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65년 중학교 3학년인 어린 나이로 부산MBC 톱 싱거 경연대회에서 〈보고 싶은 얼굴〉로 1등을 한 뒤 1966년 2월〈보슬비 오는 거리〉, 〈동숙의 노래〉, 〈봄이 오는 고갯길〉이 수록된 음반을 내면서 가요계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이 음반으로 그해 국제가요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무궁화상에서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또 1972년까지 TBC 가요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1967년에는 군사 영화 《장렬 509 대전 차대》에도 출연한 바 있으며, 1967년과1968년에는 MBC에서 10대 가수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69년 자살 미수와 관련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은퇴를 선언했으나, 1970년 다시 컴백하여 《문주란 독집》을 취입하였다. 그 후 많은 음반을 발표해 활발한 활동을 보이며 1972년 MBC10대가 수상에 에 선정되었으나, 세종문화회관의 화재로 인해 부상을 당하는 불운을 맞기도 했다. 이후 1973년에 10대 가수 가요제에 또다시 선정되고, 1974년에는 대표적인 히트곡이 탄생하게 되는데 〈공항의 이별〉, 〈공항의 부는 바람〉, 〈공항 대합실〉등 공항 시리즈가 인기를 얻었으며, 동명의 영화에도 출연하게 된다.
그러나 1975년 사생활 문제로 연예협회로부터 6개월간 방송 정지를 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1981년에는 일본에도 진출해 활동하기도 했고, 1982년에는 일본 동경 음악제에서 에서 최우수 가창상을 수상했다. 1983년에는 국내에 귀국하여 KBS의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배경음악에 수록된 〈누가 이 사람을 (남과 북)〉이 히트했다.
1986년에는 《백치 아다다》로 인기를 얻었으나, 교통사고로 활동이 주춤하게 된다. 하지만 1990년에는 다시 재기,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가 각종 차트에서 오르면서, 많이 알려지게 된다. 이후 현재까지 가요무대 등 각종 행사에 출연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지난 5일 밤 10시 방송된 TV CHOSUN '스타 다큐 마이웨이'(이하 '마이웨이') 239회는 최고 시청률 7.4%, 전체 6.3% (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를 기록하며, 지상파 포함 동시간대 프로그램 시청률 '종합 1위'를 차지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신곡과 함께 화려하게 귀환한 가수 문주란이 음독 시도부터 이뤄질 수 없었던 사랑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털어놨다.
문주란은 활동 당시를 떠올리며 자신을 둘러싼 스캔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열아홉 살 때 음독 사건이 있었다
그때는 남자의 '남'자도 몰랐을 때다. 그때는 다 싫었다. 온갖 루머들이 나오니까 견디기 힘들었다. 음독 후 보름 만에 눈을 떴다"며 지난날 기억을 더듬었다.
이후 문주란에게 첫사랑이 찾아왔는데, 심지어 유부남이었다고. 문주란은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못 받아서 사람을 많이 사랑하게 되고 자꾸 의지하게 되는 게 있었다.
첫사랑이 유부남이었다. 왜 그런 사람을 만났을까 싶다.
어리석은 사랑을 했었구나 싶다"라고 전하며, 지난날 유부남을 사랑한 일을 후회했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도 밝혀 귀를 기울이게 했다. 문주란은 "혼자가 좋다. 사랑을 해봤지만 피곤하더라. 사람은 '운명'이라는 게 있지 않나. 나는 결혼해서 남편을 갖고 살 운명이 아닌 것 같다"라고 담담히 말했다.
문주란의 데뷔곡 "동숙의 노래"는 그 당시 목소리의 주인공이.. 남자다.. 아니다. 여자다.. 많은 사람들이 설왕설래하면서 듣던 곡으로도 유명하답니다.
문주란은 1965년에 노래를 시작했으며, 드디어 1966년에 백영호 작곡의 "동숙의 노래"를 불러 화려하게 가요계에 데뷔한다. 서울에서 활동하기 위해 지방에서 서울의 "성만 여상"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 전학을 한다. 데뷔곡의 히트로 인기를 얻은 문주란은 이어서 "돌지 않는 풍차, " "아카시아의 마음, " "타인들" 등을 히트시키며 톱가수로 올라서게 된다.
계속해서 그녀는 "내 몫까지 살아 주, " "구슬 공주, " "낙조, " "별빛 속의 연가, " "젊은 애인들, " "당신이 있으니까, " "파란 이별의 글씨, " "옛님, " "꼭 필요합니다, " "애수"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히트곡을 양산하였으며 그녀가 부른 곡은 1,000곡이 넘는다.
1969년에는 자살 기도로 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으나 문주란 개인적으로는 인기의 뒤안길에 인생 자체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지금은 경기도 가평군 대성리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매혹의 저음 가수 문주란의 데뷔곡인 "동숙의 노래"는 1966년 7월경에 개봉된 전쟁영화 "최후의 전선 180리"의 삽입곡으로 흘렀던 노래로,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영화에 삽입되었던 동숙의 노래는 크게 히트하여 신인가수 문주란을 하루아침에 스타로 만들었고, 그녀의 대표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시대를 초월하여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노래이자, 작곡가 백영호 씨의 대표곡 중의 한 곡이다.
'동숙의 노래'의 주인공인 '동숙'은 실존 인물이다. 이 노래로 18세 소녀 문주란은 히트를 쳐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지만 '동숙'은 이 노래의 가사처럼 너무나도 불쌍한 여인이었다.
국민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동숙은 서울로 올라가 구로공단 가발공장에 다니면서 번 돈을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기고 동생의 학비와 가사에 보탬이 되라고 다 집으로 보냈다.
이렇게 동숙은 돈 버는 기계로 10년 이상을 가족을 위해 희생을 하다 보니 어언 서른이 가까운 노처녀가 되었다.
그때 동숙은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라고 맘을 고쳐먹고 '꼭 대학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여 글을 쓰는 국어 선생님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 꾸준히 공부를 하여 중학교 졸업 자격을 얻고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중 그 학원의 총각 선생인 박 선생을 좋아하게 되었다.
착하고 순진한 동숙은 그 총각 선생의 자취방까지 찾아가 선생님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며 행복감을 느낀다. 장래를 약속하며 동숙은 그 선생님께 용돈까지 주며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그런데 동숙이 다니던 가방공장이 문을 닫게 되자 직장을 잃은 동숙은 돈이 떨어져 더 이상 학원을 다닐 수가 없어 눈물을 머금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동안 번 돈은 동생 학비, 학원 선생님 용돈 등등으로 다 쓰고 빈털터리로...
동숙은 공부를 더 하겠다고 부모님께 간곡하게 말씀드렸으나 부모님으로부터 어서 시집이나 가라고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고는 친구에게 학원비와 노잣돈을 빌려 서울로 다시 올라가 고졸 검정 학원에 재등록을 하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토록 사랑하던 학원 선생님은 마음이 변해 있었다.
학원 선생 왈, “너와 난 학생과 제자야. 내가 어떻게 너하고 결혼할 수가 있나? 네가 날 좋아 쫄쫄 따라다녔지 난 너에게 관심이 없어. 고졸 검정고시나 잘 보라고.”
지금까지 그 선생에게 농락당한 여자임을 알게 된 동숙은 복수를 결심한다. 어차피 버린 몸..... 동숙은 시장에서 비수를 사 가슴에 품고 있다가 수업 중 선생님이 필기를 하다가 막 돌아서는 찰나 동숙은 '이 나쁜 놈!' 하면서 선생님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동숙은 살인미수죄로 잡혀 들어가고 선생은 병원으로 실려갔다. 경찰의 조서를 받으면서도 동숙은 선생님이 제발 살아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형사들에게 애원하였다. 그녀는 결국 살인미수죄로 복역을 하게 된다.
가난 때문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가족을 위해 살아온 동숙이 뒤늦게 얻은 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복역을 하게 된 애절한 사연이 당시 여성 주간지에 실려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 동숙의 삶을 한산도 선생이 글을 쓰고 작곡가 백영호 씨가 노래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