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audio-visual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田惠麟,

marineset 2023. 6. 1. 00:44
 
중학생이 되고, 첫 겨울방학 어느날.
전혜린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며칠을 슬퍼했다.
40년이 흐른 지금, 전혜린이라는 여자를 다시 기억해본다. by badoc


전혜린 [田惠麟, 1934.1.1~1965.1.11]


평안남도 순천(順川)에서 출생하였다. 경기여자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 재학 중 독일에 유학, 뮌헨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에는 서울대학교 법대·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6년 F.사강 원작 《어떤 미소》를 비롯하여 E.슈나벨의 《한 소녀의 걸어온 길》(1958), 이미륵(李彌勒)의 《압록강은 흐른다》(1959), E.케스트너의 《파비안》(1960), L.린저의 《생의 한가운데》(1961), H.게스턴의 《에밀리에》(1963), W.막시모후의 《그래도 인간은 산다》(1963), H.노바크의 《태양병(太陽病)》(1965) 등을 계속 번역 소개하였다.

그 밖에도 사후에 출판된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와 비장(秘藏)의 일기를 모은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1968) 등이 있다. 자살로 스스로의 인생을 결말지었다.


<注> 동생 전채린 교수(불문학)/ 제부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감독(1980년, 38세로 요절) . 하명중(가수)/하길종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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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점치던 田惠麟여사, 많은 번역작품 남기고 심장마비로 별세(1965년 1월 17일 조선일보 5면)▷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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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산 `광기의 천재' 전혜린


육칠십년대에 청소년기를 맞은 문학소녀라면 한번쯤 미치도록 빠져들어 자기 분신을 발견하는 감격과 기쁨을 맛보았을 전혜린. 여성 법학도요 독 일문학가로서 두권의 유고집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 로움을 또다시>를 남기고 서른한살에 요절한 그는 30여년이 흐른 지금에 도 여전히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을 사로잡고 있다. 소녀시절부터 전혜 린의 가슴에 자리잡았던 명제 ‘절대 평범해선 안 된다’가 그대로 실현 된 셈이라고나 할까.

전혜린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의 삶을 어느 만큼 신비화시켰고 숱한 추측을 낳게 만들었다. 그의 죽음이 자살이냐 아니냐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어쩌면 자살이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 닐지 모른다. 그는 늘 죽음을 생각하며 되뇌었고, 설령 계속 살았더라도 죽음에 대한 유혹을 떨치지 못했을 테니까.

전혜린은 일제시대 중반 부유한 관리의 맏딸로 태어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아버지가 사다주는 책을 마음껏 읽으며 경기여중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워낙 여학생이 드문 데다 도통 남의 눈을 의식 하지 않는 거리낌없는 행동, 경탄스러울 만큼 예리한 두뇌 때문에 그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5년 가을, 전혜린은 법학을 그만두고 문학공부를 위해 독일 유학을 떠난다. 뮌헨의 슈바벤, 내리깔리는 축축한 안개 사이로 오렌지색 가스등이 신비로운 빛을 발하는 그곳은 곧 전 혜린의 정신적 고향이 되었다. 그는 뮌헨대학에서 독일 리얼리즘의 선구자 그릴파르처의 문학을 연구하는 한편, 철학자 니체와 그의 연인이며 소설가였던 루 살로메에 열중했다. 도서관에서 루 살로메의 전기를 읽다가 그 사진을 몰래 오려냈을 정도로 전혜린은 루 살로메를 좋아했다.

귀국한 전혜린은 여자는 강단에 세우지 않는다는 완고한 전통을 깨뜨리고 스물다섯살의 나이로 서울대학에 출강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1세기에 한번쯤 나올 희귀한 천재’라는 격찬을 들으며, 그러나 그로부터 5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일곱살짜리 딸 정화를 남긴 채. 소설을 쓰겠다 는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서.

그가 자주 입에 올린 단어는 권태와 광기였다. 광기일 만큼 치열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 그러나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권태로운 일상. 전혜린은 그 둘의 충돌 한가운데서 한없이 절망하고 허무의 나락에 빠졌다. 맹렬하게 삶에 매달리는가 하면 다음 순간 허무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양 극단을 무수히 넘나들었다. 수면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고 하루에 커피 15잔을 마셔야 정상이 될 만큼 그의 심장은 약해져 있었다. 아마도 그의 가슴에 자리잡은 ‘절대 평범해선 안 된다’는 명제가 결혼해서 아 이 낳고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사는 지극히 평범한(!) 자신의 삶을 못견디게 만들었을 것이다.

전혜린의 내면은 ‘자아’로 가득차 있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나 민족, 국가 따위는 그의 의식세계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4·19와 5 ·16도 그에겐 진정한 의미의 ‘격정적인 순간’이 아니었다. 전쟁 뒤 독일의 데카당스한 분위기에 흠뻑 젖은 전혜린에게 한국사회의 암담한 현실은 고뇌할 가치 없는 경멸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과 사회적 책임을 묻는건 오히려 어리석은 일일 게다. 전 혜린이 문학소녀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자아에 대한 열렬한 몰두, 절정의 순간에 대한 탐닉, 이리저리 부딪치는 열광, 정체모를 불안과 절망이란 요소들. 전혜린, 그는 전쟁이 낳은 정신적 무국적자였나보다.

박은봉/ 역사연구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2일 제 176호

전혜린에 대하여/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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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의 아버지 전봉덕

전봉덕(田鳳德, 창씨명 田中鳳德, 1910~) /화려한 경력으로 위장한 친일경찰의 본색

·1941년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장.
·1943년 경기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
·1949년 헌병사령관

인명사전에서 자신의 친일경찰 경력을 빼다

얼마 전 김구 암살의 주범 안두희의 입을 통해 사건의 배후가 일부분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는데, 이 때 새삼스럽게 떠오른 인물이 전봉덕이었다. 그는일제 때 경찰로 활약하다 광복 후에는 헌병사령관으로서 김구 암살사건의수사를 직접 담당, 지휘한 인물이다. 1980년대 초에 미국으로 건너간 전봉덕은1992년 4월 잠시 귀국했다가 국내에서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로 다시 거론되자 서둘러 출국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전봉덕을 친일경찰로 보기보다는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낸 법조계의 원로로 많이 알고 있다. 문인 전혜린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법사학(法史學)계의 원로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전봉덕은 사실 1947년에 {법학통론}을 펴낸 이후,{암행어사제도연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67), {한국법제사연구}(1968),{이조법제사}(1971), {한국근대법사상사}(1981), {경제육전 습유}(1989) 등 법학과 법사학 분야에서 고전적인 연구서를 많이 낸 바 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인명사전에서도 전봉덕은 1910년 출생, 1940년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 졸업, 1939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및 행정과합격, 1949년 헌병사령관, 1950년 예편,국무총리 비서실장, 1969년서울변호사회 회장,대한변호사협회 회장, 1972년 법사학회 회장, 1980년헌법개정시안 작성소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 시기나 광복후 헌병사령관 이전의 경력과 활동은 아예 빠져 있는 셈이다. 1981년 한국 법사학회에서는 70세를 맞이한 전봉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법사학연구} 6호를 고희 기념논문집으로 꾸몄지만 여기에도 광복 후의 경력만이 비교적 자세하게 적혀 있을 뿐, 일제 시기 친일경찰 경력은 빼놓았다.

그러면 전봉덕의 참된 모습은 무엇일까? 자신의 일제 시기 경력의 한 부분을 은폐하고 아예 잊어버리려고 한 전봉덕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또 어떤부분이 자신의 경력에서 지우고 싶을 정도로 떳떳하지 못한 것인가?

친일경찰로의 투신과 고속 승진

전봉덕은 1910년 12월 12일, 평안북도 강서(江西)에서 담양 전씨 병룡(秉龍)과 안동 장씨 병선(秉善)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봉덕은 4세 때부터평양 서문안 학당골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사랑 양몽재(養蒙齋)에서 한학을배웠다.

그러나 전봉덕은 7세가 되던 1917년 9월, 평양 서문외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아울러 신학문을 배울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한문을 배우고 유학을 숭상하는 전통적인 가정에서 기독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원래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 서북지역은 일찍부터기독교 세력이 번창하던 곳이었다. 아마 전봉덕이 기독교 신자가 된 것도 이러한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또 전통적인 한학 공부만으로는 빠르게 변하는 시대적 흐름을 쫓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의 장래도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아무튼 전봉덕은 지금까지의 한문 공부를 그만두고 10세가 되던 1920년 4월에 새로 세워진 평양고등 보통학교 부속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어 1926년4월에 서울로 올라와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1931년 4월에는 다시경성사범학교 연습과에 입학하였다가 1932년 3월에 졸업하였다.

경성사범학교를 나온 그는 당시의 관례대로 만주 펑톈(奉天)보통학교로 발령을 받고 교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에 김해 김씨화준(金化俊)의 딸 순해(珣海)와 결혼하였다.

전봉덕의 보통학교 교원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봉덕은 교원생활 2년 만인1934년 4월 다시 서울로 와서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하여 1937년 3월에 졸업하였다. 이어 그 해 4월에는 다시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에 들어갔는데, 재학중이던 1939년 10월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와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전봉덕이 본격적으로 일제의 관료로서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는 1940년 3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같은 해 4월에 총독부 내무국 지방과에서 도 행정계 고등관 견습생활을 시작하였다. 친일관료로서의첫 발을 내딛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일제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한 사람이 관료로 나가기 위해서는 견습생활을 거쳐야 했다. 고등관 시보(試補)로서 일정한 수습기간을 거쳐야 본관, 곧 주임관에 해당하는 관직에 임명되었다.

전봉덕도 고등관 수습생활 10개월 만에 견습 딱지를 떼어 버리고 주임관이 되었다. 즉, 1941년 2월, 요직이라 할 수 있는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장에 임명된 것이다. 그런데 고등관 수습기간을 거친 전봉덕이 바로 보안과장에 임명된 것은 다소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보안과장은 주임관 가운데 도의 이사관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문 출신의 조선인 관료들에게 흔히 주어진 군수보다 한 등급 위의 자리였다. 당시 조선인 고문 출신자들이 수습기간을 끝내고 나갔던 자리는 대개 군수였다. 전봉덕과 1939년 함께 고문 시험에 합격했던 이항녕과 윤길중도 각각 하동군수, 무안군수로 임명되었다.

그가 이처럼 빠르게 승진한 배경에는 무엇보다 일제가 식민지 정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고문 출신을 그만큼 우대했기 때문이다. 이는 또 일제가 행정, 사법 양과에 합격한 전봉덕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가능한일이었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관료사회에서 실력은 다소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일제총독부 입장에서 실력이란 단지 행정 수행 능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일제 시기 친일관료의 승진 기준은 무엇보다 친일 능력, 곧 일본인 상전에 대해 얼마나 아첨하고 충성하느냐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친일관료들이 일제에 대한 자신의 변함없는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서는자신의 동족을 식민지 정책에 동원하고 마음대로 다루는 능력을 과시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사실은 전봉덕이 많고 많은 친일관료의 길 가운데서 왜 굳이 친일경찰로 들어갔느냐 하는 점이다. 전봉덕이 고등관 견습생활을 마치고 경찰관료가 된 이유는 분명치 않다. 당시 일제의 관료업무는 오늘날 처럼 엄격히 구분되고 전문화되어 있던 것이 아니어서 고등관의 경우,승진이나 전보될 때, 서로 교류하면서 근무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 만으로는 전봉덕이 친일경찰로 들어간 이유가 설명될 수 없다. 일제 시기 동안 경찰로 일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일제시기 경찰은 독립운동가의 검거에서 부터 각종 범죄, 즉결, 일본어 보급, 첩보의 수집 등 조선인의 일상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특히, 전봉덕이 경찰로 들어가던 시기는 일제가 거의 발악적으로 조선 민중을 전시체제에 동원하고 혹사시키던 때였다. 이러한 일제의 정책은 야만적인 탄압으로 수행되었는데, 이는 군대와 함께 경찰력에 의해 뒷받침 되었다.

당시 조선인 친일경찰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의 선봉에 서서 같은 동포들을 억압하고 감시하였다. 친일경찰들은 위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을 체포, 고문, 학살하는 악질적인 행위를 거리낌없이 저질렀다. 이런 점에서 친일경찰은 민중들에게 원한에 사무친 저주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친일경찰이 된다는 것은 일제에 끝까지 충성하고 일제와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대단한 각오와 용기가 필요하였다.

일제의 경찰로 관료생활을 시작한 전봉덕은 이어 1943년 9월에는 경기도 경찰부 수송 보안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송 보안과장은 앞서의 보안업무 이외에 화물 자동차 등 운송수단을 통제,감독하면서 일제의 효율적인 전쟁수행을 지원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일제의 침략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는 말기에 이르러서는 임무가 더욱 중요시 되었다. 다나카(田中鳳德)라는 일본이름으로 창씨개명한 전봉덕은 경기도 경찰부 수송 보안과장으로 활동하다 뜻하지 않은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광복 당시 전봉덕은 일제 경찰의 직위로 경시까지 올라가 있었다. 광복 당시조선인 친일경찰 간부들로는 오늘날의 경무관 직급에 해당하는 도 경찰부장 1명(윤종화 황해도 경찰부장), 경시(지금의 총경) 21명, 경부(지금의 경정)105명, 경부보(지금의 경감) 220명이었다. 따라서 광복 당시 전봉덕은 윤종화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친일경찰에 속했던 셈이다.

광복되기 1주일 전쯤인 1945년 8월 8일 오전,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정례과 서장 회의가 열렸다. 경기도 경찰부장 오카는 회의에서 일본의 항복은 시간 문제다라고 말했다. 또 조선은 불행해진다는 예언적인 말도 덧붙였다. 이 자리에는 보안과장 전봉덕도 참석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전봉덕은 경찰부장 오카가 말했던"조선이 불행해진다"는 말의 의미를 곧 알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이 불행해진다는뜻이 아니라 친일경찰을 비롯한 친일파가 불행해진다는 의미였다. 1945년 8월15일은 특히 친일경찰에게 악몽 같은 날이었다. 광복 후 악질적인 친일경찰들은 민중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충북에서는 3명이 맞아죽기도했다. 일제에 대한 충성과 동족을 괴롭힌 대가로 출세를 거듭한 고위 친일경찰들은 민중들의 지탄과 보복의 대상이 되어 도망 다니거나 숨어지내야 했다. 그러나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면서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미군은 총독부를 인수하고 군정을 실시하면서 경찰의 경우, 대부분 친일경찰로 채워 나갔다. 1945년 9월 9일 일제로 부터 정식 항복 조인을 받은 미군은 14일, 총독부 경무국장 니시히로와 경기도 경찰부장 오카 등 일본인경찰 수뇌부를 해임하였다. 그리고 일제 때의 친일경찰들로 자리를 채워나갔다. 이에 따라 전봉덕도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그대로 눌러 앉게되었다.

1946년 1월, 미군정청 경무부장과 수도 경찰청장에 각각 임명된 조병옥과 장택상은 악명 높은 친일경찰들을 경찰간부로 들여 앉혔다. 특히 장택상은 친일경찰을 공산당을 때려잡는 기술자라는 이유로 많이 등용하였다. 1946년 10월 당시, 경찰간부의 80% 이상이 친일경찰 출신이었다.

친일경찰이 대거 등용된 것은 미군정과 극우 보수세력의 정치적 이해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남한에 친미반공 국가를 세우려는 자신들의 점령 목표 때문에 친일경찰을 마구 등용하였다. 국내에 민중적 지지 기반이 별로 없던 이승만 세력 역시 친일경찰을 권력장악의 주요한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점에서 친일경찰과 우익세력은 이해를 같이 했다. 일제시기 친일경찰들은 수 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고문,학살했기 때문에 독립운동 세력과는 원수지간이었다. 전봉덕은 일제와 투쟁해 온 민족세력이 정권을 잡을 경우, 자신의 민족 반역행위를 심판,처단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따라 그는 광복 후 자신의 충성 대상을 일제에서 미국과 이승만 세력으로 바꾸고 빨갱이를 때려잡는 민주 반공투사로 변신하였다. 이제 전봉덕은 일제시기 친일 경찰에서 광복된 조국의 경찰로 다시 태어났다. 전봉덕은 1946년 4월에 미군정 경무부 공안과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7년10월에는 경찰전문학교 부교장에 임명되었다. 이 때 전봉덕은신익희(申翼熙)를 도와 국민대학 창설에 관여하고 대학에서 법학통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반민특위를 피해 군대로 들어가다

정부 수립 뒤 전봉덕은 일제 시기 화려한 경찰 경력을 뒷배경으로 계속 경찰 관료로 출세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야 했다. 왜냐하면 광복과 함께 끊이지 않던 친일파 처단 요구는 정부 수립 후에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민중들의 계속된 압력에 이승만도 친일파 처단 요구를 무조건 반대할 수없었다.

1948년 9월 7일, 과거 친일행위를 처벌하는 반민족행위 특별처벌법이 제정되자, 많은 친일파들이 당시 성역으로 간주되던 군대, 특히 헌병대로 도망쳐 들어갔다. 친일경찰들의 도피에는 이승만과 신성모 국방장관 등이도움을 주었다. 전봉덕도 예외는 아니어서 군대로 도망쳤다. 그로서는 반민특위에 체포되는 것을 모면해 보려는 일종의 자구책이었다.

전봉덕은 특히 신성모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친일파 조직인 8,8 구락부의 일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1948년 10월, 육군사관학교 제1기 고급 장교 반에 입학하여 그 해 12월에 졸업, 육군 소령으로 임명되었다. 아마 일제 경시 출신이라는 점을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 1949년 3월에는 육군중령으로 승진, 헌병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전봉덕이 헌병부 사령관에 임명되는 과정에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1948년 12월 헌병 사령관에 임명된 장흥(張興)의 회고에 따르면, 채병덕이 자신을 헌병사령관으로 발령해 주는 조건으로 전봉덕을 부사령관으로 받아 달라고부탁하여 승낙했다고 한다.

전봉덕이 헌병부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헌병대는 악질적인 친일경찰들의 도피처가 되었다. 반민특위에서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에게 군이 친일부역배들의 도피처가 될 수 있오? 라고 항의했지만, 끝내 군내의 친일경찰들은 건드리지 못하였다. 당시 군 수뇌부는 전봉덕을 신뢰하고있었다. 정치감각이 무뎠던 군 수뇌부는 전봉덕으로부터 정계 인맥에 대한브리핑을 듣고 유임 공작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전봉덕의 군내활동은 헌병대를 중심으로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길을 열어 준 것이었다.

반민특위 활동을 피해 헌병대에 숨어 있던 전봉덕은 드디어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던 인사들에게 앙갚음할 기회를 맞았다. 바로 1949년 6월에 친일경찰들이 중심이 되어 반민특위 활동에 열심이던 소장파 의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구속한 이른 바 국회프락치사건이 터진 것이다.

사건이 나자 헌병사령부는 이를 법원으로 넘기지 않고, 채병덕의 명령으로 붙잡아 들인 소장파 국회의원들을 수사하려고 특별수사본부를 만들었다. 이때 전봉덕은 헌병 사령관 장흥을 제치고 수사본부장이 되어 수사를 진행했다. 부사령관 전봉덕이 실세였던 것이다. 구속된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헌병사령부에서 죽사발이 되도록 얻어맞았다. 여기에는 아마 친일파 처단을요구하던 인사들에 대한 전봉덕의 감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사건은 눈에 가시같은 소장파 의원들을 제거하려는 이승만의 의도대로 조작되었다. 이를 통해 전봉덕은 이승만의 충실한 충복으로 눈에 들게 된 것이다.

헌병부 사령관으로 활약하던 전봉덕은 김구 암살사건 수사를 지휘하면서 다시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49년 6월 26일 낮 1시, 백범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되자, 전봉덕은 경교장에 나가 직접 사건의 수습을 지휘하였다. 전봉덕은 경찰로부터 안두희를 강제로 빼내 사령부로 호송하여 극진히 치료하게 하고 보호하였다. 이어 곧 신성모와 함께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에게 사건 보고를 하였다. 이승만은 바로 전봉덕을 장흥과 교체하여 대령으로 승진시켜 헌병사령관에 임명, 수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던 이승만이 정치적 타격을 받지 않고 사건을 원만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전봉덕같이 자신의 마음을 잘 아는 충복이필요했던 것이다.

전봉덕도 이러한 이승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헌병사령관으로서 전혀수사도 해보지 않고 첫 공식발표를 통해 배후는 엄중 조사하겠으나 단독범행인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김구 계열의 한독당원들이 격렬히 항의하자, 그는언동에 주의해서 법망에 걸리지 말라는 협박조의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전봉덕은 그 뒤 사건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배후를 은폐하는데 주력하면서 수사를 끝냈다. 전봉덕은 이러한 공로 때문에 이승만의 충복으로서 다시 한 번 인정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도 사건배후에 깊이 개입돼 있다는 의혹을 떨쳐 내지 못하였다.

친일 본색 감추고 화려한 사회활동

김구 암살의 배후자로 지목되어서인지, 전봉덕은 헌병사령관을 끝으로 군에서 물러났다. 전봉덕은 1950년 4월 예편하여 국무총리 비서실장이 되었다. 그리고 1년 만인 1951년 4월에는 그것도 그만두고 아예 관료사회에서 은퇴하여 변호사로 일하며 법조계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일제 시기 친일경찰 경력 덕분인지, 이후 전봉덕은 그야말로 사회의 여러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벌였다. 대표적인 경력만 꼽더라도 1954년 재향군인회서울지회장, 1956년 서울시 교육위원회 법률고문, 1960년 서울변호사회 부회장, 1961년 고등고시 시험위원,혁명재판사 편찬위원회 위원,서울시 시정자문위원회 위원장, 1962년 법제처 법제조사위원회 위원,대한교육연합회 법률고문, 1969년 서울변호사회 회장,대한변호사협회 회장, 1970년 국제변호사회 상무위원, 1975년 국제관광공사 법률고문, 1976년 대한적십사사 서울지사장, 1978년 한국법학원 원장, 1980년 정부 헌법개정 심의위원회 부위원장, 1981년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이 밖에 서울대 등에서 법제사를 강의하기도 한 전봉덕은 법학과 법제사 분야에서 많은 저작을 펴냈다. 1973년 3월에는 자신이 주도하여 한국법사학회를 창설하고 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전봉덕은 관료생활을 그만둔 뒤, 친일경찰이라는 과거의 딱지는 떼어 버리고 이제는 행정경험이 있는유능한 인물로서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고문 출신 친일경찰로서 권력의 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했던 전봉덕은 이후 정권이나 환경이 바뀔 때마다 끊임없이 적응하며 자신의 지위를 계속 유지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전봉덕이 변신과 출세의 과정에서 보여 주는 화려하고 다양한 경력은 한편으로는 광복 후 친일경찰의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가 해결되지 못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전봉덕의 삶과 경력은 우리 사회의시대적 흐름을 거부하는 반민족적,반민중적 역사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김무용(구로역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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