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6·25전쟁 從軍記者 1기생 李蕙馥 대한언론인회 고문
“평양 대동교 앞 白善燁-게이 장군 악수장면 잊을 수 없어”
오동룡
“여름에 일선에 갔을 때 정훈부 병사들이 신문을 보고 있어요. 자세히 보니 오래된 신문 쪼가리를 보물처럼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그 정도로 뉴스에 목이 마른 거라. ‘아, 신문기자의 사명이 이렇게 큰 거구나!’ 느꼈죠. 신문은 당시 남북한 주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존의 필수품이었으니까요.”
⊙ 6·25전쟁 첫날, 동두천 1연대 첫 종군 취재… 지휘관은 “염려 없다”고 코멘트
⊙ 국방부 종군기자 1기생 20명… 1949년 10월 陸士에서 10여 일간 훈련 후 종군기자증 받아
⊙ 여순반란사건 나자 일주일 만에 현장 취재… 流血이 낭자한 현장 기사화
⊙ 서울신문 韓奎浩 기자, 임진강 지구 전황 보도하다 북한군에 잡혀 殉職
⊙ 평양탈환 승전보 담긴 <경향신문> 500부를 지프에 싣고, 38선 지나며 북한 주민들에게 나눠줘
⊙ 교통편과 통신수단, 검열규정 때문에 종군 취재 어려움 많아
李蕙馥
⊙ 1923년 출생. 보성전문 상과 졸업.
⊙ 서울신문 사회부장·부국장, 동아일보 사회부장·부국장, KBS 해설주간·연수원장,
언론중재위원·부위원장 역임. 現 대한언론인회 고문.
⊙ 금성화랑 무공훈장 수훈.
이혜복(李蕙馥·87) 대한언론인회 고문은 대한민국 종군기자(從軍記者) 1기이다. 보성전문 상과(商科)를 졸업한 그는 여순(麗順)반란사건 취재를 시작으로 국군 1사단이 평양을 탈환하는 순간을 국내 언론사 최초로 보도하는 등 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최전선을 누볐다.
지난 4월 28일, 서울 목동 자택에서 만난 이혜복 고문은 “우리 종군기자들의 활약상이 영미계(英美系) 종군기자들에 비해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면서 “6·25전쟁에서 한국기자 한 명이 순직하기도 했을 만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장’을 지켰다”고 했다.
6·25전쟁 첫날 취재 지시를 받은 이혜복 당시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는 김수종(金壽鍾) 사진기자와 함께 한창우(韓昌愚) 사장이 내준 윌리스 지프를 타고 동두천(1연대)으로 달렸다고 한다. 긴박한 상황을 모르는지, 국도(國道) 옆 논에서는 모내기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현지 도착 즉시 이혜복 기자는 우선 전황(戰況)이 어떤지 지휘관을 취재했다. 지휘관은 “염려 없다”며 사로잡은 공산군 포로와 노획무기를 보여주면서 겁에 질린 포로에게 “소련식 행진을 해 보라!”고 명령하는 여유도 보여주었다.
우선 포로와 노획 병기의 사진을 찍고, 지휘관의 코멘트도 들었기에 마감시각을 맞추려 곧 서울로 돌아와 단숨에 기사를 써냈다.
“국군은 용전분투(勇戰奮鬪) 중이며, 침공한 적은 곧 분쇄될 것”이라는 낙관적 내용에 “이 기회에 밀고 올라가 통일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주관적 평가 한 줄까지 덧붙였다고 한다. 그날 1면 톱에 실린 기사 첫머리에 그의 이름(이혜복 특파원) 석 자가 큰 활자로 찍혀 나왔다. 당시 조석간 4면을 발행하던 때였다고 한다.
이혜복 기자는 전봇대 위에 올라가 다급하게 통신을 교환하던 통신병들의 목쉰 언성(言聲), 차츰 다가오는 듯한 은은한 포성(砲聲)이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그날 <경향신문> 제휴회사인 일본 <아사히신문>도 “한국상황은 괜찮으냐”며 걱정스런 전화를 걸어왔다.
이틀 후 전황이 크게 밀리면서 서울은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는 ‘설마 내일까지는 괜찮겠지’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 해질 무렵 명륜동 집으로 걸어갔다. 그때 이미 전차운행이 끊긴 상태였다.
“‘하룻밤 지내고 내일은 한강을 건너야지…’라고 마음먹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는데, 불안해요. 명륜 뒷산 허리에 올라 멀리 미아리고개 능선에서 분전(奮戰)하고 있는 국군을 바라보면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거센 빗소리에 간간이 들리는 포성, 기왓장이 부서지는 폭음에 잠이 깼습니다. 밤새 국군이 옷을 바꿔입으려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무도 열어주지 않더군요.
이튿날, ‘인민군이 들어왔다’는 소리가 들려 대문을 나서 보니 명륜동 앞 큰 거리, 창경궁으로 통하는 대로(大路)로 인민군 전차와 삼륜차, 그리고 보병 대열이 줄지어 밀려들고 있었습니다. 명동 쪽을 나가 보니 홍종인(洪鍾仁) 조선일보 주필이 황당한 표정으로 행군 대열을 바라보고 있더군요.”
1944년 2월23일, 허난성 일본북지파견군 고로모 부대 훈련소 수료식 사진. 맨 뒷줄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이혜복.
學兵으로 징병됐다 脫出
1951년 11월 판문점회담에 북측 공작원(통역)으로 나온 중앙고보 선배이자 보성전문 교수인 김동석(왼쪽)과 만난 이혜복.
보성전문 2년 시절인 1943년, 이혜복은 학도병으로 징병돼 중국 허베이성(河北省)에 주둔한 북지파견대인 ‘고로모(衣)’ 부대에 배치됐다. 그의 부대는 고량(수수) 밭 천지인 그곳에서 팔로군(八路軍)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키가 큰 편(178cm)이라 내게 경기관총 사수(射手)를 하라고 하기에 몸이 아프다 둘러대고 빠졌지. 지휘관과 경기관총 사수는 전투에서 적의 표적이 되니까 살아 돌아갈 수가 없겠더라고.”
그의 부대는 남만주 철도가 지나는 태평천(太平川)으로 이동해 일·소(日蘇) 개전에 대비해 소련 전차에 폭탄을 지고 뛰어들어 자폭하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일본군 하사관이 육군 경리학교 지망자를 뽑는다고 해요. 난 보성전문 상과를 다녔고, 속으로 살길이 생겼다고 탄성을 질렀어요. 신징(新京)으로 가 육군경리학교에서 교육을 받는데, 대좌(대령) 하나가 ‘군은 1개 분대에 38식 소총 두 자루꼴’이라며 한탄하기에 일본이 망할 날이 머지않았다고 느꼈죠.”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자 이혜복은 하얼빈으로 이동한 고로모 부대를 찾아 복귀하다 광복을 맞았다. 그는 고로모 부대 잔류부대를 찾아 열차를 타고 지린성(吉林省) 공주령(公主嶺)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포로가 워낙 많아 수용이 어렵자 소련군은 학교 등 공공건물에 철조망을 치고 일본군 장교에게 감시를 맡겼습니다. ‘탈출해 나가면 중국인에게 맞아 죽는다’는 일본 장교의 말을 들으면서 밀수제비를 먹어 가며 버텼습니다.
우연히 심부름하러 나갔다가 동포들의 귀띔으로 포로들이 시베리아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일본군 보초에게 ‘타노모우!(부탁한다)’라고 외치고는 야반도주(夜半逃走)했습니다.”
이혜복은 준비해 간 먹을 것과 옷가지를 중국인에게 주고 옷을 바꿔 입었다. 그는 공주령 시내에 위치한 한국교민회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비를 마련, 신의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길거리에 떡과 국수 등 먹을 것이 많았지만, 내 행색이 거지꼴이라 저리 가라고 쫓더군요. 신의주 인민위원회를 찾아가 하룻밤을 지내려는데, 한 좌익인사가 ‘이 새끼 뭐 하던 놈이야’하고 박대를 하더군요. 하는 수 없이 신의주역에서 40리(16km)를 걷다가 용천군 남시(南市)에서 구세주를 만났어요. 돈 있는 부자가 짐꾼 노릇을 하면 여비를 주겠다고 해요. 그 덕에 금교(金郊)를 거쳐 개성까지 왔습니다.”
이혜복은 소련군의 눈을 피해 38선을 넘어 창신동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 한의사였던 그의 부친(李寅求)은 “아이고, 네가 살아 돌아왔구나”하며 반겼다. 영양실조였던 그는 기름진 음식을 갑자기 먹는 바람에 귀국한 지 닷새 만에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았다.
法曹 담당으로 출발
1946년 6월초, 민주일보에 입사 초년병 시절 사회부 박진원 기자(오른쪽)와 함께 한 이혜복.
이혜복이 보성전문을 찾아가니, 교명(校名)은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광복 후 환원)’로 바뀌어 있었고, 이상훈 학장은 “자네는 벌써 졸업이 됐다”면서 졸업장을 주었다.
1년8개월 만에 학병(學兵)에서 학생(學生)으로 돌아온 그는 학교 강당에서 좌우익 학생들이 치고받는 모습을 보고 환멸을 느꼈다. 유진오(兪鎭午) 학생처장은 “학병 다녀왔다”는 그의 인사를 받고, “등록기일이 지났으니 내년에 오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그는 학교에 정나미가 뚝 떨어졌고, 취직을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고가네마치(黃金町·을지로의 일본식 호칭)를 걷고 있는데, 전봇대에 ‘민주일보 창간, 기자모집’이란 광고가 붙어 있어요. 1946년 5월에 창간하면서 기자를 뽑았는데, 수염 기른 50대도 시험을 치렀습니다. 100여 명이 응시했는데 5명이 합격했죠.”
이혜복의 입사동기는 박진원(마포경찰서 수사계 역임), 이한용(신문윤리위원회 위원장 역임) 등이었다. 민주일보는 함경도 출신 해운업자인 안병인(安炳仁)씨가 돈을 대고 김연현(金演鉉·패티김의 아버지)씨가 전무로서 경영을 맡았다.
“사회부에 발령받았죠. 그땐 기자 수습(修習) 기간도 없었어요. 데스크는 한상직(韓相稷, 납북) 차장, 부장은 시인 김광섭(金珖燮)씨였어요. 서울시청과 정동의 법원 출입을 맡았는데, 장교동 본사에서 두 군데를 커버하기 어려워 법조(法曹)만 출입했습니다.”
이혜복 기자는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 사건’도 취재했다. 조선정판사는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의 지폐를 인쇄하던 인쇄소였다. 1945년 재건된 조선공산당은 소공동의 정판사가 위치한 ‘근택(近澤)빌딩’에 입주해 기관지 <해방일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946년 5월 15일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張澤相)은 조선공산당 인사들이 정판사에서 약 1200만원어치(이혜복 기자 당시 월급 600원)의 위조지폐를 찍어 유포한 사실이 드러났으며, 관련자들을 체포했다고 공식발표했다.
“주범은 공산당 재정부장인 이관술과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이었죠. 공산당 당원이며 정판사 직원이었던 김창선이 지폐 동판(인쇄판)을 미리 훔쳐 갖고 있었던 거죠. 정판사는 천주교회에 불하돼 <경향신문>을 인쇄하게 됐어요. <해방일보>는 폐간됐고, 공산당은 당사(黨舍) 압수 수색을 받은 뒤 건물에서 쫓겨났어요. 그 건물에 <경향신문>이 입주했죠.”
그는 법조를 출입하면서 최근 사라진 간통죄(姦通罪)로 고소당한 남녀의 ‘1호재판’을 취재하기도 했다.
“상하이(上海)에서 사업하는 기업인이 첩(妾)이 생기자 본부인이 간통죄로 남편을 고소한 겁니다. 간통죄 사건 공판이 열리던 날, 법원 건물은 입추의 여지 없이 방청객이 꽉 들어찼고, 저는 변호사들 옆자리에 앉아 재판을 취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지만, 그때 이지적으로 생긴 본부인이 울부짖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從軍記者 1기
1952년 <경향신문> 기자로 종군할 때 미 국무차관보(컵을 든 여자)와 인터뷰하는 이혜복 기자. 맨 오른쪽 뒷모습으로 밴 플리트 8군사령관이 보인다.
이혜복 고문은 초년병 기자로 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여운형(呂運亨) 등 암살사건이 집중적으로 발생해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그는 6·25전쟁 직전 중앙일보·자유신문을 거쳐 경향신문 사회부로 옮긴다.
광복 후 ‘소작쟁의’ 기획기사를 눈여겨본 <경향신문> 오종식(吳宗植) 사회부장이 그를 스카우트했다. 그가 경향신문으로 옮긴 것은 1950년 6월 15일, 6·25전쟁이 터지기 열흘 전이다.
이혜복 고문은 ‘종군기자 1기생’이다.
“우리나라에서 종군기자라는 명칭이 처음 생긴 것은 6·25 바로 전해입니다. 당시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은 군 출입기자들도 군사지식을 숙지하고, 최소한의 군사훈련을 익혀 두는 것이 공비토벌 부대에 종군(從軍)하는 데 유익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훈련을 받은 시기는 1949년 9월 하순에서 10월 초순에 걸친 10여 일간이었다. 정부수립 후 ‘종군기자’라는 공식명칭이 부여된 것은 1949년 10월 4일 태릉 육사에서 10여 일간 훈련받은 군 출입기자에게 국방장관(申性模) 명의의 ‘종군기자 수료증’이 주어지고 나서부터였다.
그는 “수료증 발급일자가 1949년 10월 4일로 돼 있다”며 수료증을 기자에게 내보였다.
“당시 육사 교장은 이한림(李翰林) 대령(1군사령관 역임), 교수는 김웅수(金雄洙) 장군(6군단장 역임), 나중에 6·25 이후 후퇴 당시 보도과장을 지낸 박석교 대위도 교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종군기자 1기생은 20여 명이었다. 그는 “다 기억은 안 나지만, 대체로 20여 명”라면서 기억을 더듬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머리에서 뽑아냈다.
“조창섭(趙昌燮·조선일보), 최경덕(崔慶德·동아일보, 사진), 김진섭(金鎭燮·동아일보, 사진), 장명덕(張明德·합동통신), 박성환(朴聖煥·경향신문), 허승균(許承均·경향신문, 사진), 김군서(金君瑞·국제신문), 이지웅(李志雄·연합신문), 최기덕(崔起德·태양신문), 전인국(全仁國·KBS 아나운서), 한응태(韓應台·중앙통신), 김우용(金禹鎔·서울신문), 이월준(李月俊·자유신문), 조용하(趙龍夏·KBS), 이재옥(李在玉·연합신문, 사진), 임학수(林學洙·대동신문), 한규호(韓奎浩·서울신문), 이혜복(자유신문) 등 18명이었고요, 그 외에 6·25전쟁 이후 행방불명된 이모(국제신문)와 윤모(조선통신)까지 합하면 20여 명입니다.”
그 후 1950년 2월 26일 종군기자 2기생으로 정성관(鄭成觀·평화신문), 구본건(具本健·합동통신) 등 기자 10여 명이 육사에서 12일간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종군기자 1기생 훈련이 끝나자, 당시 육본 정훈국 보도과에서는 보도과장 이창정(李昌禎) 대위가 인솔, 강릉에 있는 8사단(사단장 李亨根 대령), 원주에 있는 6사단(사단장 劉載興 대령), 그리고 38선 접경지역 군부대를 순회 시찰했다.
이혜복 고문은 “여순반란사건 취재는 실제 전투상황에 종군한 최초의 사건”이라며 “서울신문 한규호 기자와 사건 발생 일주일 만에 취재하러 내려갔다”고 했다.
“여순반란사건 직후, 지리산으로 잠입한 14연대 소속 반란군 김지회(金智會) 중위에 관한 기사를 쓴 모신문 특파원의 현지 보도기사를 인용하면, ‘빨간 머플러를 목에 두른 김지회의 여비서가 지리산에서 함께 날쌔게 행동하고 있다’고, 마치 현장에서 목격한 것인 양 엉뚱한 기사를 써도 그것이 그대로 활자화되던 때였습니다.”
그는 “여순반란사건 직후, 여수 돌산도(突山島)에서 총격전이 계속 벌어지고 있을 무렵, 습격당한 경찰서에 선혈이 낭자한 현장도 목격했고, 구례(求禮)까지 들어가 지리산 공비토벌 상황도 취재했다”고 했다.
이혜복 고문은 “그때만 해도 군 당국의 보도관계 진용(陣容)이 지금처럼 완비돼 있지 못한 시기였다”면서 “이창정 보도과장 밑에 정훈1기 출신인 보도장교들이 군 관계기사 보도, 검열업무를 담당했으나 전시(戰時)가 아니었던 만큼 사전검열이 없었다”고 했다.
“더군다나 일부 언론기관 안에 좌익계에 은근히 동조하는 기자들이 아직 남아 있을 때였죠. 방송담당은 홍천(洪泉) 중위, 신문담당은 이용상(李容相)·정갑용(鄭甲鎔) 중위가 나눠 하고 있었습니다.”
이혜복 고문에 따르면, 종군기자들은 6·25남침 이전 1949년부터 38선 전역에 걸쳐 산발적으로 일어난 북한군의 도발사건, 예컨대 개성 송악산 전투(1949년 5월 초), 옹진전투(1949년 5월 21일), 은파산 전투(1949년 10월 4일) 등에 종군했다.
金賢洙 중령의 죽음
휴전직후 향로봉에서 1군사령관 송요찬 장군(오른쪽)과 기념촬영한 이혜복 기자.
이듬해 6월 25일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자 당시 국방 담당은 물론, 종군기자 훈련을 받은 기자들은 1차로 전선에 투입됐다.
이혜복 고문은 “6월 25일 첫날부터 종군기자 훈련을 받은 기자들은 각 신문사로부터 현장 취재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6월 26일, 당시 국방부 보도과장은 김현수(金賢洙) 중령이었다. 그는 보도과에서 검열 규정을 인쇄해 기자들에게 배포함과 동시에 찬술(淸酒) 한 잔씩을 나눠주며 종군하는 기자들을 격려했다. 그것이 ‘이별주(離別酒)’가 될 줄은 몰랐다.
“6월 28일 새벽, 북한군 선봉부대가 서울에 진입했잖아요. 김현수 보도과장은 당시 정동에 있던 KBS방송국에 들어갔다가 미리 침투해 있던 북한군 저격병과 마주쳐 총격전 끝에 전사하고 말았어요. 아마도 그는 방송시설이 적(敵)에게 이용되지 않도록 최후조치를 하려고 간 듯합니다. KBS 건물 앞에 이분 흉상 하나 세우는 것을 보고 싶어요.”
이런 판국에 종군기자들이 사태를 미리 판단하고 긴급피란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상황의 급박함을 느끼고 재빨리 서울을 빠져나간 종군기자들도 몇 명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최기덕·박성환(경향신문)·정성관(당시 평화신문) 기자 등 극소수를 제외한 종군기자 대부분은 서울에 남아 9·28서울수복 때까지 공포 속에 3개월을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6월 27일 밤 늦게까지 현재 명동의 증권거래소 건물에 있던 보도과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가 북한군의 서울 진입을 알고 가까스로 도피한 <조선일보> 방낙영(方樂榮) 기자는 그래도 재수가 좋은 편이었어요. 한규호 기자는 납치당해 순직했잖아요.”
6월 29일 아침, 한규호 기자와 길거리에서 만났다는 방낙영 기자는 이혜복 기자에게 “한규호 기자는 북괴 내무서원에 의해 동대문경찰서로 끌려가 6월 28일 하룻밤을 자고 나오는 길”이라며 “종군기자 명단을 대라는 시달림을 받다가 일단 풀려 나왔지만, 종군기자들은 반드시 지명수배될 것이니 빨리 피하라”고 말했다.
방낙영 기자는 “며칠 뒤 한규호 기자 소식을 들어 보니 동대문서로 데려간 후 소식이 끊겼다”면서 “한 기자는 종군기자였기 때문에 북한에 의해 희생된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이혜복 고문은 “KBS의 전인국(全仁國) 아나운서도 납북됐다는 것이 그 후 확인됐다”며 “한강을 건너 남하(南下)를 하지 못했던 종군기자 가운데 장명덕 기자도 북진을 개시한 국군부대에 뒤늦게 합류하느라 사선(死線)을 수없이 넘나들었다”고 했다.
<소련아 잘 있거라> 책 때문에 ‘죽었구나’ 생각
이혜복 기자는 미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됐다. 그는 일주일쯤이면 다시 국군과 미군이 밀고 올라올 것으로 기대했다. 명륜당(明倫堂) 앞 광장을 지나다 ‘민보단(民保團)’ 단장을 인민재판해 처형하는 광경을 목격한 그는 남의 일 같지 않아 몸서리를 쳤다.
그 무렵, 이혜복 기자는 자신의 소련군 포로 시절 이야기를 담은 <소련아 잘 있거라>라는 반공(反共) 책자를 <경향신문> 박성환 기자와 함께 냈기 때문이다.
“소련군 포로로 잡혀갔다가 북으로 돌아온 학도병 15명을 공산당이 프락치로 내려보냈다가 군 특무대에 의해 일망타진된 이야기였습니다. 만일, 인민군이 나를 붙잡아 취조하다 그 일을 알게 되면 꼼짝없이 죽는 거죠. 더군다나 여름날 아궁이에 책을 불태우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까 조심해서 불태웠어요.”
그는 더구나 “내일부터 나와 함께 일하자”고 집까지 찾아왔던 윤모 기자(모통신사 국방부 출입, 월북)의 얼굴이 떠올라 “우선 피하고 보자”고 결심, 고모 댁(약수동)으로 갔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견디기 힘들 것 같다’고 판단, 7월 초 다시 시골(양평) 집으로 내려갔다.
평양선봉 1사단을 따라가는 행운 잡아
2000년 6월 23일, 대동강 다리위 피난민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막스 데스포씨가 수상작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자전거에 실은 옷보따리 속에 종군기자증과 군복·군화도 싸 넣었는데 양수리 나루터에서 자위대 청년의 검문을 받을 때 그것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했으나 요행히 짐 검사는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고향집에 은거(隱居)하는 석 달 동안 ‘맹장염 수술이 잘못돼 운신하기 어렵다’고 핑계를 대며 위기의 순간을 몇 차례 넘겼다고 한다. 8·15 직후 복막염까지 겹쳐 수술자리가 제왕절개 수술을 한 것처럼 컸기 때문이다.
“상처 자리에 머큐로크롬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면 감쪽같이 큰 수술을 받은 환자처럼 보였습니다. 한편으로 엄살을 떨면서도 내가 신문기자, 특히 종군기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무척 겁이 났죠. 다행히도 신문기자 생활 불과 3년 남짓한, 풋내기 기자였기에 시골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게 천행(天幸)이었던 거죠.”
그의 피란생활은 석 달 만에 끝났다. 마치 석 달이 30년같이 느껴졌다고 한다. 10월 초순 국군 제6사단 19연대 수색대가 그가 피신한 양평마을에 들어서면서 악몽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훨씬 후에 알았지만 종군기자 중 한강을 넘어 남하한 기자는 박성환, 최기덕, 정성관 등 몇몇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적 치하에 묶여 사선을 넘어야 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19연대 수색대가 양평마을에 들어선 지 며칠 후, 이혜복 기자는 숨겨뒀던 군복을 꺼내 입고 ‘종군기자증’을 내보이고 북진하는 군 차량에 편승,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곧바로 <경향신문>에 복귀했다. 그의 말이다.
“무엇보다도 석 달 동안 공산치하에 묶였었기에 ‘멋진 종군보도로 그간의 공백을 메워야겠다’는 의욕이 생겼습니다. 같은 회사 종군기자인 박성환은 10월 5일 이미 미 제1군단 예하부대를 따라 개성 쪽으로 갔고, 이시호(李始鎬) 기자도 10월 1일 수도사단을 따라 38선을 넘어 북진 중에 있었습니다.”
특히 9·28서울수복의 전초전인 인천상륙작전에는 해병대, 육군 17연대에 정성관, 함택운(咸澤雲), 이필면(李弼冕) 기자 등이 유엔 종군기자들과 함께 인천상륙작전, 수도 서울탈환 현장을 기록했다.
한발 뒤진 이혜복 고문은 ‘어느 부대에 종군할까’ 판단이 서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출장명령을 회사에서 미리 받아 무작정 정훈국으로 달려갔다. 그것이 10월 17일이었다.
행운이랄까, 그날 정훈국에 나타난 1사단 정훈부장 안중식(安重植) 소령이 “평양으로 갑시다. 곧 떠나요”라고 할 때, 김우용(서울신문), 김진섭(동아일보) 두 기자가 성큼 안 소령 지프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이혜복도 반사적으로 그 차에 뛰어올랐다.
그 차는 노획한 소련제 지프로, 안 소령, 보좌관 노영서(盧永瑞) 소위, 세 기자와 정훈부 사병 2명 등 모두 7명이 탈 만큼 자리가 넓었다.
이날 오후 서울을 떠난 일행은 고랑포(高浪浦) 나루에서 임진강을 건너 계속 달렸다. 황해도 신계(新溪)에 닿은 것은 그날 초저녁 무렵이었다. 사단본부가 이미 수안(遂安)으로 떠난 후였다. 그날 밤 이혜복 기자 일행은 수안 사단 전방 CP(지휘소)에 따라붙어 하룻밤을 보냈다.
국군 1사단이 이처럼 전속력으로 진격을 하는 데는 까닭이 있었다. 평양 진공작전을 맡은 미 제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은 당초 작전계획에 미 24사단을 평양탈환 선봉부대로 지정했다고 한다. 바로 그때 백선엽(白善燁) 국군 1사단장은 미 1군단사령부를 찾아가 “평양 탈환작전에 국군 1사단을 꼭 참가시켜 달라”며 군단장을 설득했다.
“백선엽 사단장은 그 이유로 자신이 평양 출신이라 그 지역 지리에 밝을 뿐 아니라 ‘적의 수도는 국군이 탈환해야 마땅하다’고 눈물로 역설했던 겁니다. 밀번 소장도 이를 양해해 미 제24사단 작전구역에 1사단을 배정하게 된 것입니다.”
진격준비를 갖춘 1사단은 10월 11일 고랑포에서 38선을 돌파, 북진을 계속해 북한군 17기갑연대 일부 병력을 사미천(沙尾川) 부근에서 격파하고 계속 북상, 다음 날 구화리(九化里) 근방에서 동(東)북진해 온 제1기병사단 예하연대와 조우했다.
“국군 1사단은 평양 선봉 탈환부대로 미 1기병사단과 경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기동성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어요. 백 사단장은 미군부대가 먼저 진격하는 대신, 미군탱크 21대를 1사단에 배속해 달라고 요청했고, 미군과는 달리 1사단은 진격로를 산간 협로(峽路)로 택해 평양으로 육박해 들어갔습니다.”
10월 18일 아침, 1사단이 평양 동남쪽 상원(祥原)으로 향하고 있을 때 미 제1기병사단은 신막(新幕)을 탈환, 평양에 접근 중이었다. 영(英)연방군 27여단 선봉부대는 황주(黃州)를 점령, 계속 북진 중이었다. 북진 노상에서 인민군 패잔병들은 따발총을 이혜복 기자에게 가져와 투항할 정도로 적의 군기와 사기는 밑바닥이었다. 1사단 주력부대는 10월 19일 오전 10시40분쯤 대동강변 선교리(船橋里)에 도달했다. 백선엽 사단장 차가 앞장서고 그 뒤에 석주암(石柱岩) 대령(참모장), 이혜복 기자가 뒤따랐다. 석 대령이 탄 지프가 대(對)전차 지뢰에 걸려 뒤집히는 바람에 석 대령은 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강 건너 평양시내를 향해 포격을 개시할 무렵, 건물 속에 숨어 앉아 반격을 시도하는 적들을 소탕하는 시가전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이혜복 고문의 말이다.
“그처럼 총탄 비가 오가는 사이를 뚫고 선교리로 다가서는 국군을 향해 ‘대한민국 만세!’, ‘국군만세!’를 외치며 시민들이 달려나왔습니다. 그들은 건물마다 널려 있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뜯어내 짓부수기도 하고 국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스스로 철거하기도 했습니다.”
1968년 8월, 휴전 15년만에 종군기자들이 한 데 모여 ‘종군기자동인회’라는 친목모임을 만들었다.
한미 두 사단장의 握手
6.25전쟁 때 납북 등으로 실종된 민간인인 ‘실향사민’ 교환 당시 공산측이 유일하게 휴전선을 통해 넘겨준 외국인들. 공산군측은 서울에서 크림 장사를 하던 터키인과 백러시아인 가족 등 몇 명만을 넘겨주고 납북인사들은 단 한 명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런 감격스런 장면이 연출된 지 10여 분이 지났을 때다. 이혜복 기자는 황주 쪽에서 올라온 미 제1기병사단장 호바트 게이(Hobart R. Gay) 소장이 선교리에 도착해 백 사단장과 역사적인 악수를 나누는 것을 목격했다.
“평양에 먼저 들어오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던 두 사람이 반갑게 악수를 나눴습니다. 중간에 밀번 군단장이 두 사람에게 뭔가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때야 미군 종군 외신기자들이 평양 돌입 상황을 우리에게 묻기도 했습니다.”
이혜복 고문은 “평양 대동교 앞 白善燁-게이 장군 악수장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면서 “통일을 눈앞에 둔 것 같은 흥분했던 그 순간을 기록할 카메라와 녹음기만 있었더라면…,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막급”이라고 했다.
그는 “‘이 역사적인 승전보를 빨리 보도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면서 “군 당국에 특별차 편을 간청, 지프 한 대를 배정받았고, 서울로 먼저 가서 평양탈환 첫 보도기사를 써 각 신문사에 ‘풀(pool·기사를 다른 회사에도 제공하는 것)’하기로 타협을 보았다”고 했다.
해질 무렵 서울행 지프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 차에는 정국은(鄭國殷·당시 아사히신문 특파원)과 그를 보좌하던 정모씨, 그리고 이혜복 기자가 탔다.
“부슬비 속에 차는 남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렸어요. 밤새 달린 차가 황해도를 지나 임진강을 넘어설 무렵, 운전병 K상사는 졸음이 와서 더는 달릴 수 없으니 ‘잠깐 쉬어 가자’고 하더군요.
인적 없는 산골에서 엔진을 멈추자, 나를 뺀 세 사람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난 잠들 수 없었어요. ‘혹시 패잔병이라도 들이닥친다면?’하는 두려움보다, 마감시각에 늦을까 걱정이 됐습니다. 역사적 평양탈환 기사가 외신기사로 미리 채워질까 초조했죠. 고이 잠든 운전병을 깨워 ‘다시 가자’고 간청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것이 다음 날 새벽 4시 반. 정국은 일행을 내자호텔에 내려준 후 명륜동 집에 들어가 잠시 눈을 붙인 다음 아침 7시께 신문사로 가서 단숨에 기사를 써 내려갔다.
그날자 석간 1면 톱에서부터 2면, 3면 모두 평양탈환 기사로 메워졌고, 평양에 두고 온 두 기자와의 약속도 지켰다. 당시 <경향신문> 10월 21일자 기사는 이혜복 기자의 현장감이 그대로 묻어난다.
<平壤市 完全 奪還! 各部隊는 續續入城. 大韓民國陸海空軍 總司令部 10월20일 10시 發表. 世界 歷史上에 驚異的 作戰! 國軍精銳先着渡河. 白부대장과 ‘게이’소장 大同橋서 感激의 握手. (平壤 大同橋에서 本社特派員 李蕙馥 19일發).
祥原을 탈환하고 18일 하오 平壤으로 向하는 公路를 북진중이던 我국군 5816부대는 18일 하오 12시경 平壤 동남방 지점 구릉지대에 依據하여 완강한 저항을 시도하던 敵의 방어선을 突破하고, 空陸呼應 猛攻擊을 개시하여 탱크부대를 선두로 後退離散하는 敵을 急迫, 드디어 同日 오전 10시반 최선봉 부대의 일부가 평양시 동남방 工場地帶 突入에 成功하였다.
이리하여 同日 오전 12시반 同부대 주력은 대동강 南岸 평양시 중심부인 船橋里에 도달, 대동강 渡河點인 大同橋를 完全 確保하여 敵都 平壤市 奪還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同日 전투에 있어 직접 陣頭指揮를 하여 砲煙彈雨를 무릅쓰고 부하장병과 같이 市 중심부로 돌진하던 부대장 白善燁 准將은 국군부대보다 약 40분 뒤늦게 船橋里에 도달한 美 제 1機甲師團長 ‘게이’ 소장과 대동교 前에서 감격적인 握手를 교환하였다.
船橋里에서 合流한 韓美兩軍은 大同橋의 鐵橋 및 人道橋가 모두 敵에게 폭파되었음을 확인하고, 渡河作戰을 위하여 우선 大同江 北岸 敵陣地에 猛砲擊을 開始하였다…(중략).
敵은 평양시 固守를 企圖하였음인지 市街 주요도로에는 五十 메-터 간격으로 흙가마니를 싸올리고 市街戰을 준비한 形蹟이었으나, 동시에 進入한 國軍部隊의 進擊이 너무도 急했기 때문에 逃走할 기회를 놓친 少數 敗殘兵들의 발악적 狙擊을 받았을 뿐 我軍은 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悠悠히 市街中心部까지 도달하였으며 市民의 열광적 歡呼裡에 감격적 進駐를 행하였다. 현재 전투상황으로 보아 二十日 午後까지는 平壤 全市의 敗殘兵이 완전 掃蕩될 것으로 보인다.(하략)>
“윤전기가 돌기 시작하자 한창우 사장께 요청해 <경향신문> 500부를 지프에 싣고, ‘<경향신문> 제호(銅版)를 한 장 달라’고 해서 주머니 속에 간직하고 다시 평양으로 달렸습니다. 38선 너머 도시와 농촌을 지날 때마다 승전보로 가득 찬 신문을 나눠주었습니다. 신명이 절로 났습니다.”
이혜복 기자는 신계, 수안, 상원, 평양시내 곳곳에 평양탈환 기사가 실린 <경향신문>을 내붙였다.
그날 저녁 무렵, 종군작가 최태응(崔泰應)씨가 국방부 정훈국에서 기관지를 내기로 한 인쇄소(후에 <평양일보>가 잠시 발행되던 곳)에서 ‘경향’ 제호를 넣어 현지판 호외(號外)를 발행하도록 도와주었다. ‘평양을 탈환했고, 김일성 일당을 한만국경으로 추격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호외를 나중에 받아본 한상우 사장은 “잘했다. 출장비에 보태라”며 상금 2만원을 줬다.
판문점 휴전회담서 활약한 崔秉宇 기자
1·4후퇴 이후 국군은 재반격을 시도했다. 1951년 소련 외상 말리크가 휴전회담을 제안했고, 곧이어 휴전회담이 열렸다. 이혜복 기자는 휴전회담 취재도 맡게 됐다. 종군기자들은 물론 각사 취재기자들까지 앞다퉈 전선 종군에 나섰다.
종군기자들의 숫자는 50여 명으로 크게 늘었다. 국방부 보도과에서 전선 종군 출장증만 떼어 주면 어느 기자건 종군을 할 수 있는 때였다.
“애당초 유엔 종군기자들은 내자호텔(종로구 내자동)이 숙소였으나 휴전회담이 길어지자 판문점에서 가까운 문산역 구내에 침대차 5량·식당차 2량으로 편성된 ‘평화열차’(Peace Train)를 임시숙소로 마련했습니다. 그때 한국 종군기자들도 평화열차 신세를 졌어요.
초가집 몇 채밖에 없던 판문점 벌판에 몇 개의 천막을 치고, 휴전회담장과 그 부속시설로 이용했고요. 별도로 2개의 천막을 마련해 남북기자들에게 천막 1개씩을 배당했습니다. 현지 프레스센터라고 할까요?”
이혜복 기자는 남북 포로교환 명단을 독점으로 싣는 특종을 했다. “육본에서 교환포로 명단을 보여주는데 기자들은 심드렁하더군요. 난 전부 베껴 신문에 실었더니 대히트예요. ‘물 먹은’ 다른 신문들이 따라왔습니다.”
이혜복 고문은 “3차례 남짓 휴전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회담내용 보도와 함께 북한 기자들과 입씨름으로 ‘장외회담’을 벌이는 것도 판문점 출입 일과의 하나였다”면서 “한국일보 소속으로 1958년 대만 진먼섬(金門島)에서 승선취재 중 중공군 포탄에 맞아 순직한 고 최병우(崔秉宇) 기자가 판문점에서 활약했다”고 했다. 그는 종군기자 가운데 드물게 영어에 능통했던 기자였다고 한다.
“기자완장을 찬 북측 공작원들이 남측 기자들의 인물사진을 찍느라 부산을 떨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보도가 목적이 아니라 정보수집을 위해 판문점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공산 측 대표들은 말발이 안 먹히면 미군 전선을 피해 국군 사단에 대규모 공세를 퍼붓는 방법으로 위협을 병행하며 회담을 진행했습니다.”
北, 서울 점령 후 신문까지 발행해 승리 선전
휴전조인이 이뤄지기 직전까지 155마일 전 전선에서는 치열한 진지 쟁탈전이 되풀이됐고, 한국의 후방도시들에서는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는 데모가 거셌다.
“‘불법남침한 원흉을 북녘에 놔둔 채 휴전은 있을 수 없다’는 국민적 감정을 반영하는 한국 종군기자들의 보도자세, ‘확전은 안 된다’는 외국 특파원들의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엔 종군기자들의 기사 송고 시스템이 전쟁기간 내내 부러웠다고 했다.
“회담 경과 브리핑이 끝나면 기사작성 즉시 공보장교의 검열을 거쳐 군용 통신망을 이용, 곧바로 해외 본사에 송고하니 5분 만에 끝납니다. 한국기자들은 브리핑이 끝나면 유엔군 차량을 빌려 타고 문산까지 나가 평화열차 부근에 대기 중인 각사 차량으로 옮겨 타고 서울로 달려야 했거든요.”
—종군기자들은 통상 사단사령부까지 나가 취재를 하지 않습니까.
“사단사령부도 아니고 육군본부를 중심으로 취재를 하는 기자들이 대부분이죠. 난 그게 루틴한 느낌이 들어 다른 기자들에게 맡기고 일선 부대 현장을 취재했어요. 지휘관이 너무 좋아해요.”
—실제로 총탄이 날아다니는 현장까지 접근합니까.
“분대까지 가보면 귓전에 ‘쌩쌩~’하는 유탄소리가 들립니다. 완전한 프런트죠. 이북은 공산주의의 정치적 선동선전에 보도 중점을 뒀기 때문에 ‘현해탄’의 시인 임화(林和)를 전선에 보냈습니다. 보고 느낀 대로 쓰라고요. 임화는 6·25전쟁에서 다리를 하나 잃었습니다.”
그는 “유엔군 측은 기자가 폭탄이 터지는 것을 묘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최전선까지 갈 필요는 없다며 말렸다”면서 “하지만 인민군이 특별히 프레스 완장을 찬 기자들을 목표로 총을 쏘진 않았기 때문에 가급적 현장에 가까이 가려 노력했다”고 했다.
—6·25전쟁 기간 중 신문 발행은 계속됐나요.
“전쟁 발발 직후에도 6월 28일자 까지는 발행됐습니다. 하지만 6월 27일 서울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자 신문은 일제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발행된 신문은 6월 28일 자로 돼 있지만, 전날 석간을 이튿날 발행하는 관행에 따라 27일 오후에 마지막 신문을 발행한 거죠. 서울이 3개월간 공산군 치하에 들어가면서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를 발행해 자신들의 승리를 선전하고 이태준(李泰俊), 임화의 글을 실어 선동했습니다. 남침을 계획하면서 신문 발행계획까지 치밀하게 세워 신문을 ‘전쟁 수행의 도구’로 이용했던 겁니다. 서울탈환 후에는 폐허에서 윤전기를 찾아 <서울신문>이 가장 먼저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전쟁 중이라 배달망이 좋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배달을 했습니까.
“배달은 거의 없고, 가판(街販)을 했습니다. 신문사 앞에 배달소년들이 신문을 받아 들고 ‘내일신문 나왔습니다’라고 외쳐요.”
—전쟁 중 많은 언론인이 납북(拉北)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언론인 249명이 북으로 끌려갔고, 36명이 피살됐습니다. <조선일보>는 사장 방응모(方應謨)가 북으로 끌려갔고, <경향신문> 편집국장 신태익(申泰翊), <동아일보> 편집국장 장인갑(張仁甲)도 납북됐습니다.”
—언제 종군기자로서 보람을 느꼈나요.
“한번은 여름에 일선에 갔을 때 정훈부 병사들이 신문을 보고 있어요. 자세히 보니 오래된 신문 쪼가리를 보물처럼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그 정도로 뉴스에 목이 마른 거라. ‘아, 신문기자의 사명이 이렇게 큰 거구나!’ 느꼈죠. 신문은 당시 남북한 주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존의 필수품이었으니까요.”
‘南과 北’으로 만난 고교선배
이혜복 고문은 “근 3년 남짓 판문점을 드나드는 동안 기억에 남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 두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이혜복 기자는 광복 훨씬 전 헤어진 옛 스승과 8년 만에 기구한 만남을 가졌다.
1951년 12월 9일, 판문점에 간 그는 북한공산군 장교복장에 ‘공작원’ 쪽지를 가슴에 달고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모교(중앙고보) 선배이자 영어교사, 보전(普專) 재학 중 영어를 교수했던 김동석(金東錫) 교수였다.
그때 이혜복 기자는 군복에 UNC(UN사에서 발급한 판문점 출입표지) 표지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김 교수는 광복 이후 ‘문학가동맹’ 간부로서 ‘문필가협회’의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와 치열한 이념논쟁을 벌이던 민전(民戰) 간부였다. 월북한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서울을 찾기도 했다고 한다.
“반가운 마음에 서로 다가서기는 했으나, 적대(敵對) 진영에 속한 스승과 제자가 반갑게 인사하거나 악수를 나눌 분위기가 못 됐습니다. 북측 감시원 때문이었을까요? 김 교수는 굳은 표정으로 공격적인 말투로 남쪽을 비난했고, 나 역시 응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그의 말이다.
“그때 나는 자연스럽게 김 교수를 호젓한 신작로 쪽으로 유도해 월북 문화인들의 소식을 물었고, 그도 남쪽 인사들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는 ‘유진오(兪鎭牛) 교수, 이인수(李仁秀) 교수(영문학자, 6·25 때 김 교수의 권유로 인민군총사령부 선전방송에 나가 유엔군 회유에 협력)는 어찌됐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이인수 교수는 부역한 사실 때문에 9·28 이후 군사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이미 처형된 터였다고 한다. 그날의 비극적 만남을 <경향신문>에 몇 번 ‘내리닫이’로 썼을 때, 이혜복 기자는 둘이서 나란히 찍은 사진을 꼭 싣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진은 검열에서 삭제됐어요. 뉴스밸류로 볼 때, 사진이 빠질 수 없었으나, 그때 국내 분위기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혜복 고문은 <조선중앙통신> 북한기자와의 만남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판문점에 내가 나가면 아주 친숙하게 다가서던 그가 하루는 ‘남측 기자들의 취재천막을 구경하고 싶다’고 해 프레스 텐트를 구경시켜 주었는데, 그때 그가 ‘우리 쪽(북측) 기자 천막도 구경하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나를 끌었어요.
그때만 해도 판문점 휴전회담 장소에서는 남북 기자들이 뒤섞여 회담장 어디나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봅시다’ 한마디로 승낙하고, 북측 기자천막으로 가던 길목 중간쯤에서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었어요. ‘그곳에 들어갔다 나를 놓지 않고 잡으면 어쩌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죠. ‘화장실이 좀 급하다’고 핑계를 대고, 나는 발길을 돌렸어요. 돌이켜봐도 뚜렷한 판단이 안 서는, 그러나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 조인식이 열렸다. 종군기자들은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군 관계자를 또다시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전담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종군기자 26명, ‘금성화랑무공훈장’ 받아
1955년 육군창설 9주년 기념일을 계기로 그해 1월 15일 대구 육군본부에서 국방장관 명의로 유공(有功) 종군기자에게 훈장(금성화랑무공훈장)을 전달했다. 정부 차원의 무공훈장을 종군기자에게 처음으로 수여하는 순간이었다.
“1952년 6월 25일, 종군기자들에 대한 6·25종군 기장(記章) 수여식이 있었고요. 훨씬 후인 1965년 11월 22일 유엔군 사령관인 드와이트 비치(Dwight E Beach) 대장은 종군기자들에게 6·25 때의 감투정신을 기리며 표창을 수여했습니다. 1952년 서울 재수복 이후, 부산에서 환도(還都)하기 직전의 일로 기억합니다. 대구에서 전체 종군기자 60여 명이 ‘군방각’이란 곳에서 대규모 단합대회를 했던 적도 있습니다. 당시 <조선일보>는 유건호(柳建浩)·방낙영 기자가 종군에 참여했고, <경향신문>은 서울에서 전선판(戰線版)을 내고 있었으니, 신문 자체가 종군을 하고 있던 셈이지요.”
1968년 8월 종군기자 출신 언론인들은 휴전 이후 15년 만에 뜻깊은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종군기자 동지들의 친목단체로 동인회(同人會)를 조직하자는 움직임이 인 것이다.
“당시 모임을 갖고 보니 자리에 참석한 이는 59명이었고, 회장으로 김희종(金喜鍾)씨를 추대했습니다. 그 후 전선을 함께 뛰어다니던 종군기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떴습니다.
현재 생존한 종군기자는 저를 포함해 윤종현, 김진섭, 구본건, 문제안씨 등 5명뿐입니다. 동인회는 명예회원으로 영국 로이터통신 소속으로 6·25전쟁에 종군한 지갑종(池甲鍾) 유엔한국참전국협회장을 추대해 가끔 만나고 있습니다.”
—종군하면서 애로사항은 어떤 게 있었습니까.
“교통편과 통신수단, 너무도 까다로운 검열규정에 얽매여 현장에서 보고 느낀 생생한 상황을 충분히 후방 국민에게 알릴 수 없었던 점이 가장 큰 애로사항이었습니다.”
—당시 검열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1950년 9월 15일 국방부 정훈국장 명의로 발표된 ‘언론기관 및 종군기자에 대한 지시’를 보면 일간신문의 모든 ‘게라(교정쇄)’까지 검열받게 돼 있었습니다. 규정대로 하자면 거의 기사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기지에서 ×××기자발’로 비롯되는 기사원문 중 ○○부대라는 표현 외에 서술방법이 없으니, 실감나는 종군보도, 전방에서 나라 위해 목숨 바치는 이름 없는 장병들의 생생한 전투모습을 후방에 전하는 데 애로가 많았습니다.”
이혜복 고문은 <뉴욕 헤럴드 트리뷴> 도쿄지국장이었던 마거릿 히킨스 여사의 ‘한국종군기’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종군기에 기록된 6·25 초기 혼란했던 미군의 전투상황이 리얼하게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고문은 “선진적 검열제도와 종군기자에 대한 정확한 보도규정, 대우준칙 같은 것이 당시에 아쉬웠다”고 회고했다.
DJ정부, 한국에는 전사한 종군기자가 없다
6·25전쟁은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종군기자들의 취재 각축장이었다. 맥아더 사령관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을 동행취재한 미모의 마거릿 히킨스 기자를 비롯,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의 아들 랜돌프 처칠 기자는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전투에 종군했고, 필리핀 아키노 전 대통령의 남편인 베니그노 아키노도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6·25전쟁 당시 기자로 종군하다 17명(미국 10명·영국 4명·프랑스 2명·한국 1명·필리핀 1명)이 숨졌다. 이혜복 고문은 “헬기 추락 등 사고가 아닌 취재를 하다 숨진 기자는 한국의 한규호 기자와 미국인 기자 한 명뿐”이라고 했다. 6·25 첫날부터 서부전선 임진강 쪽 전황보도에 골몰했던 <서울신문> 한규호 기자는 끝내 피신을 못하고 북한군에 잡혀 순직했다. 그는 파주에 있는 ‘6·25참전 종군기자 추념비’(휴전회담 당시 유엔종군기자센터 자리)에 기록된 단 한 사람의 한국인 종군기자다.
북진하는 8사단에 종군, 멀리 한만(韓滿)국경인 초산까지 갔던 이필면 기자는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다 정훈부장 정원하(鄭元河) 소령과 함께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혜복 고문은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국방일보>를 통해 ‘한국은 전사한 종군기자 하나 없는 나라’라는 취지로 말하는 것을 보고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면서 “6·25전쟁 기간 동안 목숨을 돌보지 않고 펜을 든 용감한 우리 기자들 덕분에 민초(民草)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라고 했다.⊙
사진 : 서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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