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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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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암살, 역사를 바꾸다

입력 : 2016-08-11 21:23:55 수정 : 2016-08-11 21:23:54

 

책 ‘암살-왜곡된 현대사의 서막’ 통해 본 혼돈의 해방정국8·15 광복, 기쁨은 컸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일제라는 공통의 적이 사라진 상태에서 각 정치세력은 각개약진하며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지를 두고 격렬하게 투쟁했다. 미군, 소련군의 진주는 정세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정치 암살은 혼란의 극단적 형태였다.

‘암살 - 왜곡된 현대사의 서막’(박태균·정창현 지음, 역사인)은 현준혁,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가 희생된 5건의 암살 사건을 추적한다. 이들이 암살의 대상이 된 이유, 사건이 역사에 갖는 의미를 밝히고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했다. 책은 해방 공간의 암살 사건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분수령으로 작용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다”며 “암살사건의 배경과 배후를 추적하는 것은 이 시기 역사의 이면을 파헤칠 뿐만 아니라 통일이 아닌 분단으로 귀결된 원인을 규명하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공권력의 핵심 경찰, 암살 의혹의 중심에 서다

 

갈등의 두드러진 양상은 좌·우익의 대립이었다. 흔히 암살을 양 진영 갈등의 산물로 이해하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책은 “해방공간의 정치암살을 정치세력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며 그 근거 중 하나로 경찰이 주요 테러, 암살의 배후로 매번 거론되었다는 점을 들었다.

보수적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 송진우는 남한에서 암살된 첫 번째 주요 정치인이었다. 그는 1945년 12월 30일 자택에서 총을 맞고 숨졌다.

사건 해결 과정에서 경찰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인다. 경찰은 이듬해 4월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직감’으로 암살범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직감으로 범인을 지목한다는 게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또 암살범들이 “범행 당시 사용한 권총을 경찰 당국에 바친”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암살범들이 범행 도구를 경찰에 바쳤다는 것, 총을 받고도 경찰에서 아무런 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 모두 납득하기 어렵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이끌었던 여운형 암살 사건에서 경찰의 등장은 더 또렷하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었을 때 경호원이 범인을 뒤쫓았다. 그런데 현장에 있던 경찰이 경호원을 끌어안았다. 경찰도 범인을 쫓고 있었다고 했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범인은 사라졌다. 미군정은 당시 상황에 대해 “경찰이 여운형의 암살을 기도한 사람들은 체포하지 않고 경호원을 범인으로 몰아가려 한다”고 판단했다.

책은 “공권력의 축인 경찰의 ‘정치 암살’ 개입은 해방 정국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암살의 배후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난관을 조성했다”며 “배후 규명, 처벌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이후 우리 정치사에서 발생한 많은 암살과 테러, 의문사에 또다시 공권력이 동원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빠지지 않은 이름, ‘김구와 이승만’

책은 해방정국에서 발생한 암살사건의 ‘중요한 공통점’ 중 하나로 “김구, 이승만이라는 최고 지도자의 이름이 항상 거론되었다는 사실”을 꼽았다. 굵직한 정치이슈의 중심에 있었고, 희생자들과는 직간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혀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1947년 12월 2일 발생한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 암살은 대표적인 사례다.

장덕수의 죽음은 미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미군정의 의지대로 정국을 이끌 한국측 파트너로 장덕수를 꼽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전례없이 강도 높은 수사를 벌였고, 배후로 김구를 지목해 법정에 세웠다. 미군정, 한국민주당과 대립하며 남한 단독선거에 불참하고, 남북연석회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시점에 재판에 불려나와 암살의 배후로 거론되면서 김구가 입은 정치적 타격은 컸다.

미군정은 이승만에게도 강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군정 책임자인 하지 중장이 “이승만이 그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지우지 않고 있다”는 미군정 문서는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이승만은 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장덕수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앞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공개적으로 발표한 이승만에게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은 권력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과 같은 결과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책은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지도자는 이승만이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도자는 김구였다”며 “장덕수의 죽음 직후 이승만은 별다른 무리 없이 단독정부의 정권을 장악했다”고 분석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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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국을 위해 왜놈들에게 맞아 죽을 일을 했어도, 내 동포가 나를 죽일 일은 하지 않았소”
- 신변을 걱정하는 조소앙에게 김구가

현준혁,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이 책은 5명의 대표적인 정치지도자의 암살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격동의 해방정국에서 암살당했다.

1947년 7월 19일 오후 혜화동 로터리에서 2발의 총성이 울렸다. 여운형과 고경흠, 경호원 박성복이 탄 자동차를 트럭 한 대가 가로막았고, 암살범은 자동차 범퍼에 올라타서 여운형을 향해 권총 2발을 쏘았다.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에 투신했고, 대중한테도 인기가 높은 정치인이자 스포츠맨이었으며, 해방정국에서는 자주적 국가수립운동의 중심에 있던 여운형이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1947년 8월 3일 오전 8시, 광화문 근로인민당사 앞 광장에서 여운형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해방 후 최초의 인민장이었다. 상가는 철시했고, 거리는 수만 군중이 애도의 물결로 가득했다. 하지, 브라운, 랭던 등 미군정의 핵심 인사들과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대표인 스티코프의 조사가 이어졌다. 

1945년 8월 16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은 휘문중학 교정에서 포효와 같은 연설로 해방의 기쁨을 대중과 같이 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일어난 여운형의 죽음은 해방의 기쁨이 분단의 비극으로 바뀌는 교차점이기도 했다.  

현준혁은 해방 후 첫 정치암살의 희생자였다. 현준혁(1906~1945)은 8.15해방 전후 평안남도 지역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이다. 1906년 평안남도 개천군의 빈농가정에서 출생했지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1929년 5월 대구사범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고, 1932년 4월 학생들과 함께 항일 동맹휴교를 주도하여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1934년 9월 부산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면서 체포되어 1936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 평안남도지구위원회 책임비서를 지냈고, 조만식의 건국준비위원회와 공산주의자들간의 연합전선적 성격으로 설립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현준혁은 공산당이 독점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보다는 민족문제의 해결을 더 중시해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전선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평양에서 조만식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저격당해 죽었다. 그를 저격한 측이 어느 쪽인가를 놓고 좌·우익이 서로 의심했으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의 사망일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가 안장되어 있는 평양 애국열사릉 묘비에는 1945년 9월 3일로 기록되어 있다.

현준혁 암살사건은 해방 초기에 38선 이북에서 발생했다. 암살범들은 곧바로 피신해 체포되지 않았다. 그만큼 해방 초기 정국에 미친 영향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발생한 현준혁 암살사건은 그 후 38선 이남에서 주요 정치인들에게 닥칠 연속적인 비극을 알리는 첫 총성이자 친일파들에 의해 ‘악화(惡化)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왜곡된 현대정치사의 서막이었다.
- 《암살-왜곡된 현대사의 서막》, 51쪽

해방정국 우파 정치지도자였던 송진우는 38선 이남의 첫 번째 암살 희생자였다. 송진우(1887~1945)는 1921년 김성수의 뒤를 이어 동아일보사 3대 사장에 취임하면서 19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사장 또는 고문·주필 등으로 동아일보와 운명을 같이했다. 

해방이 되자 1945년 김성수, 김병로, 원세훈, 장덕수, 서상일과 함께 9월 16일 ‘한국민주당’ 결성을 주도했고, 당수격인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 12월 1일 <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제8대 사장에 취임했다. 12월 28일에는 신탁통치문제로 아놀드 미군정장관과 회담을 통해 반탁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했으며, 29일 밤에는 경교장에서 임시정부요인들과 회담했다. 이 자리에서 미군정청과는 충돌을 피하고 국민운동으로 반탁을 관철하여야 한다는 신중론을 피력한 다음날 30일 한현우 등 6명의 습격을 받고 자택에서 사망했다.

송진우와 더불어 동아일보계의 대표적 인물인 장덕수(1894~1947)는 1920년 <동아일보> 창간과 더불어 초대 주필과 부사장이 되었다. 1923년부터 미국 유학을 하는 동안 이승만을 지지·지원하는 활동을 벌였다. 1936년 귀국하여 이듬해 김성수의 도움으로 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거쳐 교수로서 활동했으며, <동아일보>의 취체역도 겸직했다. 1938년 이후 일제가 사상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대화숙(大和塾), 조선임전보국단,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지도위원 등 친일에 앞장섰다. 

친일경력에도 불구하고 해방이 되자 송진우·김성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고, 미군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우파 세력의 정당과 주요 정치단체에 참여하여 대표적인 이론가로서 활동했다. 

1947년 12월 2일 자신의 집에서 현직 경찰과 학생에게 암살당했다.

장덕수는 여운형과 송진우에 비해 그 명망성이 떨어졌지만, 장덕수의 죽음에 대한 미군정의 관심은 특별했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했고, 유엔이 선거를 위해 유엔임시위원단 파견을 결정하면서 1947년 12월은 이들을 맞이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러한 미국의 대안에 이승만과 한민당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이 중심에 장덕수가 있었던 것이다. 

1949년 6월 26일 오후 1시가 막 지난 시간, 경교장 2층에서 네 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한평생 숱한 사선을 넘긴 김구는 분단된 조국에서 동족의 흉탄으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백범 김구(1876~1949)는 1948년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했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선거를 거부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했다.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했으나, 통일정부 수립 실패의 시련을 맛보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각각 세워진 뒤에도 통일운동을 전개하던 가운데,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자택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이들 5명 개개인의 암살 뒤에는 백의사와 양호단이라는 극우 단체, 친일 경찰, 미군정의 비호, 미군CIC 등이 거론되지만, 그 윗선이 어디까지인가는 정확히 규명할 수는 없다. 정황과 지휘체계를 통해 그 암살의 배후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지난 70여 년간 이들이 암살당한 경위나 배후를 밝히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노력은 사실에 대한 호기심 차원이 아니라 우리 역사를 바로 복원하고, 그 속에서 이들의 정치적 위치를 재평가하려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해방 정국의 혼란한 정치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고, 당시의 수사와 재판에서도 그 배후를 밝히지 못했으며, 더구나 암살당한 사람이나 암살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를 받은 인사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그 배후를 밝히는 작업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한계를 고려해 이 책에서는 그들이 왜 암살의 대상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암살이 당시 역사에서 갖는 의미를 밝힘으로써 자연스럽게 암살의 배후가 드러나도록 하고 있다. 
- 《암살-왜곡된 현대사의 서막》 중에서

김구의 암살이 있었던 1949년 6월에는 소위 ‘6월 공세’라 불릴 정도로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6·6반민특위 습격테러, 국회프락치사건, 6·26김구 암살” 등의 6월공세와 이후 가속화된 국가보안법체제의 형성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연구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과 반민특위 결성에 앞장섰던 소장파 국회의원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국회프락치사건, 친일청산의 교두보였던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와해시킨 다음 김구의 암살이 있었다. 1949년 5~6월부터 극우반공세력의 강력한 공세 속에서 이들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극우반공세력의 전면적 공세라는 것이다. 

이 정치적 역정의 최고의 수혜자는 말할 나위도 없이 이승만이었다. 신생 정부의 허약함을 반공체제로 대체하면서 분단의 골은 깊어져 갔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분단은 안 된다는 김구의 절규가 사라져가는 순간이었다.       


▷ 양정심
현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전 고려대, 대진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며 제주4.3과 한국전쟁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출처 : 제주의소리(https://www.jeju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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