 주조되었다. 그리하여 6·25 전쟁 때는 민족에 대하여서도 잔혹한 살인의 정열을 불태울 수 있었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 국민국가 건립을 위한 한국 사회의 뜨거운 열망은 조선인들이 1910년 한일병합 당시의 안온무사하고 오불관언한 백성 혹은 인간부스러기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貫戰期(관전기)를 거치면서 국민화의 열병에 감염된 근대국가의 정치적 주체로 변질해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국가 국민으로서의 재탄생이었다.
*요약하면 지원병 출신은 국가가 없을 때 민족반역을 감행하여 日帝(일제)에 충성하였지만 그래서 배운 군사기술과 정신력 및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진짜 조국이 등장하자 그곳을 향하여 쏟아부어 나라를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지켜냈다는 이야기이다. 이들이 숨겨진 진짜 영웅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들을 "검은 역사의 살아 있는 유령들"이라고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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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애국활동가 모임이 6·25 동란 65주년을 맞아 故 李大鎔 장군을 초청, 강연을 들었다. 육사 7기 출신인 그는 남침 때 춘천을 사흘간 방어, 북한군의 전략을 흐트러놓은 6사단(사단장 金鐘五 대령)의 핵심인 7연대(연대장 林富澤 중령) 소속 중대장이었다. 李 중대장은 북진 때는 맨처음 압록강(초산 북방, 1951년 10월 하순)에 도달, 새파란 강물을 떠서 李承晩 대통령에게 보낸 이였다. 그때는 남북통일이 다 되었다고 믿었다고 한다. 압록강을 너머 만주 땅을 바라보면서 사흘간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 사흘간 자신만의 남북통일을 경험한 사람이다.
李 장군은 1975년 4월 사이공이 월맹군에 함락되자 탈출하지 못한 교민들과 함께 남았다가 5년간 옥살이를 하면서도 회유와 압박에 굴하지 않고 버티었다. 朴正熙 대통령의 특명에 따른 막후의 외교 교섭으로 1980년에 귀국하였다. 한국전에서 가장 잘 싸운 일선 지휘관중 한 분으로 꼽히는 그는 "6사단이 사흘간 춘천을 지켜낸 덕분에 국군이 서울 지역에서 포위되어 일망타진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
북한군 2군단(2개 사단)은 6월25일 당일에 춘천을 점령한 다음 덕소 부근에서 남한강을 너머 이천, 여주, 수원 지역으로 진출, 한강을 너머 남쪽으로 후퇴하는 국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춘천에서 3일간 지체하는 바람에 포위망을 만드는 데 실패하였다. 국군은 한강 남쪽에서 재정비, 싸우면서 후퇴할 수 있었다.
이대용 장군은 "춘천전투 때 내 밑에 있었던 소대장 네 명은 그 뒤 다른 전투에서 모두 戰死하였고, 상관이던 김용배 대대장도 전사, 나만 살아 남은 꼴이 되었다"고 했다. "전쟁에선 용감한 자는 죽고 비겁자는 살아 남는다는 말이 있다"고 덧붙였다.
李大鎔 장군은 월간조선과 한 인터뷰에서 6사단이 기습을 받고도 승리할 수 있었던 原因(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로 설명한 적이 있다.
『첫째, 有備無患(유비무환)의 원칙에 충실했다. 북한군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연대장의 지휘하에 壕(호)를 파기 시작했다. 춘천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이 일을 도왔다. 진지점령 훈련도 되풀이했다.
둘째, 공세적 방어로 대처했다. 6·25가 나기 전에 38선상에서 인민군과 전투를 해 보았고 이를 통해 「인민군도 별게 아니다」라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인민군이 대거 몰려내려 왔어도 겁을 먹지 않았다. 특히 7연대 2대대 사병들은 西北(서북) 청년 출신들이 많아 북괴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다. 공세적 방어로 최대의 전과를 올린 것이 옥산포 전투였다.
셋째, 砲兵(포병)의 화력 효과가 컸다. 인민군은 사람이 없는 곳에도 무작정 포를 쏴대었던 반면, 우리 포병부대는 전선의 가장 가까운 곳에까지 가서 포격을 했다. 그만큼 효과적이었고 낭비가 없었다.
넷째, 연대장(林富澤 중령)의 지휘통솔력이 탁월했다. 평소 사병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고 따뜻하게 보살폈는데 전투가 벌어지자 후방으로 빠져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최일선에 나와 독려했다. 존경하는 연대장이 포탄이 쏟아지는 戰場(전장)에 의연히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병들의 士氣(사기)는 백배 올라갔다.
다섯째, 地形(지형)의 유리함을 최대한 이용했다. 특히 강원도 지역은 산악지형이라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의 기동전은 그 효력이 반감된다. 우리 군은 이같은 利點(이점)을 십분 활용, 適材適所(적재적소)에 병력을 배치하고 기습전을 반복했기 때문에 소규모의 공격으로도 적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전쟁에선 우연이나 運이 통하지 않는다. 실력만이 통하는데 실력의 핵심은 준비와 훈련이다. 춘천대첩이라 불리는 이 전투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서울포위 3일 전쟁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미군 등 유엔군이 상륙, 반격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임부택 장군(중장까지 승진)은 자유세계를 구한 영웅으로 평가할 만하다. 역사적 영향력에서 춘천대첩은 한산대첩과 비교된다.
연대장 임부택은 일제 때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던 일본군 육군특별지원병 출신이다. 전남 나주 출생으로 1939년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훈련소를 졸업하고, 훈련교관으로 해방을 맞았다. 상사에 해당하는 조장이었다. 1946년 5월 조선경비사관학교 1기로 들어가 대한민국 국군 초급장교로 임관되었고 대대장으로 제주 4·3사건 진압에 투입되었다.
일본군으로부터 배운 군사기술을 공산군 쳐부수는 데 사용하였던 임부택 같은 지원병은 약 1만 7000명이고 이들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서 전투경험을 쌓았으며, 건국 전후의 創軍에 참여, 86명의 장성을 배출하였다. 송요찬, 최경록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용산 전쟁기념관을 지은 책임자인 故이병형 중장도 지원병 출신이다.
이들은 투철한 국가관과 군인정신, 그리고 반공의식으로 무장, 한국전 때 實戰에서 가장 잘 싸운 장교들로 평가된다. 나라가 없을 때 일본군의 일원으로 천황에게 충성하는 민족반역의 길을 선택했으나 대한민국이 서자 일본군 복무 시절 익혔던 정신력을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전환시켜 누란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했던 것이다. 민족반역을 덮고도 남을 국가에 대한 충성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지원병 출신었다는 점만 부각시켜 애써 평가절하 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鄭安基 박사가 조갑제닷컴을 통하여 최근 출판한 '충성과 반역'은 590페이지에 이르는 大作이다. 육군특별지원병 출신들의 가정형편, 지원동기, 전투경력, 역사적 역할을 최초로 정리, 평가, 한국전의 진정한 영웅들에게 마땅한 자리매김을 해준 책이다.
*1938~1943년 사이 실시된 육군특별지원병 모집에는 46 대 1의 경쟁을 기록하여 1만7000명이 뽑혔다. 이들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였다. 모두가 보통학교 졸업자들이었고 대체로 常民 출신이고 차남이 많았다.
*이들은 일본제국과 대한민국, 즉 두 개의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거나 목숨을 걸었다.
*일본 육사, 만주 군관학교, 일제 학병출신과 함께 創軍의 4대 인맥을 형성하였다.
*조선인 사회에선 민족적 자치능력을 기른다는 측면에서 이 지원병 제도를 요구하고 환영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육군특별지원병을 지원한다는 것은 한 개인의 입장에선 죽기 아니면 살기의 가혹한 결단이었다. 이런 사생결단을 두고 강제동원으로 치부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지극히 단순화하고 왜곡하는 것이다."(著者 鄭安基)
*대표적인 지원병 출신 한국군 장성인 함병선은 일본군 공정부대 출신이다. 준위로 해방을 맞았다. 버마,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뉴기니에서 작전했다. 공수부대, 즉 정진단 소속 1만4000명 가운데 85.7%인 1만2000명이 戰死(전사)하였다. 그는 이런 實戰(실전)경험으로 한국전에서 북한 공산군과 싸웠다. 북한 공산군 장교들 중엔 소수의 소련군 출신과 함께 모택동 군대 출신이 많았다. 모택동 군대에 비교하여 일본군은 월등한 전투력을 가졌다. 그런 일본군 출신의 한국군 장교들이 한국전의 실전에서 더 우세하였을 것이다.
*지원병 출신들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일본군 제19사단은 1944년 12월 필리핀 루손 섬에서 작전했다. 사단 병력 1만2328명 중 66.8%인 8233명이 전사하였다. 조선인 지원병은 1888명 중 941명이 전사하였다. 49.8%. 이런 경험이 북한국을 쳐부수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전쟁 경험을 통하여 국가의 적과 싸우는 국민으로 鑄造(주조)되었다. 일제에 대한 충성심은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자연스럽게 조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갈등없이 전환되었다. 북한공산집단이란 사대주의적 반역집단으로부터 조국을 지킨다는 것은 이들의 의무요 명예였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저자는 이렇게 썼다.
<1938년 이래 조선인들은 근대국가의 국민이라는 '하나의 정치적 다발'로 묶여지는 '정치적 유대 결속'을 경험하면서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제대로 된 국민됨을 준비하였다. 국가의 목적에 대한 자발적 참여와 희생을 미덕으로 하는 근대국가의 국민으로 주조되었다. 그리하여 6·25 전쟁 때는 민족에 대하여서도 잔혹한 살인의 정열을 불태울 수 있었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 국민국가 건립을 위한 한국 사회의 뜨거운 열망은 조선인들이 1910년 한일병합 당시의 안온무사하고 오불관언한 백성 혹은 인간부스러기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貫戰期(관전기)를 거치면서 국민화의 열병에 감염된 근대국가의 정치적 주체로 변질해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국가 국민으로서의 재탄생이었다.
*요약하면 지원병 출신은 국가가 없을 때 민족반역을 감행하여 日帝(일제)에 충성하였지만 그래서 배운 군사기술과 정신력 및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진짜 조국이 등장하자 그곳을 향하여 쏟아부어 나라를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지켜냈다는 이야기이다. 이들이 숨겨진 진짜 영웅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들을 "검은 역사의 살아 있는 유령들"이라고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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