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audio-visual

이난영의 눈물

marineset 2023. 6. 3. 04:45

 

 

이난영의 눈물

 

 

Ⅰ. 들어가며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인 1957년 이난영은 일제시기 부터 레코드회사 동료였으며 수없이 많은 공연에 함께 출연했던 가수 고복수의 은퇴공연 무대에 섰다. 당시 이 공연을 기념하여 마련된 KBS 라디오 프로그램의 녹음자료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 이난영의 육성이 포함되어 있다. 녹음자료에서 이난영은 고복수와의 추억담을 말해달라는 사회자의 요청을 받은 뒤,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회를 풀어놓았다.

네, 고선생님과 저와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또… 지금으로부터 27년 전 저는 고선생님보다 1년 먼저 앞서 오케레코드 회사에 입사했었습니다. 1년 후에 고선생님을 만나 뵙고 무대에서 같이 노래도 같이 했었고 지금 마흔 고개가 넘어서 같이 늙은 셈이죠. 오늘에 와서 고선생님의 은퇴공연을 볼 때, 저는 단지 가슴이 벅차고 눈물만 앞서서 울고만 싶은 생각밖에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잠시 울먹거림] 좋은 벗을 무대에서 잃어버린 것 같고 제 자신도 앞으로 무대 생활을 얼마 생명이 남지 않은 그런 기분이 들어서… 옛날만 새로워지고 옛날 추억이 그립습니다. 일본에 건너갔었을 때 고선생님이 여러 우리 동포들 앞에서 장구를 메고 그 신이 나게 칠 때 재일동포들은 얼마나 감격했으며 그때 시절을 지금 생각하면 오늘 시공관 무대에서 다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그 기분이 새로워집니다. 저는 요새 건강이 좋지 않아서 고선생님 은퇴공연에 출연 못할까봐 제일 걱정했습니다만, 다행히 죽지 않고 오늘의 마지막 무대를 같이 서게 된 것을 제일 기쁘게 생각하는 동시에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 오늘 방송도 마지막으로 생각할 때 저는 단지 감개무량할 뿐입니다. 이것으로 고선생님 앞으로 저희들을 떠나시더라도 잊지 마시고 마음만은 변치 말아 주셨으면 제일 감사하게 생각하겠습니다. 우리 동지 대표로서 제가 고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1


곧바로 이난영은 사회자의 곡 소개와 함께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데, 1절을 부른 뒤 격한 슬픔의 감정에 휩싸인 그녀는 2절에서는 노래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한 채 계속 흐느꼈다. 방송사고나 다름없었던 이날의 무대에서 이난영은 결국 옆자리에 있던 고복수의 도움으로 힘겹게 노래를 마칠 수 있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이보다 더 슬프게 불러진 적이 있었을까?

그런데 이난영은 이 무대에서 왜 그토록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던 걸까? 동료가수의 은퇴라는 사실이 주는 충격과 지난 인생에 대한 회한이 그 원인이었을 법하다. 하지만, 이난영은 매우 어린 나이에 데뷔했던지라 1957년 당시에도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젊은 나이였다. 동료가수의 은퇴공연에서 으레 느꼈을 법한 감상적(感傷的) 소회라고 하기에는 그 감정이 과잉의 상태에 치닫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한 사람의 가수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이난영이 가졌을 슬픔의 감정을 온전히 헤아리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6・25 동란에 남편 김해송을 잃은 이후 7남매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남편이 이끌던 악극단을 대신 운영하다가 실패를 거듭했고, 그 와중에도 어린 딸들을 훈련하여 연예계에 성공적으로 입문시키는 등 당시 그녀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설상가상 약물중독과 알콜중독 증상으로 건강 또한 악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난영의 또 다른 동료가수였던 남인수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도 이 무렵부터인데 기혼자였던 그가 불륜의 관계 맺기를 불사했던 것도 오랜 음악 동료의 자기파괴적 우울증에 깊은 동정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폐결핵 증상을 보이던 남인수는 이난영의 슬픔과 육체적 고통에 동병상련으로 공감했을 것이다. 이난영 또한 연하의 기혼남이었던 남인수에게 의지하고 매달렸으며, 불치병을 앓고 있던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피기도 했다. 하지만 세간의 화제를 뿌리고 불륜에 대한 사회적 비난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유지되던 이들의 끈끈한 관계 역시 1962년 남인수의 죽음으로 짧게 매듭지어졌다.

남인수와 이난영. 1950년대말의 사진으로 추정

같은 해 12월에 이난영은 미국 연예계에서 성공한 딸들(김시스터즈)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게 되는데, 이 초청 또한 남인수 사후 어머니의 우울증에서 위험신호를 감지한 딸들의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딸들과 라스베가스의 무대에 함께 서기도 하고 유명한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기도 한 그녀는(*참고글) 8개월여의 미국생활을 접고 1963년 8월 돌연 귀국한 뒤 한국내에서 ‘김보이스’ 등의 이름으로 연예활동하고 있었던 세 아들들의 음악적 전열을 정비하여 그 해 11월에 ‘김브라더스’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진출시킨다. 딸들의 성공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어머니의 주도면밀한 가족 관리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제 한국에서 홀로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이난영의 삶은 이후 1년 남짓 유지되다가 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의 자택에서 마무리되었다.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기록되었지만, 자살 가능성도 적지 않아 보인다. 어느 경우든 그녀의 죽음은 그녀가 겪었던 오랜 우울증 증상과 약물중독 등으로 얼룩진 피폐한 삶을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있다.

한 대중가수의 말년의 삶을 이렇듯 ‘슬픔’ 또는 ‘우울’이라는 감정적 측면에 주목하여 서술하는 것은 음악사에 대한 객관적 관찰을 소임으로 하는 음악학자의 글에서 기대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적 삶과 사적 삶이 뒤엉켜있는 가수와 같은 대중연예인들의 정서적 삶은 사회적 의미를 띠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그 주인공이 이난영과 같이 커다란 사회적 주목을 받은 이라면 더욱 그렇다.

애도 내지는 치유에 실패한 비정상적 슬픔의 지속 상태로서의 우울증과 멜랑콜리는 근대적 질병이다. 우울증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 나아가 자기의식의 심화과정에서 생기는 자기분열적 심리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애의 왜곡된 형식이다. 2 곧 자신의 일부로 여겼던 대상들의 상실을 곧 자기상실의 형태로 내면화하는 과잉의 자의식이 멜랑콜리와 우울증의 원인인 것이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들이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것도 이 때문인데, 그들은 대체로 평범한 사람들보다 자기애가 강할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 의해 표상되는 자신의 이미지들을 곧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에 그러한 이미지가 상실될 때 곧 무의식적 자기상실로 연결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난영의 우울증상을 임상병리학적 수준에서 검토하는 것은 이 글의 목표에서 벗어나 있다. 이 논문에서 드러내 보이고 싶은 점은 대중예술가로서 이난영의 사적 욕망이 현실의 모순적 구조에 의해 왜곡 형성되거나 좌절되는 지점들이다. 급변하는 근대적 삶의 요구 속에서 이질적이고 중층화된 방식으로 호명된 이난영의 페르소나는 굴절을 거듭하여 마침내 자기분열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물론 그녀의 비극적인 개인사에 해당하는 일일 수 있지만, 그녀의 노래, 그리고 대중연예인으로서의 성공과 좌절의 과정은 식민지배와 남북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얼룩졌던 질곡의 한국 현대사에서 대중의 욕망이 움직여갔던 파행의 과정을 파편화된 형태로나마 은유적으로 재현해 보이고 있다.

 

Ⅱ.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

이난영이 1932년경 고향인 목포 공연을 온 태양극단에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입단했을 때, 그녀의 꿈은 가수보다는 배우였다. 하지만, 태양극단에서 그녀는 극단의 허드렛일을 하는 아이로 착취당하기 일쑤였다. 3 1930년대의 연극계는 유성영화 시대에 돌입하여 대중적 인기가 치솟아 오른 영화와 힘겨운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극단들은 대중들의 흥미를 끌기 위한 막간(幕間)무대를 경쟁적으로 연출해냈고, 어린 이난영은 태양극단의 막간무대 가수로 처음 무대에 서게 된다. 4

태양극단의 막간무대에서 어린 이난영은 이미 재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극단은 그녀가 품고 있던 배우의 꿈을 실현시켜주지 못했다. 태양극단 소속으로 일본 오사카에 머물고 있던 1933년 당시 그녀는 태평레코드사에 발탁이 되어 <시드는 청춘>을 녹음함으로써 레코드가수로서의 데뷔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 일본 방문중이던 오케레코드사의 이철 또한 그녀를 발탁하여 자기 회사의 전속가수로 계약을 맺게 됨으로써 이후로 이난영은 1943년까지 오케레코드의 전속가수로서 활약하게 된다. 1933년과 1934년 사이 오케레코드사에서 녹음 발표한 <향수>, <불사조>, <고적> 등의 유행가들이 크게 히트하면서 이난영은 1935년 10월 대중잡지 <삼천리>에서 실시한 ‘인기가수 투표’에서 여자가수 부문 3위를 차지할 만큼 유명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1935년은 이난영의 대표곡인 <목포의 눈물>이 녹음된 해이기도 한데, 이 노래를 취입하기 직전인 8월에 <삼천리>에 실린 이난영 인터뷰를 보면 그녀가 여전히 배우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인터뷰에서 그녀는 ‘흠모하는 예술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가수 대신 외국의 여배우 둘을 다음과 같이 꼽고 있다. “조선분들이야 어떻게 말씀하겠어요? 구레타 칼보(*그레타 가르보)와 入江たか子(*이리에 다카코)가 좋아요, 같은 동성으로는.” 5

이리에 다카코(入江たか子, 1911~1995). 1931년에 찍은 사진.

미국 할리우드의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리에 다카코와 같은 일본 여배우 또한 ‘서구적 여성상’을 재현하는 배우였다. 6 여기서 이난영이 감수성 예민한 10대의 시기부터 품고 있던 욕망이 향하고 있는 지점들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이난영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이 시대 식민지 조선의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의 욕망이기도 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음악 문화는 음반과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초국가적 매스 미디어를 매개로 하여 처음으로 일상문화의 층위에서 ‘글로벌’을 의식하기 시작했으며 그 글로벌한 상상력을 통해 ‘로컬’을 또한 인식했다.” 7 이 시기 본격적인 도시 문화를 체험하기 전까지 조선인의 음악적 향수는 자신이 속한 물리적 공간에 한정되어 있었다. 다른 지역의 음악을 접하기란 거의 불가능했고, 설사 접한다 해도 ‘중심-변두리’의 구도를 설정할 수 있는 감성적 차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요컨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발표되고 불려졌던 1930년대 중반의 시기는 식민지 조선인들이 새로운 감성적 차원, 즉 ‘중심-변두리’의 심상지리(imagined geography)를 갖게 된 역사적 시점과 겹치는 것이다. 이러한 심상지리가 전제된 상태에서 <목포의 눈물>은 애초에 ‘향토노래’, 당시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기 시작하던 ‘신민요’의 변종으로서 호명된 노래였다. <목포의 눈물>은 1935년 1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오케레코드사에서 ‘향토노래 현상모집’ 광고를 하여 뽑힌 목포출신의 시인 문일석의 노래가사에 작곡가 손목인의 가락을 붙여 이난영의 목소리로 녹음한 뒤 그해 8월에 발표된 곡이다. 물론 양식적인 면에서 <목포의 눈물>은 당시의 전형적인 신민요와는 상당 부분 구별되며, 보통의 유행가에 가까웠다.

따라서 그것은 음반사의 상업적 고려였을 뿐이기도 하지만, 8 음반 라벨에까지 ‘신민요’라는 장르명을 붙여 발매되었다는 점은 <목포의 눈물>이 갖는 독특한 문화적 의미를 오히려 강조해주는 면이 있다. 즉 <목포의 눈물>은 유행가라는 당시로서는 ‘모던한’ 음악에서조차 요구된 지역색을 담은 노래, 다시 말해 ‘중심’을 의식하는 ‘변두리’의 노래였다는 점이다. ‘목포’라는 지역적 표상은 이러한 요구에 적절히 부응했는데 목포는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낙후된 소도시 이미지가 아니라 중국의 상하이와 같이 외래의 선진 문물을 향해 열려 있는 모던한 항구 도시로서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포의 눈물> 가사지에 실린 이난영의 사진

沙工의 뱃노래 감을거리며/ 三鶴島 파도 깁히 숨어 드는 데(때)/ 埠頭의 새악씨 아롱저진 옷자락/ 離別의 눈물이냐 木浦의 서름 三栢淵 願安風은 露積峰 밋헤/ 任 자최 宛然하다 애닯흔 情調/ 儒達山 바람도 榮山江을 안으니/ 任 그려 우는 마음 木浦의 노래 깁흔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엇지타 녯 傷處가 새로워진가/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港口의 맷는 節介 木浦의 사랑
-<목포의 눈물> 가사 전문

목포 출신의 젊은 여가수 이난영 역시 모든 면에서 이 노래의 주인공이 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노래 속 ‘부두의 새악씨’가 흘리는 ‘이별의 눈물’은 사실상 어린 이난영의 욕망이 도달하게 될 예견된 좌절의 지점을 복선처럼 그려주고 있다.

그녀(이난영의 페르소나인 ‘부두의 새악씨’)는 자신의 욕망을 좇아 항구를 떠나고 싶지만,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그녀로 하여금 ‘아롱저진 옷자락’을 여미며 항구에 머물 것을 요구한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녹음한 <목포의 눈물>이 유례없는 히트를 기록하면서 이난영은 이러한 수동적이고 전통적인, 나아가 ‘신파적인’ 여성상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물론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조선의 그레타 가르보’를 꿈꾸며 일본행 연락선에 과감히 몸을 실었던 실제의 이난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Ⅲ. 이난영과 <다방의 푸른 꿈>

<목포의 눈물>을 포함한 식민지 시기 유행가의 공통되는 2박 내지 4박의 기초 리듬(이른바 ‘뽕짝 리듬’)은 19세기의 케이크워크(cakewalk)나 래그타임(ragtime), 20세기 초반의 폭스트롯(foxtrot), 나아가 스윙(swing) 등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서구 댄스홀 문화의 산물이다. 이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미국의 음반 산업을 중심축으로 초국가적 대중음악 문화가 형성되면서 세계적으로 공유케 된 새로운 의미의 음악적 공통 관습(common practice)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폭스트롯’과 ‘스윙’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모던걸과 모던보이의 이상향을 표상하던 할리우드 영화의 배경음악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모던한 리듬이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의 음반산업과 대중음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1930년대 중후반의 시기는 이렇듯 새롭게 형성된 대중문화를 통해 ‘초기 세계화’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식민지적 현실에서 그러한 세계적 조류는 언제나 일본을 경유해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레코드음악의 조류를 진단하는 태평레코드사의 문예부장 민효식의 다음 인용문을 보면 앞 절에서 살펴보았던 ‘신민요’에 대한 추구 또한 일본의 경향을 좇은 것이며, 마찬가지로 일본에서의 유행을 좇아 ‘재즈’ 음악이 식민지 조선에서도 유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民謠’가 한창 유행되던 시기로 말하면, 아직 일반이 레코-드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없엇을 때, 부득이한 현상으로서의 나타낫든 바 사실이겟고, 그 다음부터 한동안 유행되든 영화해설 등도 역시 東京에서부터 건너온 潮流이엿고 그 뒤 ‘流行歌’의 유행도 東京방면의 유행 그대로를 따러서 되엿든 것이 확실한 바입니다. 그러면 최근에 와서 갑작이 새로히 유행되고 잇는 ‘新民謠’ 역시 東京방면의 고전풍에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옛 것을 다시금 음미하여 보고 캐내여 다시금 불러보리라는 데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봅니다. 그럼으로 이 땅의 레코-드界에도 마지하려는 새해부터는 東京방면에서 가장 만히 지금 유행의 중심점을 이루고 잇는 짜-즈盤이 유행될 것을 미리 예측하고도 남음이 잇을 것입니다. 벌서 얼마 전부터도 이 방법을 시험하여 본 회사가 잇섯스나, 이 해부터는 점점 만허저 갈 것이 사실입니다. 9

이난영은 1935년 <<삼천리>>에서 행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에서 여가수 부문 3위에 올랐는데, 당시 1위와 2위를 차지한 왕수복과 선우일선은 모두 기생출신 가수였다. 이난영은 기생출신이 아닌 만큼 ‘민요’와 ‘신민요’에 능했던 기생출신 가수들보다는 좀 더 모던한 음악, 나아가 ‘재즈’에 강세를 보였고, 실제로 그러한 음악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같은 오케레코드사 소속의 작곡가이자 가수 겸 연주자였던 김해송과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하게 된 것(이난영이 스물 한 살 되던 1936년 12월 24일에 결혼)도 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 교감만이 아니라 김해송이 추구한 재즈풍의 모던한 음악과 이난영의 음악적 지향이 공명을 이루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오케레코드사 전속 시절 김해송의 사진

식민지 조선의 음반시장이 정점에 이르던 1939년과 1940년에 이난영은 당시 평균적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세 곡의 두드러지는 ‘재즈’ 스타일의 곡을 발표한다. 스윙재즈 스타일의 <바다의 꿈>(1939)과 블루스가 가미된 <다방의 푸른 꿈>(1939), 그리고 경쾌한 집시 스윙 스타일의 <항구의 붉은 소매>(1940)로 노랫말은 모두 조명암이 썼고, 작곡은 각각 박시춘, 김해송, 손목인이 담당했다. 이난영은 <바다의 꿈>과 <항구의 붉은 소매>에서 의미 없는 음절로 선율을 흥얼거리는 일종의 ‘스캣(scat)’까지 선보이며 재즈 보컬리스트로서의 능력을 과시하는데, 두 곡 모두에서 스윙 반주에 맞추어 가는 리듬감이 탁월하며 고음역과 저음역을 오가며 음색을 조율하는 방식이 <목포의 눈물>과 같은 여타의 유행가를 부를 때와는 색다른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바다의 꿈>에서 각 절 끝부분(1절 가사의 ‘시원스런 꿈이나 꾸자’ 부분)의 저음 처리는 확실히 숙련된 재즈 보컬리스트의 면모를 보여주며, 그녀가 이미 일반 공연 무대에서도 이러한 재즈 스타일의 곡을 익숙하게 부르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큰 인기를 얻었던 <다방의 푸른 꿈>은 중일전쟁 기간 일본의 블루스 음악 유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10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작곡했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고요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가만히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 부르누나 부르누나./ 흘러간 꿈은 찾을 길 없어/ 연기를 따라 헤매는 이 마음/ 사랑은 가고 추억은 슬퍼/ 블루스에 나는 운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 <다방의 푸른 꿈> 1절 가사


이난영, <다방의 푸른 꿈(1939)>

<다방의 푸른 꿈>을 부르는 이난영에 대한 황문평의 다음과 같은 회고담은 다소간 과장되거나 윤색된 기억의 가능성을 감안한다 해도 <목포의 눈물>을 부를 때와는 전혀 다른 그녀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

일제말엽 부민관(현 세종문화회관 별관) 무대에서 이난영은 검은 터번 머리에 담배를 피워 물고 약간 코에 걸린 목소리로 아주 애수에 잠긴 노래를 불렀다. 곡목은 <다방의 푸른 꿈>, 아마 올드팬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내뿜은 담배연기 끝에 희미한 옛추억이 보인다…” 이 노래는 이난영의 진짜 히트넘버였다. 11

식민지 조선의 모더니티를 분석한 한 논문에서 저자인 유선영은 식민지 조선의 대중들이 식민지적 현실에서 공적 영역을 상실한 대신 사적 영역의 과잉 현상을 겪고 있었다면서, 미국이 19세기말부터 일찍이 조선인들에게 기독교와 병원, 학교 설립 등을 통해 긍정적인 문명화의 이미지를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가 형성되는 시기에는 할리우드 영화와 재즈 음악을 통해 근대적 신체의 자유와 자유연애 사상을 일깨웠음을 지적한다. 당시 제도나 법률의 영역에서 조선을 지배한 것은 일본이었을지 모르지만 사적 욕망과 관련된 문화적 영역에서 조선의 대중들을 지배한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다는 것이다. 12

이난영의 사적 욕망 또한 할리우드 영화와 재즈 음악의 본고장인 미국과 결부된 것이었고,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그녀보다는 <다방의 푸른 꿈>을 부르는 이난영이 그러한 욕망의 실현에 좀 더 가깝게 다가선 모습이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었건 미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었건 이난영의 이러한 사적 욕망은 그 온전한 실현을 맛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욕망 자체가, 제국주의적 세계질서와 초국가적 문화산업의 취약한 변두리 소비시장에 지나지 않았던 식민지적 현실에서 중심지를 향한 동경과 함께 싹튼 것으로서 그 중심지의 세력 판도에 따라 쉽게 좌절되고 상실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Ⅳ. 이난영과 조선악극단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주요 레코드사는 각각 전속 가수들뿐만 아니라 전속 악단을 거느리고 레코드 홍보를 겸하여 순회공연을 다녔다. 이난영이 전속계약을 맺고 있던 오케레코드사는 특히 이러한 순회공연에 많은 힘을 쏟아 전속가수들과 전속악단으로 구성된 공연단이 전국은 물론 만주일대까지 순회공연을 다녔다. 공연단의 일원으로서 이난영과 김해송 부부 역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연 무대에 동반 출연했는데 재즈와 즉흥연주에 능했던 김해송의 라이브 무대에서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13

김해송은 1937년 콜럼비아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긴 뒤 2년여의 공백 기간을 가졌지만 1939년 가을에 오케레코드사로 복귀한 뒤 아내 이난영을 위한 <다방의 푸른 꿈>을 작곡하는 등 레코드 녹음과 라이브 무대 활동 양면에서 다시 큰 활약을 보이게 된다. 김해송이 오케레코드사에 복귀하던 1939년경 오케레코드 공연단 규모는 매우 커져서 ‘오케그랜드쇼단’이라는 공식명칭을 쓰고 있었다. 14 오케그랜드쇼단 내에 CMC 밴드, 오케싱잉팀, 아리랑보이즈(김해송 포함), 저고리시스터즈(이난영 포함) 등의 팀들이 있어서 때로는 독립적으로 활동했다.

오케그랜드쇼단은 1939년 3월에 일본 순회공연까지 성사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악극단’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이 일본 순회공연은 일본의 유력 흥행업체 요시모토(吉本)와의 제휴를 통한 것이었는데 이때 “요시모토 측에서는 ‘오케그랜드쇼’라는 이름보다 조선의 향토색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쓰는 것이 흥행에 유리할 것이라 했고, 이에 따라 새롭게 ‘조선악극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름을 바꾼 덕인지는 몰라도 일본 공연은 대성공으로 마무리되었고, 이후 한동안 오케그랜드쇼와 조선악극단이라는 이름이 뒤섞여 함께 사용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악극단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15

조선악극단의 일본 공연에는 이난영도 참여했다. 일본 현지에서 조선악극단이 일본 영화 <사려깊은 부인(思ひつき夫人)>에 특별출연하여 공연 장면의 일부가 기록되었는데, 공연장면은 대부분 한국 전통음악을 공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측 흥행업체에서 일본 순회공연을 앞둔 오케그랜드쇼단으로 하여금 ‘오케그랜드쇼’와 같은 영어식 명칭을 버리고 ‘조선악극단’이라는 한자 명칭을 새롭게 요구한 것이나 영화 속에 포착된 악극단의 공연이 재즈 등의 모던한 음악보다는 조선 전통의 색채가 드러나는 음악이라는 점은 마양카이의 분석대로 일본인들의 시각에서 “한국 전통음악은 정격의 ‘동양’ 문화이면서도 한국의 지역성과 비교할 때 현대화된 일본 문화의 우수성을 돋보이게 해주는 문화” 16일 수 있다는 점을 흥행의 관점에서 노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7


1939년에 개봉한 일본 영화 “사려깊은 부인思ひつき夫人”에서 조선악극단 공연 장면. C.M.C밴드를 지휘하는 작곡가 손목인을 비롯하여 김정구, 고복수 등이 노래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밴드 연주자들을 제외한 무대 위의 단원들은 모두 한복 차림이며 신민요풍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동영상 후반부 고복수가 장구를 치며 노래할 때 어깨 왼쪽으로 이난영이 보이며 오른편에 소고를 든 남인수도 보인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돌입하고 총력전체제를 강화하면서 이난영을 비롯한 식민지조선의 음악인들은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조선총독부의 선전도구가 되는 것을 사실상 피할 수 없었다. 1941년 <<신세대>>에 게재된 「황군위문 회고 좌담회」 기사를 보면 일찌감치 ‘靑山哲’로 창씨개명을 한 오케레코드사 대표 이철을 비롯하여 이난영, 김해송, 김정구, 장세정 등 조선악극단의 주요 음악인들이 일본군 위문공연을 다녀온 소감을 밝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8 다음의 대화 부분에서 위문공연의 프로그램 윤곽과 이난영 등이 불렀던 군국가요를 확인할 수 있다.

기자: 대개 어떤 푸로그람으로 공연을 하시었던가요?
김상진: 동경에서 흥행했던 푸로그람을 그대로 했었습니다.
기 자: 동경서 한 푸로요?
김상진: 네 아리랑뽀이스와 저고리씨스터, 군가, 가요곡, 무용, 경음악 등이지요.
김해송: 대개는 경음악에서부터 시작하여 유쾌한 것을 많이 했고 또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때로는 향토적인 것도 했습니다.
기 자: 장세정씨는 무슨 노래를 많이 부르시었습니까?
장세정: <軍國의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김상진: 장은 東京, 名古屋, 小倉 등지에서 공연했을 때에도 <軍國의 어머니>를 노래하여 대환영을 받았으니까요.
기 자: 이난영씨는 무슨 노래를 부르셨습니까?
이난영: 저요? <卿國의 어머니>를 많이 불렀어요.

태평양전쟁과 함께 일본은 ‘적국’으로 규정한 미국과 관련된 모든 대중문화를 검열하고 금지했다. 1941년 이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이난영은 더 이상 재즈 스타일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고 1942년에는 ‘小林玉順’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했다. 19

 

Ⅴ. 이난영과 김시스터즈

1945년 8월 갑작스럽게 찾아온 해방은 김해송과 이난영 같은 대중음악인들에게는 분명히 큰 기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친일에 동참했다는 껄끄러움이 없지 않았을 테지만 사실상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었고, 일본과 긴밀히 연관을 맺고 있던 레코드산업의 인프라가 손실되면서 적지 않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검열 걱정 없이 자유로운 창작과 연주활동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오케레코드사와 조선악극단의 동료 작곡가였던 박시춘은 해방되던 8월 15일 밤에 “공연을 무료로 공개해서 금지되었던 ‘미제 노래’ 재즈까지 연주하며 관객을 열광케 했다” 20고 한다.

김해송 역시 해방직후부터 ‘K.P.K악단’을 조직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1944년 이철의 사망으로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조선악극단의 명맥을 사실상 K.P.K악단이 이어가게 된다. 21 남편 김해송의 활발한 활동에 보조를 맞추면서 이난영 또한 적극적인 연예 활동을 벌였는데, 동료가수였던 신카나리아의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들어보면 일제말 억압당했던 그녀의 미국 대중문화 소화능력이 미군정기부터 이미 빛을 발했던 듯하다.

공연일자는 1945년 10월 18일로 기억한다. 나와 이난영, 장세정이 출연해서 합창도 하고 각각 솔로도 했는데 그때 벌써 이난영은 곡목을 기억할 수 없지만 영어로 미국 노래를 불렀다. […] 연합군 위문 공연을 출발점으로 해서 김해송 씨는 본격적인 쇼단을 구성해서 주한 미군을 위한 정기적인 위문 공연을 가졌다. 22

이난영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적극적인 태도를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김시스터즈의 멤버이기도 했던 딸 김숙자의 다음과 같은 증언을 보면, 당시의 여성들이 갖기 어려웠던 과감한 결단력과 무대에 대한 열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김해송)는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을 제작하고 있었고, 로미오 역을 맡을 배우를 찾고 있었어요. 하지만 로미오역에 적임자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머니(*이난영)가 어떻게 했는 줄 아세요? 어머니는 아름다운 긴 머리를 갖고 있었는데 그걸 남자처럼 짧게 깎아버렸어요. 그리고는 로미오처럼 의상을 차려입은 뒤 아버지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 이렇게 말했어요. “여기 로미오가 왔습니다.” 나는 그녀가 밤낮없이 춤 연습 하던 걸 기억해요. 나중에는 <칼멘>에서 돈 호세 역도 했지요. 또 남자 역을 한 거지요. 그들은 무대에 정말 헌신적이었어요. 23

K.P.K악단의 주요 멤버들. 왼쪽부터 장세정, 윤부길, 신카나리아, 김해송, 이난영, 이봉룡.

김해송이 이끄는 K.P.K악단은 19세기말과 20세기초반 미국의 초기 뮤지컬과 흡사한 방식으로 공연을 시도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버라이어티쇼와 레뷔 등 삽입 단막극이 주를 이루었지만, 점점 장편 뮤지컬 작품이 시도되는 일이 잦아졌다. 그가 직접 곡을 써 무대에 올린 <칼멘> 같은 작품은 당대의 명사들이 관람을 할 정도로 대중 공연물로서의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24 해방공간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난영은 남편의 K.P.K악단 무대를 통해 10대 때부터 꿈꿔왔던 배우의 꿈을 이루어내는 듯했다.

하지만, 1950년에 발생한 6•25전쟁은 폭격을 맞아 집터만 남은 이난영의 서울집이 상징하듯 모든 것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남편 김해송이 납치되어 북으로 가는 길에 죽게 되면서, 이난영은 7남매를 거느린 가족의 생계를 도맡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김해송이 자진 월북했다는 식의 풍문 또한 이난영과 그녀의 가족을 괴롭히는 일이었다. 25

전쟁 후 선장을 잃은 K.P.K악단을 이난영이 직접 운영했지만 실패를 거듭하게 되고 끝내 악단은 해체된다. 크고 작은 악극단들이 난립해서 경쟁을 벌이는 속에서 1954년에 ‘이난영 악단’을 창립하여 재기를 꾀하지만 이조차도 1년 남짓 유지되다가 해산되고 만다. 남편 김해송이 발휘했던 지도력을 그녀 혼자 힘으로 대신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 문화가 본격 상륙하면서 한국 대중문화는 일제시기부터 싹을 틔웠던 미국화의 길을 급격하게 가속화했다. 특히 미군이 대거 남한 땅에 주둔하면서 이들을 위해 제공되는 유흥오락 문화가 꽃을 피웠는데, 특히 전국 곳곳에 있던 미군부대 부변의 여러 클럽들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의 대중음악가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음악이 한국 땅으로 유입되고 재생산되는 문화적 절충지이기도 했다.

이난영은 일찌감치 특유의 감각으로 이러한 상황변화를 읽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미국이라는 대중문화의 중심지를 향한 욕망을 키우지만, 이제 30대 중반을 넘어 40대를 향해 가는 자신이 더 이상 그러한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결국 이난영이 그녀의 딸들을 김시스터즈로 키워냈던 것은 ‘살아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녀 자신의 욕망의 대리인을 찾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린 김시스터즈 자매들로서는 견디어내기 어려운 혹독한 시련이었을 것이다.

전쟁중이던 1951년경 부산으로 피난온 이난영이 미군 위문공연을 다니던 때부터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의 김시스터즈는 어머니의 조련을 받아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들 자매는 비포장 자갈밭을 음주운전으로 거칠게 달리는 트럭에 실려 추운 날씨에 꽁꽁 언 채로 천막 무대를 전전하는 등 사실상 아동착취에 가까운 연예활동을 하고 있었다. 26 어린 김시스터즈의 이런 모습이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태양극단의 막간무대에 섰던 어린 이난영의 모습에서 얼마나 달라져 있었던 것일까?

1962년에 미국에서 발매된 김시스터즈의 데뷔음반 재킷 표지.

김시스터즈의 경우 오래지 않아 한국이라는 변두리 땅에 머물지 않고 미국이라는 대중음악의 중심지로 진출했다는 점에서 어머니 이난영과는 달랐다. 27 하지만, 김시스터즈의 미국 연예생활이 쇼 비지니스적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 할 수 있지만 대중예술의 창조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점수를 주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난영의 주도면밀한 기획 아래 노래 실력만이 아니라 춤 실력과 다양한 악기연주 등의 실력 등을 갖추고 있었던 그들은 무대 위에서 보여줄 것이 많았고 미국의 청중들로 하여금 ‘동양에서 온 소녀들’에 대한 호기심과 이국적 취미를 충족시켜줄 수 있었다. 그들이 라스베가스에서 벌어들인 수입의 규모는 이전과 비할 수 없이 커졌지만, 주로 미국대중음악의 히트곡에 대한 커버송들과 함께 ‘동양적’이거나 이국적인 이미지를 뒤섞어가는 그들의 공연은 기본적인 성격상 K.P.K악단과 함께 한국에서 미군들을 대상으로 하던 위문공연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에게 [*C.M.C.나 K.P.K 악단의] 쇼들은 미국 문화의 지배력을 보증해주고 한국인들이 이를 열정적으로 흉내내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얻게 해주는 기본적인 오락거리를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 문화가 미국문화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여긴 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에 대한 선입견적 관념들을 연극적으로 적용했을 뿐만 아니라 공연에서 서양적 요소와 동양적 요소를 모두 포함시킨 것(서양식 이름들을 쓰고 미국의 “스탠다드” 곡들을 연주하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잘 알려진 노래들을 포함시킨 것)은 전통적인 한국문화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서양 문화 모방과 동양적 성격 유지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8

 

Ⅵ. 나가며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과 <항구의 붉은 소매> 등을 작곡한 손목인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중 가요계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일본에서 작곡 생활을 할 때부터 줄곧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생각은, 현대 대중음악의 본 고장인 미국의 팝 시장을 돌아보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프랭크 시내트러, 앤디 윌리엄스, 토니 베네트 등 젊은 시절 이들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잘 부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국에 가볼 기회를 만들어야지’라고 벼르고 있었다. 29

손목인은 1968년 여름 파월장병 위문공연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뒤 마침내 자신의 오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미국에서 음악가로 성공해 보리라고 했던 그의 꿈은 쉽게 좌절됐다. 브로드웨이 거리의 악사들만 보고도 스스로 “초라해지고 거인국에 온 난장이 같은 기분으로 주눅이 들었”던 그는 사실상 막노동꾼 신세로 전락했고, “유일한 위안은 일과 후 여기 저기 음악이 있는 거리를 찾아다니며 듣는 일이었고, 일요일이면 브로드웨이의 레코드사 녹음실에 가서 가수들의 녹음 현장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처음 가본 곳이 세계 굴지의 콜롬비아레코드사였다. 누런 피부의 동양인이 그것도 빵떡모자 하나를 달랑 뒤집어쓰고 간 초라한 모습에 레코드사 직원들은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 “나는 한국에서 온 작곡가인데 당신들의 음악을 보고 배우고 싶어왔다”며 통사정을 한 후에야 가까스로 녹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곳의 가수들에게 내가 작곡한 곡을 주어 취입토록 시도해 보겠다는 내 나름대로의 계획은, 아니할 말로 명함도 내밀 수 없을 정도로 내 기를 팍 죽여 놓는 스케일이 큰 시설과 음악이었다. 30

손목인이 미국의 음악가들을 대상으로 느꼈던 열등감과 콤플렉스는 물론 타국생활의 고독감과 함께 한껏 과장되고 부풀려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한 고독감 자체가 식민지 시기부터 가졌을 피식민지 예술가의 열패감에 기원을 둔 뿌리 깊은 감정이기도 했다. 식민지의 작곡가로서 커리어를 시작할 때부터 사실상 그는 자신이 작곡한 히트곡 <타향살이>의 주인공처럼 음악적 ‘고향’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그 음악적 고향이 ‘조선’이건 ‘미국’이건 아니면 ‘일본’이건 그는 어느 곳으로도 되돌아갈 수 없었다.

이난영 역시 마찬가지다. 해방과 6•25전쟁 후 본격화된 미국음악의 영향 아래 한국의 대중음악계는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로 돌입하면서부터 새로운 재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음악의 영향을 발 빠르게 흡수한 음악(팝 계열 음악)이 새로운 주류를 차지하면서 기존의 음악은 비주류로 밀려난 것인데, 31 이 과정에서 이난영은 손목인 등 식민지 시기의 음악동료들과 함께 후자로 분류되고 만다. 이난영의 음악적 자아는 그 속에서 또 한 번의 자기상실과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이난영은 너무 일찍 ‘흘러간 옛노래’의 가수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해방후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이 표상하는 식민지 시기의 민족주의적 상실의 코드로 끊임없이 호명되었다. 그녀의 음악적 자아는 늘 그렇게 외부로부터 호명되고 재규정되어 왔으며, 거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은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대중음악인의 숙명 가운데 일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 시기에서 시작하여 6•25와 냉전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중심과 변두리의 문화정치적 권력 관계 속에서 이난영은 그러한 숙명을 자기파괴적으로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난영의 인생이 불행과 슬픔으로만 점철된 것은 물론 아니다. 또한 그러한 불행과 슬픔은 상당 부분 그녀 자신이 책임져야 할 내밀한 개인사적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난영이 대표하는 식민지 시대의 유행가(나아가 해방후 이난영과 동시대의 한국 대중음악)가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지속화된 열등감과 자기상실을 도외시한 채 한국 초기 대중음악사를 논하는 것은 절반의 진실을 숨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국음악사에 대한 자기 폄훼가 아니라 오히려 생산적 독해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 ‘식민적 우울’을 직시함으로써만 비서구 음악으로서 초기 한국 대중음악이 갖는 역설적 잠재력, 곧 ‘한국적 블루스’의 탈식민적 함의를 냉정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난영의 경우 그것은 또한 그녀가 불렀던 전통 민요들과 <목포의 눈물>, 그리고 <다방의 푸른 꿈> 사이의 단절들을 세심하게 이어냄으로써 그녀의 분열된 정체성을 하나로 되살려 내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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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고복수 은퇴공연 관련 KBS 라디오 프로그램 비공개 녹음자료. 이준희 개인소장 자료에서 이난영 육성 녹음 부분만 건네받은 뒤 필자가 직접 녹취했음. 고복수 가수생활 26년을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고복수 은퇴공연 추진위원회’까지 결성되면서 스타급 가수들이 총동원된 고복수 은퇴공연은 “1957년 8월 8일부터 6일간” 서울 명동에 있던 시공관에서 이루어졌다(<경향신문>, 1957년 8월 10일자 4면 기사 참조). 라디오 프로그램의 정확한 방송일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
2.그래서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과 멜랑콜리를 긴밀하게 연결시킨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슬픔에는 없는 멜랑콜리만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이유 없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부끄러움 없는 자기 비난’이다. […] 사랑하는 대상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애도 작업이란 한마디로 그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나르시시스트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상실할 수 없는 곳에 연인을 안치시킨다. 곧 자기 마음 한 귀퉁이에 연인을 내면화하고 자기와 동일시한다.” 김동규, <<멜랑콜리의 미학>>(문학동네, 2010), 350~351쪽. ↩
3.“막상 따라나섰더니 어디 처음부터 ‘카추샤’고 ‘춘향’이고를 시켜주더이까? 처음엔 밥도 시키고 부엌에 불도 떼이게 하고. 여배우인 것이 아니라 계집종년인 셈이었지요. 어쨌든 이럭저럭 그 극단을 8개월 동안이나 따라다니던 끝에 大阪에까지 흘러갔습니다.” 「인기가수의 예술・사생활・연애 – 花發風多雨의 이난영양」, <<삼천리>> 7권 7호, 1935.8. ↩
4.연출가이자 극작가였던 유치진이 막간무대를 질타하는 다음의 인용문에서 (엘리트 문인의 경직된 도덕주의적 시각을 감안해야겠지만) 막간무대에 선 어린 이난영의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최후로 하나 부언하는 것은 막간이다. 이 막간의 존폐문제는 고사하고라도 아직 배꼽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 소녀를 등장시켜 놓고 그 같은 정욕적 동작과 대사를 시키는 것을 보고 아니 놀랄 수 없었다. 아무리 새디즘이 발달된 현대기로서니 그는 너무도 비인간적인 영업정책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아직 중국에 남아 있는 소아 창부의 야만적 폐풍에 의분을 느끼는 자이거늘 하물며 우리의 무대에서 소녀로 하여금 그같은 에로서비스를 시키는데 어찌 불쾌를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자중하여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유치진, 「극평 연극사의 공연을 보고」, <<동아일보>>, 1933.5.9, 김호연, 「한국 근대 공연예술 형성에 관한 일고찰」, <<동양학>>제36집, 2004.8., 88쪽에서 재인용. 특히 다음의 인용문에서는 이난영이 불과 몇 해 전까지 몸담고 있었던 ‘태양극단’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흥미롭다. “막간이란 연극을 위한 막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은 연극보다는 막간을 좋아하고 막간을 보기 위하여 보기 싫은 연극을 참고 보는 것이다. 즉 말하면 태양극단의 연극은 그들 손님에게는 불가분의 임생원 넌센스 스케치나 김소군, 김우자의 저급무용보다 매력이 없는 것이다.” 유치진, 「극단시평 – 이원만보」, <<중앙>>, 1934.2., 김호연, 같은 논문 83쪽에서 재인용. ↩
5.「인기가수의 예술・사생활・연애 – 花發風多雨의 이난영양」, <<삼천리>> 7권 7호, 1935.8. ↩
6.이리에 다카코는 <곡예사의 사랑>, <기온의 자매들>, <동경행진곡> 등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일본의 여배우다. 다음의 인용문을 참고할 것. “서구적 여성상을 연기하는 스타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이리에가 메이지 중기의 전근대적 곡예사를 연기함으로써 계급과 시대가 교차 혼종되고, 영화 관람성의 상당 부분이 바로 그녀의 연행에 집중되게 된다.” 김소영, <<트랜스: 아시아 영상문화>>(현실문화연구, 2006), 558쪽. 강조는 인용자. ↩
7.최유준, 「1930년대 한국 도시음악문화의 식민적 근대성과 월드뮤직 퍼스펙티브」, <<음악학>>16권, 2008, 216쪽. ↩
8.이 시기에 지역색을 드러내는 신민요풍의 노래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193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의 레코드 판매 경향에 대한 주요 레코드사 문예부장들의 다음과 같은 공통된 진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레코-드를 통해서 아직 조선에서 일반에게 알여지는 노래의 종류는 말하면 ‘流行歌’, ‘民謠’(이것은 純 朝鮮傳來의 그 지방 지방의 소리), 또 유행가도 아니고 민요도 아닌 그 중간식 비빔밥 격인 ‘新民謠’로서 이것은 在來의 朝鮮소리를 얼마간 그냥 본떠다가 音譜를 西洋악보에다 마춰서 부르는 것으로 이것이 近者에 와서는 가장 만히 유행되는 것이 사실임니다. 그 다음에는 ‘넌센쓰’ 또는 영화 해설 등이 잇스나 ‘넌센쓰’는 별로히 환영을 밧는 줄 몰으겟스며 영화 해설은 수삼년 전 보다는 오히려 현저히 退勢되여 아주 미약하게 되엿슴니다. 그박게도 桂貞植氏나 鄭勳模여사갓흔 純예술가들의 노래판은 그 고상한 음악을 이해할만한 극히 제한된 음악가 가정 이외에서는 환영을 못밧는다는 현상이니 새해에 잇서서도 역시 前年의 前轍을 밟어서 新민요풍의 노래가 그 중 만히 유행될 것으로 미더짐니다.(콜롬비아레코드사 문예부장 이하윤)” “얼마전까지는 ‘流行歌’가 만히 유행하여 왓섯다. 이 유행가는 얼마간 朝鮮의 내음새가 드러잇스면서, 외국의 곡에다 그냥 마춰 반주를 하여 왓섯든 고로 일반이 꽤 환영하드니만 그 뒤부터는 차츰차츰 좀더 朝鮮의 고전 예술을 캐여내기를 즐겨하고 鄕土色이 흐르는 그러한 종류의 노래를 일반이 더욱 환영하는 현상으로 되여, 다음에는 ‘新民謠’라는 새로운 형식의 노래가 만히 유행하게 되엿다.(빅타레코드사 문예부장 이기세)” 「新春에는 엇든 노래 流行할가」, <<삼천리>>, 제8권, 제2호, 1936.2. ↩
9.「新春에는 엇든 노래 流行할가」, <<삼천리>>, 제8권, 제2호, 1936.2. ↩
10.일본에서 블루스는 1937년 중일전쟁기에 아와야 노리코(淡谷のり子)의 <이별의 부루스(別れのブルース)>(1937)가 크게 히트를 치면서 유행하게 된다. 당시 사교댄스 양식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진 이러한 ‘일본식 블루스’는 미국 본토에서 1920년대부터 유행한 블루스와는 양식적 유사점을 찾기 쉽지 않다. 이런 ‘일본식 블루스’가 일본에서 잇달아 성공하면서 식민지 조선에도 흘러오게 되는데, 박향림이 1938년에 노리코의 <비의 부루스>를 번안한 <열정의 부르스>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창작곡 <희망의 부르스>를 발표했다. 이 시기에 여러 레코드사에서 일본식 블루스곡을 담은 음반을 경쟁적으로 발매했는데, 같은 시기에 발표된 <다방의 푸른 꿈> 역시 이러한 블루스 붐을 의식한 곡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방의 푸른 꿈>은 당시의 일본식 블루스의 전형성에서 상당 부분 벗어나 좀 더 재즈적인 맛이 풍기며 블루노트 사용이 두드러지는 등 일본식 블루스보다 더 미국식 블루스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식 블루스의 성립과 식민지 조선으로의 유입 과정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사항은 다음 논문의 5장을 참조할 것. 최유준, 「블루스와 슬픈 음악의 정치학」, <<음악학>>22호, 2012. ↩
11.황문평, 「이난영은 블루스의 한국적 진수」, <<경향신문>>, 1980.10.22. ↩
12.유선영, 「육체의 근대화 – 아메리칸 모더니티의 육화」, <<언론과 사회>> 9권 4호, 성곡언론문화재단, 2001, 참조. ↩
13.이 시기 김해송의 무대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할 것. 이준희, 「김해송 무대음악 활동 초탐」, <<대중음악>>9호, 한국대중음악학회, 2012. ↩
14.“오케레코드 운영자 이철은 1938년 1월 조선녹음주식회사(1941년 2월에 조선연예주식회사로 명칭변경)를 따로 설립해 음반사업과는 별도로 공연사업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고, 1938년 10월부터는 오케그랜드쇼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준희, 같은 논문, 94쪽. ↩
15.문화콘텐츠닷컴(http://www.culturecontent.com) ‘조선악극단’ 항목 설명. ↩
16.Roald Maliangkay, “Koreans Performing for Foreign Troops: The Occidentalism of the C.M.C. and K.P.K.”, East Asian History, No. 37, December 2011, 전자 출판본.(http://www.eastasianhistory.org/37/maliangkay), 60쪽. ↩
17.마양카이의 분석은 식민지 시대의 ‘민요’에 대한 다음의 분석과도 일맥상통한다. “당시의 조선에서 불리던 어떤 종류의 노래가 ‘민요’라는 개념으로 묶이는 것은 문명국에서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이미 사라져 가고 있는 ‘민요’를 찾아 동양(미개)으로 향하는 서구인(백인)의 문화인류학적 시선 속에서, 그리고 같은 유색인종으로서 식민지를 획득한 일본의, 영유지로의 관심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의 ‘민요’ 개념의 도입은 식민지로 편제되어 가는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임경화 편저, <<근대 한국과 일본의 민요 창출>>, 소명출판, 2005, 164쪽. ↩
18.이 좌담회의 대화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철의 언급에서 당시에 조선을 바라보는 일본 내지인들의 일반적 시각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의 공연을 보시고 조선의 인식을 새로 하시는 분이 무척 많았습니다. 현지에 계신 대부분의 병사가 내지에서 바다를 건너 바로 대륙으로 가신 분들이어서 오늘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지금도 호랑이가 나오는 미개지로 알고 계신 분이 많은데 그곳에서 왔다는 우리 악극단이 의외로 국어(*일본어)를 능란히 쓰며 예기했던 이상의 연예를 베푸는 것을 보고 그곳도 그렇게 진보되었나 하고 무척 감격해 하신 분이 많이 계셨습니다.”「황군위문 회고 좌담회」, <<신세대>> 7호, 1941. 7. 강조는 인용자. ↩
19.「남녀배우의 창씨」, <<대동아>>, 14권 5호 1942.7.1. ↩
20.박찬호 지음, 이준희 편집, <<한국대중가요사 2>>, 미지북스, 2009, 19쪽. ↩
21.“자료로 확인되는 K.P.K악단의 첫 무대는 1945년 12월에 있었는데 당시 공연 출연진을 보면 김해송이 무대음악의 1인자로 자리를 굳혔음을 알 수 있다. 기존 김해송 사단에 더해 조선악극단의 프리마돈나이자 이철의 연인이었던 가수 장세정과 이철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오케음악무용연구소 생도 출신 무용가 강윤복 등이 K.P.K악단에 합류했던 것이다. 그로써 김해송의 K.P.K악단은 이철의 조선악극단을 부분적으로 흡수•계승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제대로 갈피를 잡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공연단체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했던 이른바 ‘해방공간’의 대중음악계에서 김해송과 K.P.K악단의 활동은 단연 독보적인 것이었다. 1948년 3월부터 7월까지 일시적인 공백기가 보이기도 하지만, 김해송은 이 시기에 가장 바쁘게 무대음악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현재 확인되는 K.P.K악단의 공연기록만으로도 그러한데다가 기록상 확인하기 어려운 지방공연과 주한미군 대상 공연이 또 자주 있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준희, 「김해송 무대음악 활동 초탐」, <<대중음악>>9호, 2012, 115쪽. ↩
22.「나의 교유록, 신카나리아」(제13회. 해방과 연합군 위문), <<동아일보>>, 박찬호, 같은 책, 24쪽에서 재인용. ↩
23.마양카이에 의한 김숙자와의 사적 인터뷰. Roald Maliangkay, 같은 논문, 68쪽. ↩
24.1950년 1월에는 당시 외무부장관이었던 임병직이 K.P.K악단의 <칼멘>을 관람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평민 장관 임병직 – 뭇사람에 섞여 연극구경」, <<경향신문>>, 1950.1.8. ↩
25.1961년 남한 정부는 월북인사로 분류된 음악인의 곡들을 모두 금지곡으로 지정했는데, 이때 김해송 또한 월북인사에 포함시켰다. 마양카이에 의한 김숙자 인터뷰에 따르면, 1965년 이난영이 죽었을 때 김시스터즈가 한국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도 당시까지 월북인사로 지정된 아버지 탓에 비자 발급을 받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Roald Maliangkay, 같은 논문, 71쪽. ↩
26.Roald Maliangkay, 같은 논문, 69~70쪽, 김숙자 인터뷰 내용 참조. ↩
27.김시스터즈는 결성 당시 김해송과 이난영의 딸들인 영자, 숙자, 애자 세 자매로 구성되었지만 미국 진출 과정에서 큰딸인 영자가 빠지는 대신 이난영의 친오빠 이봉룡의 딸인 민자가 들어가게 된다. ↩
28.Roald Maliangkay, “Koreans Performing for Foreign Troops: The Occidentalism of the C.M.C. and K.P.K.”, East Asian History, No. 37, December 2011, 60쪽. ↩
29.손목인, <<손목인의 인생찬가 – 못다부른 타향살이>>, HOT WIND, 1992, 146쪽. ↩
30.손목인, 같은 책, 148쪽. ↩
31.“해방을 계기로 해 한국 대중음악의 전범은 미국 대중음악으로 교체되었고, 전 세계 대중음악을 지배하는 영미권 대중음악의 헤게모니는 이제 한국에도 직접적으로 관철되기에 이른다. 1950년대 후반을 거쳐 1960년대에 도달하면서 팝은 새로운 주류로 등장하게 된다. […] 이전까지 유행가라는 명칭을 독점하고 있던 경향은 트로트(혹은 비하적 명칭으로서의 ‘뽕짝’)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영미, 「한국식 팝의 형성과 변화: 스탠더드 팝과 발라드」, 김창남 엮음, <<대중음악의 이해>>(한울아카데미, 2012), 265쪽. ↩


Tags: 고복수, 김해송, 다방의 푸른꿈, 목포의 눈물, 박시춘, 손목인, 식민지 유행가, 오케레코드사, 이난영, 조선악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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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25 16:4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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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시민신문] OK 레코드사의 지휘자였던 김은 이난영과 오빠 이봉룡에게 음악교육을 시켜준 사람. 단지 메모리로만 노래를 부르던 어린 난영에게 음악의 기초를 세세히 가르쳐준 음악선생이나 다름 없었다.

거기다가 오빠 이봉룡을 악단에 편입시켜 명 드러머로 키워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시골 출신의 두 오누이에겐 잊을 수 없는 은인이었는 지도 모른다. 강한 자에게 꺾이는 게 여자의 속성일까. 김해송은 능동적이며 남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에 비해 고복수는 소극적이며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언제나 조용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의 결단력이 없는 ‘꽃’은 결국 꺾는 자에게 꺾일 뿐이다. 난영은 목포의 눈물로 전성기에 들 무렵 이미 자신의 처녀성을 김해송에게 바친 뒤였다. 그러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당시 OK 레코드사에 소속한 자곡가들은 김해송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평양숭실 전문출신으로서 인텔리였던 김해송이 난영의 마음에도 끌렸음직하다. 가수로서, 기타리스트로서, 그리고 작곡가 겸 지휘자로서 다재다능한 음악인이었던 그는 이난영에게 물론 과분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엔 스승으로서 김에게 깎듯한 대접을 했다. 난영이 새악보를 받아들고 연습할 적마다 김은 누구보다도 애정을 기울여 지도해줬다.

자신의 잘못이나 나쁜 버릇을 집어내듯 바로 잡아주는 그가 대견스러울 뿐이었다. 이때 김해송의 나이는 24세, 이난영의 나이는 19세였다. 불같은 정열로 똘똘뭉친 젊음이 그냥 지나칠 리 만무했다. 한데 흐르는 물이었다가, 함께 타오르는 불이기도 했다. 이미 그들은 서로의 뜨거운 체온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지 오래였다. 구설수가 많은 가요계에서 이난영은 철두철미하게 몸조심을 했다.

둘이의 밀회는 아무에게도 눈치 채이지 않은 채 2년째로 접어 들었다. 그런데 1937년에 접어들면서 난영은 자신의 몸에 변화가 옴을 느꼈다. 홀몸이 아니었던 것이다. 난영은 결혼을 서둘렀다. 그녀가 20살 되던 해,두 사람이 결혼하겠노라고 발표하니 모두가 놀래 자빠졌다. 그처럼 순진하고 몸가짐이 조심스럽던 시골처녀 난영이 ‘불같은’ 성격의 사나이인 김해송과 2년간이나 밀회를 해왔음에 더욱 더 놀랬다.

난영은 불러오는 배를 가리기에 안간힘을 썼다. OK쇼단을 따라다니기가 불편했지만, 아무에게도 눈치 채이지 않게 그녀는 불룩한 아랫배를 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함경북도의 나남 근처의 공연지에서 결혼한 지 7개월 만에 첫 출산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난영이 스무 살에 만난 첫 남편 김해송은 충남 공주태생으로 공주고보를 거쳐(김정구씨는 평안남도 개천태생으로 기억하고 있다) 평안숭실전문학교를 나왔으며, 본명은 김송규이다. 천부적인 음악성을 지닌 그는 클래식기타의 연주법과 함께 당시 유행하던 하와이언 기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초기 재즈 송의 가수였는가 하면, 장세정이 불러 히트한 ‘연락선은 떠난다’ 등도 작곡한 다재다능한 음악인이다. 원로작곡가 황문평씨는 최근 저술한 자신의 저서 ‘-가요60년사’에서 김해송을 우리나라 블루스의 원조로 보고 있다.

평양숭실전문을 나와 일본에서 정식으로 음악수업을 쌓은 김해송은 보통 키의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 그러나 그의 성격은 좀 괴팍스러운 데가 있었다. 남달리 담대하고 공격적이며, 다혈질의 소유자였던 그는 주변인물들과 마찰도 없었지만, 여성문제에서 특히 많은 문제를 낳았다. 즉흥적인 악상으로 좋은 곡을 많이 남겼던 그는 천재들이 의례 지닌 괴벽성과 기인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여성편력이 많은 점도 그가 지닌 특성 중의 하나로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여성편력’, ‘즉흥적이며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대변되는 김해송이 이난영을 가만둘 리는 만무했던 것. 그리고 그러한 그의 성격 때문에 가수 이난영은 ‘불행한 여인’으로서의 징후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난영은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결혼 7개월 만에 ‘속도위반’을 하면서 공연지에서 첫 아들을 낳은 뒤,매년 연년생으로 자식을 낳았다. 흡사 ‘아이 낳는 기계’처럼 그녀는 9년 동안 걸쳐 한 해도 거르지 않고 9명의 자녀를 출산했다. 아들이 넷, 딸이 다섯이었는데, 어렸을 적 딸이 둘 죽어 7남매(4남3녀)로서 연예인 중 최고의 자식부자가 됐다.

‘불행한 여인----이난영’은 첫 남편 김해송을 만났을 때부터 이미 그 조짐이 엿보이기 시작했다고들 말한다. 어떻게 보면 이처럼 다산한 부부이니 행복한 가정으로 볼지 모르나, 사실은 그렇질 못했다는 게 가까운 동료들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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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시민신문] OK 레코드사의 지휘자였던 김은 이난영과 오빠 이봉룡에게 음악교육을 시켜준 사람. 단지 메모리로만 노래를 부르던 어린 난영에게 음악의 기초를 세세히 가르쳐준 음악선생이나 다름 없었다.

거기다가 오빠 이봉룡을 악단에 편입시켜 명 드러머로 키워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시골 출신의 두 오누이에겐 잊을 수 없는 은인이었는 지도 모른다. 강한 자에게 꺾이는 게 여자의 속성일까. 김해송은 능동적이며 남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에 비해 고복수는 소극적이며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언제나 조용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의 결단력이 없는 ‘꽃’은 결국 꺾는 자에게 꺾일 뿐이다. 난영은 목포의 눈물로 전성기에 들 무렵 이미 자신의 처녀성을 김해송에게 바친 뒤였다. 그러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당시 OK 레코드사에 소속한 자곡가들은 김해송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평양숭실 전문출신으로서 인텔리였던 김해송이 난영의 마음에도 끌렸음직하다. 가수로서, 기타리스트로서, 그리고 작곡가 겸 지휘자로서 다재다능한 음악인이었던 그는 이난영에게 물론 과분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엔 스승으로서 김에게 깎듯한 대접을 했다. 난영이 새악보를 받아들고 연습할 적마다 김은 누구보다도 애정을 기울여 지도해줬다.

자신의 잘못이나 나쁜 버릇을 집어내듯 바로 잡아주는 그가 대견스러울 뿐이었다. 이때 김해송의 나이는 24세, 이난영의 나이는 19세였다. 불같은 정열로 똘똘뭉친 젊음이 그냥 지나칠 리 만무했다. 한데 흐르는 물이었다가, 함께 타오르는 불이기도 했다. 이미 그들은 서로의 뜨거운 체온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지 오래였다. 구설수가 많은 가요계에서 이난영은 철두철미하게 몸조심을 했다.

둘이의 밀회는 아무에게도 눈치 채이지 않은 채 2년째로 접어 들었다. 그런데 1937년에 접어들면서 난영은 자신의 몸에 변화가 옴을 느꼈다. 홀몸이 아니었던 것이다. 난영은 결혼을 서둘렀다. 그녀가 20살 되던 해,두 사람이 결혼하겠노라고 발표하니 모두가 놀래 자빠졌다. 그처럼 순진하고 몸가짐이 조심스럽던 시골처녀 난영이 ‘불같은’ 성격의 사나이인 김해송과 2년간이나 밀회를 해왔음에 더욱 더 놀랬다.

난영은 불러오는 배를 가리기에 안간힘을 썼다. OK쇼단을 따라다니기가 불편했지만, 아무에게도 눈치 채이지 않게 그녀는 불룩한 아랫배를 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함경북도의 나남 근처의 공연지에서 결혼한 지 7개월 만에 첫 출산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난영이 스무 살에 만난 첫 남편 김해송은 충남 공주태생으로 공주고보를 거쳐(김정구씨는 평안남도 개천태생으로 기억하고 있다) 평안숭실전문학교를 나왔으며, 본명은 김송규이다. 천부적인 음악성을 지닌 그는 클래식기타의 연주법과 함께 당시 유행하던 하와이언 기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초기 재즈 송의 가수였는가 하면, 장세정이 불러 히트한 ‘연락선은 떠난다’ 등도 작곡한 다재다능한 음악인이다. 원로작곡가 황문평씨는 최근 저술한 자신의 저서 ‘-가요60년사’에서 김해송을 우리나라 블루스의 원조로 보고 있다.

평양숭실전문을 나와 일본에서 정식으로 음악수업을 쌓은 김해송은 보통 키의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 그러나 그의 성격은 좀 괴팍스러운 데가 있었다. 남달리 담대하고 공격적이며, 다혈질의 소유자였던 그는 주변인물들과 마찰도 없었지만, 여성문제에서 특히 많은 문제를 낳았다. 즉흥적인 악상으로 좋은 곡을 많이 남겼던 그는 천재들이 의례 지닌 괴벽성과 기인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여성편력이 많은 점도 그가 지닌 특성 중의 하나로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여성편력’, ‘즉흥적이며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대변되는 김해송이 이난영을 가만둘 리는 만무했던 것. 그리고 그러한 그의 성격 때문에 가수 이난영은 ‘불행한 여인’으로서의 징후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난영은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결혼 7개월 만에 ‘속도위반’을 하면서 공연지에서 첫 아들을 낳은 뒤,매년 연년생으로 자식을 낳았다. 흡사 ‘아이 낳는 기계’처럼 그녀는 9년 동안 걸쳐 한 해도 거르지 않고 9명의 자녀를 출산했다. 아들이 넷, 딸이 다섯이었는데, 어렸을 적 딸이 둘 죽어 7남매(4남3녀)로서 연예인 중 최고의 자식부자가 됐다.

‘불행한 여인----이난영’은 첫 남편 김해송을 만났을 때부터 이미 그 조짐이 엿보이기 시작했다고들 말한다. 어떻게 보면 이처럼 다산한 부부이니 행복한 가정으로 볼지 모르나, 사실은 그렇질 못했다는 게 가까운 동료들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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