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3日天下의 主役/ 金玉均의 죽음

marineset 2023. 5. 27. 02:48
김옥균은 실패한 이상주의자



사람이 일생을 사는 동안 어떤 사람을 만나 그로부터 잊을 수 없는 가르침을 받아 평생 가슴에 새기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도 젊었을 적에 만났던 그런 분이 있었다. 연세대 신학대학장을 지내신 지동식 (池東植) 박사님이다. 어느 해 그분께서 노환으로 임종이 가까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서둘러 경기 고양 화전(花田)의 댁으로 그 분을 찾아뵈었다.

병석의 그 분(목사님)은 나에게 교회 잘 다니라고 유언하실 줄 알았더니 그런 말씀은 입밖에도 꺼내지 않으시고, “인간은 그릇에 넘치게 물을담을 수 없다. 그러니 너는 훗날 그릇이 작아 물이 넘치는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젊은 날에 그릇을 크게 하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 말씀이 내게는 유언이 되었고, 나는 이제까지 그 말씀을 가슴에새기며 산다.

공자(孔子)께서도 인물을 평가하는 일은 삼가셨지만, 역사가는 불가피하게 그런 악역을 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그릇이 얼마나 컸던지를 측정하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이나지위를 스스로 차지할 능력은 없지만 그것을 맡겨주면 능히 해낼 수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만한 지위에 오를 수는 있지만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혁명가-친일파 평가 극대극▼

높은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대표적 인물로 김옥균(1851∼1894)을 들 수 있다. 그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좋고 싫어함이 판이하다.

그를 개화기의 뛰어난 인물로 보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한낱 친일의 무리로 비하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김옥균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의 이념이나 공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 그릇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훨씬더 교훈적인 답을 얻을 수 있다.

그가 난세에 태어나 일세를 풍미했으니 영웅임에는 틀림없겠지만 과연 후대에게 긍정적인 교훈과 업적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부정적이다.

김옥균은 안동 김씨의 후예로 공주에서 태어났으나 강릉 부사와 형조참의를 지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가 되어 강릉과 서울에서 자랐다. 그는 사람을 사귀는 데 능해 위로는 정승 판서로부터 아래로는 시정 잡배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람들을 사귀었다.

좌의정을 지낸 박규수(朴珪壽)나 백의정승 유대치(劉大致)에게서 학문을 전수 받고, 영의정의 아들인 홍영식(洪英植)이나 철종의 부마 박영효(朴泳孝)와 교유(交遊)했다는 점이 그의 만남의 줄기를 이루고 있다.

김옥균은 일생에 네 번 일본을 방문해 개명 지식인인 게이오대학(慶應大學)의 창설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만난 것이 인생 행로에 중요한 고비가 되었다.

김옥균은 세속적으로 말한다면 가무, 음주, 주색잡기에 능치 않음이 없었고, 서예는 망명지에서 생활비를 조달할 정도였으며, 바둑은 일본 바둑사에 기록될 정도였다. 혁명의 주역으로 갑신정변에 성공한 뒤에도 그는 스스로 이조참판에 머물렀다. 이는 그가 무욕(無慾)의 불심(佛心)에 달관했음을 뜻하는 것이니 실로 가상한 일이다.

▼日 다녀오며 개화사상 눈떠▼

그러나 경륜이라는 점에서 김옥균을 칭송하기가 어렵다. 스무 살 남짓한 대원 스물 몇 명으로 혁명을 성사하려 했던 무모함에 대한 비난을 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지들은 투옥 당하고 멸문(滅門)의 화를 겪는데 자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함께 하며 조국을 위해싸우겠다던 동지로서의 의리가 아니었다.

그는 사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지각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결국 북태평양 고도(孤島) 오가사하라시마(小笠原島)와, 북해도의 삿포로(札榥)에 갇힌 몸이 되었다.

김옥균의 실수는 지나친 대일 의존책에 있었다. 그는 조국을 위해 신명을 바치자고 약속했던 민영익(閔泳翊)보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 진이치로(竹慘進一郞)를 더 믿었다. 일본의 배신이 얼마나 처절했던지를 뼈저리게 느꼈을 때 그의 후회는 이미 늦었다. 진심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의 그릇된 판단이 일본의 한국 침략에 이바지했다는 점은 틀림없다.

김옥균은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혁명이 실패하자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던 망명지의 생활은 삶과 죽음 사이의 유희 같은 것이었다.

김옥균이 일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조선의 수구파는 자객 네 사람을 파견하였으니 장은규(張殷圭)·지운영(池運英)·이일직(李逸稙) 그리고 홍종우(洪種宇)가 바로 그들이다. 김옥균은 그들을 결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들을 이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들 중의 누구도 자기를 죽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김옥균의 이와 같은 태도는 대담한 처사라고 평할 수도 있으나 달리 말하면 오만이었다. 그가 마치 죽음을 초월해서 살다간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혁명이 실패하자 동지들과 함께 거취를 의논하던 자리에서 홍영식은 “왕의 위태로움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 말하고 왕을 지키다가 혁명의 제물이 되었지만, 김옥균은 “죽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고 망명의 길에 올랐다.

▼신변 위험 느끼자 淸 도피▼

일본에서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음을 안 김옥균은 청나라로 떠났다. 자기의 손에 맞아 죽은 수구파 대신 일곱 명이 모두 청의 하수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자신이 청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김옥균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위험은 피부에 와 닿았으므로 우선은 호랑이 굴을 벗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옥균은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이 자기에게 얼마나 절치부심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단 5분 동안만이라도 이홍장과 이야기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운명은 나의 편이 될것”이라고 호기를 부렸다. 그가 만일 이홍장을 만났다면 그의 꿈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홍장을 만나기 전에 자객 홍종우에 의해 자신의 운명이 끝나리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김옥균은 서른 세 살에 망명의 길을 떠난 날로부터 정확히 10년을 더 살 수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에 이뤄놓은 것은 없고 다만 욕스러움만 있었으니 그의 망명은 헛된 것이었다.

그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료 친지 혈육과 운명을 함께 했어야 했다. 서른 셋이면 그의 말처럼 죽기에는 어리석고 아까운 나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면 그 세월이 그다지 짧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도, 알렉산더도, 그리고 이봉창(李奉昌)도 서른 세 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은 모두 할 일은 했다.

김옥균은 끝내 청나라 상하이의 여관방에서 홍종우에 의해 총을 맞는다. 주검은 조선으로 돌아와 강변에서 찢겼으며 문중에서는 그의 항렬인 균(均)자를 규(圭)자로 바꾸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

▼"재주 비상했으나 그릇 작아"▼

김옥균이 죽자 평소에 그를 아끼던 사람들이 그의 머리카락만으로 일본에 무덤을 세웠고 유길준(兪吉濬)은 ‘슬프다! 비상한 재주를 품고, 비상한 시대에 태어났으나, 비상한 공을 이루지도 못한 채, 비상한 죽음을 당했다’고 조문을 썼다.

김옥균은 비범했음에는 틀림없으나 결국 재승박덕(才勝薄德)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릇에 넘치게 물을 담으려 했다. 그것은 허욕이고 오만이었다. 이러한 실수는 한 사람의 불행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역사를 누란(累卵)의 위기로 몰아 넣었다. 김옥균은 우리의 자식들이 읽을 영웅전의 주인공은 결코 아니다.

신복룡(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동아일보 2001-07-20 18:47]








[연이은 자객과 암살 | 한국사]

김옥균을 제거하려는 조선 자객은 그의 목숨을 노리고 끊임없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제일
먼저 온 사람은 장은규인데 "옥균이 자유당 계열 무사들과 결탁하여 조선을 침공하려 한다"
는 소문을 퍼뜨려서 이른바 '오사카 사건'을 일으켰을 뿐 김옥균의 신변에 위해를 가하지
는 못했다. 이 사건이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그에게 일본을 떠나달라고 요
청하였지만 빈곤한 조선 망명객 처지에 일본 이외의 어떤 나라에도 가기가 쉬운 일이 아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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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運永(1852-1935)

본관 충주. 호 설봉(雪峰) ·백련(百蓮). 1884년(고종 21) 통리군국아문주사(統理軍國衙門主事)가 되고, 1886년 사대당 정부의 극비지령을 받아 특차도해포적사(特差渡海捕賊使)로서 도일, 도쿄[東京] ·요코하마[橫濱] 등지에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의 암살을 꾀하다 일본경찰에 잡혀 비밀문서 ·비수 등은 압수당하고 본국에 압송, 영변으로 유배되었다. 1889년 풀려나와 운영(雲英)으로 개명하고 은둔생활을 했다. 유 ·불 ·선에 통달했고, 시 ·서 ·화에도 뛰어나 삼절로 불리었다. 글씨는 해서에, 그림은 산수 ·인물에 능했다. 주요작품에 《후적벽부도》 《신선도》 등이 있다.

종두법을 도입한 지석영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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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여...>

두 번째 자객으로는 지운영이라는 사람이 왔다. 이 자는 김옥균의 역공작에 휘말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옥균은 이 사실을 거론하며 외무대신 이노우에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
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본 신문에 보도되자 일본 정부는 지운영을 조선에
송환하고 김옥균을 일본과 조선의 우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야마켄 내무대신 명의로 공
식정인 국외 퇴거를 명했다. 김옥균은 이에 항의하며 이노우에를 상대로 한 문서를 공표하
고 일본 신문에 고종에게 보내는 장문의 상소와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 앞으로 사건의 책임
을 따지는 공개 서한을 게재하였다.
이렇게 김옥균으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큰 문제가 계속 발생하자 일본정부는 1886년 7월에
그를 오가사와라 섬에 강제 연금시켜 버렸다. 그로서는 일본으로부터 다섯 번째 배신을 맛
보게 된 것이다. 오가사와라에 동행한 동지는 이윤과 한 사람뿐으로 이 고도에서 그는 2년
동안 실의의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습한 기후와 악조건을 견디지 못하여 연금 해제를 탄
원하자 1888년에 북해도로 이송되었다가 1890년에야 겨우 풀려나올 수 있었다. 오가사와라
섬에서는 소일 삼아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때 만난 와다라는 청년이 그를 추
종하여 상해에서 죽음의 순간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연금에서 해방되고 도쿄로 돌아온 그는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보내다가 마지막 승부를 걸
기 위해 청국으로 들어가 실권자 이홍장과 담판을 짓기로 했다. 이는 마침 주일 공사로 새
로 부임한 이홍장의 아들 이경방이 자신의 아버지가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서신을 건네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의 거듭된 재기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아직도 조선
에 영향력이 큰 청국의 실권자를 만나서 협조를 얻어보려는 의도였지만 그것은 외세의 도움
을 받지 않고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었던 날개 꺾인 조선 지식인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었
다. 청국행을 결심한 그는 백방으로 여비 조달을 위해 노력하던 차에 오사카의 한 후원자에
게서 경비를 협조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동료들은 그의 신변을 걱정해서 비밀리
에 운신하고 여러 명의 수행원과 함께 가도록 권했으나 그는 와다와 심부름 역할을 할 수
있는 또 한 사람만 데리고 떠났다. 그런데 오사카 역에 도착하자 의외의 마중객이 나와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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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 [그해오늘은] 후작과 자작


1894년 오늘 상하이에서 김옥균(金玉均)을 죽인 홍종우(洪鍾宇)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무렵 일본에서 박영효(朴泳孝)를 죽이려다 실패한 이일직(李逸稙)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일직이 홍종우보다 자객으로서 위라는 사실은 더욱 알려지지 않았다.
1892년 일본에 간 이일직은 민씨의 척신인 병조판서 민영소(閔泳韶)의 지령을 받고 김옥균 등을 죽이는 팀장 같은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에 머물던 홍종우는 이듬해 귀국길에 일본에 들렀다가 그에게 포섭된다.

여기서 자객들의 서열을 새삼 말하고 싶지는 않다. 성공한 거사건 실패한 거사건 한말의 어두운 이야기임에는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자객들을 가운데 두고 대척점에 있던 박영효와 민영소가 훗날 일본으로부터 나란히 후작과 자작의 작위를 받은 것은 새삼 눈길을 끈다.

여기서 박영효가 작위를 받은 것은 크게 놀랍지 않다. 박영효만이 아니라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개화파'인가 '친일파'인가는 그들에게 물어도 말이 엇갈릴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을 저주하던 민영소가 국망 직전인 1909년에는 신궁봉교회(神宮奉敎會)를 조직하는 등 친일에 더 앞장선 것이 눈길을 끈다. 그의 하수인의 하수인 같은 홍종우보다도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홍종우는 김옥균을 암살해 요직에 오른 뒤에도 일관되게 반일의 길을 걷는다. 친일세력에게 밀려 1903년 제주목사로 내려가서도 일어학원을 없애는 등 노선을 바꾸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훗날 독립투사의 '반일'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탐관오리로서도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스스로 목사직을 버리고 시베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간 뒤에는 행방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제삿날도 모르나 그도 김옥균처럼 이국의 고혼이 된 것은 분명하다.

세계일보 2003.03.28
양 평 (梁平)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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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여...>

조선의 자객으로서 이일직과 홍종우가 그들이었다. 이일직은, 자신은 청일 양국을 왕래하
면서 약종상을 하는 사람이고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생이며 자신의 친지라고 거짓 소개했다.
그러면서 평소부터 김옥균을 존경해 왔기 때문에 자기가 청국행 경비를 제공하겠노라고 자
칭하였다. 김옥균은 한눈에 자객임을 알아보았지만 이들을 역이용하려는 심산으로 도움을
승낙했다. 이일직은 자기가 동행하면 좋겠지만 자신은 아직 업무가 남아 일본에 더 있어야
하고 대신 홍종우가 동행하며 도와줄 것이라고 말하면서 김옥균의 의심을 줄이려고 하였다.
실은 김옥균이 상해로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 이미 작당한 권동수와 함께 박영효까지 암살
하기 위해 도쿄로 돌아간 것이지만 이들은 박영효의 기지로 체포되어 훗날 홍종우의 배후가
밝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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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양행/ 1886년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최초의 여관이다. 그 당시 상해에 거주하던 일본여성들 일부의 매춘행위가 문제시 되었는데, 동화양행은 신원이 불확실하거나 부부관계가 아닌 여성의 단독 숙박을 거절하는 안내서를 여관에 게시하였으며, 김옥균 살해사건으로 일약 유명해졌다.
김옥균은 이곳, 동화양행 2층 1호실에서 홍종우의 총에 맞아 죽으면서 10년간의 망명생활을 끝낸다.
東和洋行(旅館)
1886年、上海で最初の日本人経営による旅館・東和洋行が鉄馬路(北河南路)にオープンした。
1889年に17才の船津辰一郎(後の日本国駐上海総領事・華紡同業会総務理事に就任)が初めて長崎より上海へやって来る際に乗っていた船に、この上海東和洋行の夫妻も同乗している。同船が上海港へ入港した時、船津辰一郎は蘇州河の北岸に高々とそびえる円塔を見て、興味が尽きなかったという。その様子を見た東和洋行の夫妻は誇らしげに、あれは自分たちの旅館がある水道塔だと語った。その塔がその当時では唯一遠くから見えるシンボルだったとして彼の記憶の中に残っている。上海滞在中の4、5日間、船津は東和洋行に宿泊し、それが彼と上海との縁となり、彼がその半生を過ごす場所となった。

 1890年、上海に住む日本人女性の中に数多くの売春婦がおり、それが日本人居留民の不満となっていた。その頃、また日本人経営による旅館である常磐旅館(1888年創立・虹口南潯路)や矢野旅館(1890年8月創立・虹口百老匯路)がオープン。だが東和洋行は「丑業婦と認むべき女子の宿泊」を拒絶し、日本人のメンツを保つ一大行動をおこなう。同年10月、日本語新聞『上海新報』に「婦人は夫婦連れの外、相当の紹介なくして宿泊するを断る」と東和洋行が掲載公言したことで、同旅館の知名度が非常に高まった。

 それ以上に東和洋行の名を一躍有名にしたのは、金玉均殺害事件である。金玉均は中国・日本・朝鮮の関係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重要人物で、彼が殺された場所がこの東和洋行であり、この北河南路にある旅館が瞬く間に中国と外国の注目スポットとなった。


豊陽館の内室風景 ▶
 金玉均は朝鮮開化党党首で、1884年に日本のサポートの下、ソウルで政変を起こしたが、その後清政府が派遣した兵たちに鎮圧され、日本へと逃亡し、その後名前を変えて欧米を遊歴した。 そんな彼を早くから暗殺しようと目論んでいた朝鮮人洪鐘宇という人物がいる。金玉均が欧米より大阪へ戻ってきた時に、洪鐘宇も随行しており、彼と共に日本郵船会社の「西京丸」にて中国へと渡った。1894年3月27日、彼ら二人が上海へと降り立ち、東和洋行に宿を取った。金玉均の部屋は2階の1号室で、同じく日本より同行していた日本人北原と同部屋だった。洪鐘宇は別の1室だった。東和洋行の主人吉島徳三が金玉均に上海に来た目的などを訪ねると、彼は自分は岩田和三という名で、上海に遊びに来たと答え、洪鐘宇もまた上海の黄浦江の景色を見に来た、と答えた。 2日目の午後3時頃、早くより暗殺の準備していた洪鐘宇は朝鮮の官服に着替えると突然金玉均の部屋に飛び込んだ。この時金玉均は西側の窓辺に置いてある籐の椅子で昼寝をしていた。洪は部屋の中にいた北原に退出を命じた後、熟睡している金玉均に手にしていた銃を向け、発砲。1発目は左頬に命中。鮮血が飛び散り、狂ったように叫び声を挙げる金を、洪は更に2発打ち、そのうちの1発が肩に命中した。旅館の従業員は吉島を始め大半が1階におり、突然聞こえた銃声にびっくりしたものの、外の人間が爆竹を鳴らしたのだと解釈。3階の客たちは叫び声なども比較的はっきりと聞こえたために様子を見るために次々と下に降りてきて、詳細を見届けている。この頃には金玉均は旅館の東側の突き当たりにある五号室の前まで逃げていたが、地面に突っ伏して幾度か転げ回った揚げ句に絶命した。洪は彼を射殺した後、慌てふためいて旅館を飛びだしたため、その様子を見た吉島が怪しみ、日本領事館へと通報。だが領事は朝鮮人同士の殺し合いに関与することはない、と判断したため、吉島は更に米国租界の巡捕房(警察署)へと通報した。

 29日の早朝、洪鐘宇は呉レ。にある宿で捕まり、東和洋行に拘禁された。同日午後11時半、上海県役人・日本服領事山座・通訳加藤及英・米国租界警察官などが現場検証を行い、被害者が金玉鈞であるという証拠を押さえ、事件は解決した。

 それから数十年、東和洋行旅館の建物自体にあまり大きな変化は見られず、金玉均刺殺事件も次第に人々の記憶から薄れていった。1921年、作家の芥川龍之介が上海に来た際に、人の商会で東和洋行に宿をとったが、旅館に着いてから彼は「それからその部屋へ行つて見てると、ベッドだけは何故か2つもあるが、壁が煤けてゐて、窗挂が古びてゐて、椅子さへ満足なのは一つもなくて、・・・要するに金玉均の幽霊でもなければ、安住出来る様な明き間ぢやない。」「此処から余り遠くない万歳館へ移る事にした」と述べている。  その後、東和洋行は往文路(現・塘沽路)19号へ、更に北四川路914号(海寧路交差点)へと移転した。 。

文:陳祖恩 訳:小田可奈

著者紹介: 陳祖恩 上海社会科学院歴史研究所副研究員。 1994年から上海の日本人居留者たちの研究を始める 著書に《明治時代の上海日本人居留民》《上海日本居留民の子弟教育》《日本僑民在上海(写真集と共著)》など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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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894년 2월 말쯤 상해에 도착한 김옥균 일행은 미국 조계안에 있는 동화양행에 여장
을 풀었다. 투숙한 다음날 오후에 김옥균 일행은 거리를 구경하기로 하고 오전에는 각자 용
무를 보았다.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후 돌아온 김옥균은 피곤하다고 침대에 누우면서 와다
에게 일본에서 타고 온 배의 사무장이 마쓰모토에게 전할 일이 있으니 그를 불러오라고 했
다. 이때가 김옥균에게는 운명의 시간이 되고 말았다. 와다가 나가자 김옥균의 주위에 아무
도 없음을 눈치챈 자객 홍종우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김옥균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여 그를
절명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상해 경찰은 홍종우를 체포하고 김옥균의 사체
는 와다의 요청에 따라 일본으로 운구하기로 했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홍종우와 사체를
청국측 상해 주재 관리에게 넘겨주었다. 청국 정부는 홍종우의 범행을 조선인 상호간의 문
제라고 하여 홍종우와 사체를 다시 조선에 인계하였다. 조선에 도착한 김옥균의 사체는 상
해 및 조선 주재 외교 사절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고 말았다. 잘려
진 그의 목에는 '모반 대역부도 죄인 옥균 당일 양화진두 능지처참'이라고 쓰여진 커다란
천이 나부끼고 있었다.
이렇게 김옥균은 파란만장한 삶을 비극적으로 마쳤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44살의 한창
때였따. 독립, 자주, 자립이라는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 문벌을 폐지하고 재민 평등의 국민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그는 이역 땅에서 자기 민족의 손에의해 암살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
다. 이 비극의 개화주의자는 살해된 그 이듬해에 반역죄가 사면되고 1910년에 규장각 대제
학에 추증되었다. 그가 주도한 갑신정변은 민중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소수 지
성인들의 거사였다는 점에서 임오군란과 비교되고, 외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조선 내부의
기층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점에서 동학 농민 정쟁과 구분된다. 또 조선 왕조의 체제
자체를 변화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갑오경장과도 대별할 수 있다.

http://blog.naver.com/this8423/120007920648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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