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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麵·noodle)의 탄생에 관한 수수께끼
DATE 09-01-23 15:40
글쓴이 : 김지민
국수의 역사는 ‘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통적으로 사랑받아 왔고, 인종을 너머 전세계인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으로, 또한 국물과 고명의 종류에 따라 무한 변신이 가능한 국수.
국수는 과연 언제 어디에서 먹기 시작했을까. 어떻게 지금의 다양한 요리 방식과 만나게 되었을까. ‘하나의 밀알’이 국수가 되어 세계인의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 국수 한 그릇에 담긴 역사이야기를 KBS 1TV 다큐멘터리 ‘인사이트 아시아-누들로드’에서 소개된 내용을 바탕으로 추적해본다. <정리·김지민 기자 jm@wnewskorea.com>
추운 겨울날 절로 생각나는 따끈따끈한 국물이 일품인 일본 나베야끼 우동, 여름철 입맛을 돋궈주는 냉콩국수, 이미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베트남 쌀 국수 ‘포’,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좋아하는 이탈리아의 스파게티, 마땅히 먹을 것이 없을 때 간단하게 출출한 배를 채워주는 인스턴트 라면까지….
국수는 한국, 일본, 중국 등의 아시아의 여러 나라 뿐 아니라 히말라야 산골 부탄이란 작은 나라에서도, 페르시아 문명의 나라 이란도, 북아프리카 튀니지에도 국수는 살아있다.
3,000년을 살아남은 길고 가는, 기묘한 모양의 음식 국수는 동서의 문명을 잇고 전세계 60억 인구의 식탁에 올랐다. 그렇다면 대체 이 국수는 누가 처음 만들어 먹었던 것일까?
2,500년 전 미이라 머리 맡의 국수로부터
충격적인 자료가 있다. 바로 중국 화염산에서 발견된 약 2,500여년 전 미이라. 그리고 그들의 머리 맡에 놓여진 길고 가는 모양의 국수 한 그릇이 그것!
지난 1991년 이곳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인부들에 의해 처음 발견된 2,500여년 전 고대인들의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은 불모의 사막이 끝없이 펼쳐진 이곳의 건조한 기후 때문에 당시 모양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사발과 같은 그릇에 고스란히 담겨진 채 2,500여년 동안 그 모양을 간직해 온 국수는 인류가 최초로 먹었던 국수였을 수 있다.
당시 유물 발굴작업을 담당한 신장 고고학 연구소의 류엔궈 씨는 “2,500여년 전 고대 무덤에서 국수를 발견해 놀랐고 무엇보다 현 중국 신장의 국수와 그 모양이 너무 흡사해 다시 한 번 놀랐다”고 당시의 소감을 전했다.
국수를 통해 인류 음식 문명사를 그린 KBS 1TV 다큐멘터리 ‘인사이트 아시아-누들로드’ 취재팀은 이 국수 유물과 흡사한 국수를 화염산 인근 시장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별다른 기구없이 밀가루를 손으로 밀고 당기는 과정을 거친 반죽을 삶아낸 후 양고기와 고추를 볶아 만든 고명을 얹은 ‘라그만’이란 국수는 신장 지역에서 수천년간 이어 내려온 것이다.
언제부터 이들이 국수를 먹기 시작한 것인지 그 시기가 명확하진 않지만 아주 오래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취재팀은 신장지역에서 발견된 4,000여년 전 미이라와 함께 발견된 유물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유난히 높은 코를 한 가죽가면, 그것은 분명 동양인의 얼굴은 아니었다. 서양인으로 추정되는 이 코 큰 가면의 주인공 곁에는 밀알과 밀가루 음식이 발견됐다. 그렇다면 이 밀을 가져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일본 종합지구환경학 연구소의 샤토 요이치로 교수는 이 지역에서 발견된 밀은 무려 4,500km나 떨어진 카스피해의 남쪽에서 온 것으로 추정했다.
“카스피해의 사람들이 밀을 가지고 동쪽으로부터 유라시아 대륙을 건너와 지금은 사막이 된 신장의 새오허 근처에 도달한 것이다.”
쌀과 함께 인류가 최초로 경작했던 밀은 지금까지 인류의 60%가 주식으로 삼고 있는 식량이다. 하지만 밀은 쌀과 달리 여섯겹의 딱딱한 껍질 때문에 가루가 되어서야 음식이 될 수 있다. 밀의 부드러운 배젖부분을 가루로 만들고 물을 섞어 가루를 치대면 밀가루의 점성과 탄성이 극도로 높아지는 신기한 변화가 일어난다. 바로 이 반죽의 발견은 인류 음식 문화사에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인류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사람들은 미이라 만큼이나 중요한 유물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맷돌이 바로 그것이다. 회전식 맷돌은 단단한 밀을 가루로 내는 것을 이전보다 3배 이상 쉽게 만들어줬다. 이렇게 만들어진 밀의 반죽을 동글게 편 후 잿더미 속에 넣어 구웠는데, 이것이 인류가 최초로 먹었던 빵의 원형인 납작빵(플랫브레드·flat bread)이었다.
B.C. 4,000년 경 북아프리카와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한 빵 문화는 로마문명으로 전해진다. 로마문화는 빵의 진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로마 폼페이 유적지에 남아있는 30여개의 제빵기들과 마당 한가운데 가축과 노예들이 돌리던 대형 맷돌은 당시 규모를 가늠하게 한다.
특히 벽돌로 쌓은 대형 화덕은 한꺼번에 80개가 넘는 빵을 구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화덕 내 일정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굴뚝이 설치돼 있어 부드러운 질감의 빵으로 진화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된 빵은 지난 6,000년 동안 북아프리카에서 중동까지 지구 절반의 음식문화를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국수가 탄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국수가 전파된 길로 추정되는 ‘실크로드’.실크로드 통해 국수문화 전달한 한족
서양에서 빵의 문화가 자리잡았던 B.C. 2,000년 경, 지구 반대편에는 전혀 다른 음식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중국의 한족이었다.
중국의 농업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음식문화가 꽃피우기 시작한다. 다양한 식재료를 이용한 요리가 식탁에 오르고 현대의 레스토랑처럼 모든 공정이 분업화, 전문화되면서 다양한 조리법도 보완된다. 당시 굽고 튀기고 삶고 찌는 네 가지 요리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유일한 문명이 바로 한족이었다.
오늘날 ‘중화요리’ 하면 볶고 튀기는 것이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가장 오래된 그들의 조리법은 삶고 찌는 것이다. 이들의 끓여먹는 탕문화는 공자 이전 은나라 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베이징 수도 박물관에 보존된 청동기 유물 ‘리라’라는 이름의 탕기는 약 3,000년 전 서주시대 때 사용되었던 조리도구다. 쌀이나 조를 주식으로 먹던 한족에게 가장 중요한 조리법은 당연히 탕과 찜일 수 밖에 없었던 것.
이처럼 찜과 탕요리가 오랫동안 자리잡았던 한족들은 밀가루를 이용해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 냈다. 얇게 민 밀가루 반죽에 갖가지 소를 넣어 찜통에 쪄먹는 만두가 가장 대표적인 밀가루 음식 중 하나다. 중국의 만두는 형태만 300가지고 소의 종류에 따라 100가지 다른 맛을 낼 정도로 발달돼 있다.
중국 투루판 박물관에 소장된 한 단서에 의하면 1,500여년 전인 당나라 때 처음 만두를 만들어 먹었다. 음식문화가 발달했던 중국이었지만 밀은 외래작물이었기 때문에 만두나 국수같은 밀가루 음식을 먹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밀은 어떻게 중국으로 전해졌을까. 그 단서는 실크로드의 둔황막고굴 제323굴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굴 속의 벽화에는 흉노족에 대항하기 위해 멀리 서역의 대월 지국과 동맹을 맺으러 가는 사신 장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기원전 139년 장건은 100여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장안을 출발해 서쪽으로 향하게 된다.
그가 개척한 길을 통해 다양한 서양의 문화들이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것이 실크로드의 시작이었다. 이 때 밀과 밀가루 문화도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건이 실크로드를 열자 한족이 서쪽으로 진출하게 되고 이들이 다다른 곳은 국수문명이 발달된 신장이었던 것.
신장의 대초원은 한족이 오기 오래 전부터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의 땅이었다. 여기에는 서역의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었고, 그 중 하나로 ‘난’, ‘탄두리’이라고 부르는 납작빵도 있었다. 이들에게 이 납작빵은 우리에겐 밥과 같은 주식이었다. 이들이 특별한 날 먹는 빵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나린’, 즉 양고기를 푹 고은 육수에 국수를 삶아 낸 음식이었다. 비록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의 국수는 국물이 거의 없는 모양이었지만 그곳에는 빵의 문화와 국수의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국의 선상식당.한나라·당나라 거치며 발전된 국수 조리법
신장 고고학연구소의 뤼엔궈 씨에 의하면 이들 유목민족들이 신장에 오기 전 이 초원의 주인은 원시 유럽인종들이었다고 한다. 약 5,000여년 전부터 신장 지역에 살았던 이들은 밀을 주식으로 했고 인류 최초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이들이 만든 인류 최초의 국수는 가장 원시적인 제분기 ‘갈돌’을 사용해 밀을 가루로 빻아 반죽을 만들어 두 손바닥으로 비벼 가늘게 만드는 것이 전부인 간단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국수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문명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5세기 전후 한족이 신장으로 진출하면서 이 지역은 기존의 중앙아시아 유목민과 함께 동서문명이 공존하는 다민족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은 일종의 만두와 같은 ‘홍동’과 ‘오랑캐 음식’이라고도 불리는 부침개 요리 등의 아름답고 정교한 밀가루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이같은 분식문화는 한나라와 당나라를 거치면서 중국으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탕과 찜을 즐겼던 중국은 국수를 그들의 입에 맛게 중국화했다. 건식의 재료와 습식의 조리법이 만나는 동서양 음식문화 최고의 합작품이 바로 지금의 국물이 있는 국수인 것이다.
1,400여년 전에 씌여진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농업기술서인 ‘제민요술’이란 농업서에는 ‘수인병’이란 국수요리 조리법이 기술돼 있다고 한다. 이는 문헌상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국수 조리법이다. 밀가루를 곱게 쳐 고기국물로 반죽하고 손으로 비벼 길게 만든 후 젓가락 굵기까지 잡아늘인 국수를 삶은 후 맑은 닭고기 국물을 부어먹은 요리가 바로 수인병이다.
이후 다양한 모양의 국수가 탄생하게 된다. 국수가 지금의 가늘고 긴 모양을 하게 된 것은 끓는 물에서 빨리 익어 쫄깃한 맛을 내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북방 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국수는 이 장성을 넘어 유목민들에게서 넘어오게 된 것이다. KBS 1TV 다큐멘터리 ‘인사이트 아시아-누들로드’ 취재팀이 ‘실크로드’를 ‘누들로드’라고 칭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탈리아 자체적으로 개발된 파스타문화
중국에서 시작된 국수문화. 이 국수는 ‘파스타’로 이탈리아에 돌연 등장한다. 국수문화가 유럽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라도 국수를 먹지 않으면 이탈리아인이 아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탈리아는 화려한 국수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런 의문점이 남는다. 국수를 먹지 않던 유럽대륙에서 왜 유독 이탈리아인들만 국수를 먹었던 것일까. 이탈리아인은 언제부터 국수를 먹기 시작했을까. 중국의 국수가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던 것일까.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9,000년 전 밀재배를 시작했고, 기원전 3,000년 경부터 유럽인들은 빵을 주식으로 하게 된다. 그 식생활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14세기 한 의학서에 새로운 형태의 음식이 등장한다. 밀로 만들었지만 빵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가는 실 모양의 밀가루 음식은 ‘트리’ 혹은 ‘이트리아’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파스타였던 것.
14세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는 동방의 진귀한 문물과 함께 이국적인 문화가 유럽으로 흘러들어가는 문명의 창구였다. 당시 베니스, 제네바 같이 동방문화가 활발했던 지역은 이미 파스타를 먹고 있었기 때문에 파스타가 동방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베니스의 전설적인 상인 마르코 폴로는 15세기 전에 중국으로 떠나 당시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세계였던 중국과 아시아를 25년간 여행하고 돌아왔는데, 이 때 그가 중국의 국수를 이탈리아로 가져왔고 이것에서 파스타가 시작됐다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일생에 걸친 여행으로 남긴 저서 ‘세계의 서술’에 의하면 1271년 베니스를 출발해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약 3년만에 중국에 도착해 중국 각지를 여행하게 된다. ‘동방견문록’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책에서 마르코 폴로는 중국 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신비한 오지마을을 여행하며 곳곳의 진귀한 풍경과 이색적인 문화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가 직접 보고 겪지 않았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법한 상세한 묘사도 눈길을 끈다. 그가 여행하고 있었을 시점에 중국에서는 이미 국수가 널리 퍼져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국수를 묘사하는 구절이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전세계에 퍼져있는 130여개의 동방견문록 판본 중 이탈리아 피렌체 도서관에 소장된 원본에 가장 가까운 3개의 복사본 모두에서 국수를 보았거나 가져왔다는 말이 없다. 유일하게 그가 국수를 묘사한 것은 판수르라는 섬을 묘사한 대목 뿐이다. 그가 보았다는 신비의 섬, 판수르는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부근으로 추정된다.
로마로부터 유입설 및 시칠리아 기원설
그런데 국수를 묘사한 대목도 이상한 점이 있다. 그곳의 큰 나무에 흰가루로 가득찬 빵가루 열매가 열리고 이것으로 판수르 사람들이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고 그는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800여년 전 실정에서 그런 기술이 있으리라고는 믿기 어렵다. 마르코 폴로의 가설은 그동안 특별한 검증없이 영화와 대중매체를 통해 확산돼 왔던 것이다.
세계적인 역사학자이자 볼로냐대학교의 맛시모 몬타나리 교수는 마르코 폴로의 가설이 허무맹랑한 속설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가기 전에 이미 이탈리아인들은 파스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파스타를 먹고 있었고 판매까지 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르코 폴로의 가설은 완벽하게 지어낸 이야기다.”
게다가 제네바 고문서 자료관에서 마르코 폴로의 가설이 허구란 것을 증명해 줄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됐다. 13세기 제네바의 각종 사문서를 엮은 책에서 1244년에 쓰여진 한 의사의 처방전에 파스타가 등장하는 것. 처방전은 소화불량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 파스타를 먹지 말라고 권유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으로 떠나기 적어도 25년 전에 이탈리아인은 파스타를 먹었다는 뜻이다.
파스타의 기원에 대한 또 다른 가설 중 하나로 고대 로마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폼페이 고고학 연구소의 아나 마리아 시갈로 씨는 “2,000년 전 고대 로마시대에는 파스타가 없었다”고 단정지었다. 피자와 비슷한 빵이 있었을 뿐이라는 것.
서기 78년 베수비오산의 폭발로 폼페이를 순식간에 뜨거운 용암으로 뒤덮은 사건이 남긴 화석들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점심식사가 끝나갈 무렵에 터진 이 사건은 당시 음식을 고스란히 유물로 남겼지만 그 속에 파스타는 없었던 것. 그렇다면 파스타를 이탈리아에 들여온 수수께끼 인물은 누구였을까.
취재팀은 옥스퍼드대학 보들라이언 도서관에 소장된 1154년 아랍인 학자 무하마드알 이드리시가 쓴 지리서에 파스타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헌을 찾게 된다. 원본은 소실되고 전 세계 13개의 필사본만 남아있는 이 책에는 유럽 곳곳의 지형과 생활이 묘사되고 있는데, 특히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섬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섬의 트라비아란 작은 마을을 묘사한 부분에서 ‘이트리야’라는 낯선 이름의 음식이 등장하고 있다. 이트리야는 파스타의 일종으로 문헌에 등장하는 이탈리아 최초의 건조국수다.
옥스퍼드 대학 동양연구소의 에밀 새비지스미스는 “시칠리아 트라비아에서 이트리야를 대량 생산했으며 이를 카라브리아와 이슬람 국가, 기독교 국가로 수출했다”고 문서의 내용을 전했다.
파스타의 고향 시칠리아는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파스타를 가장 많이 먹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들에게 파스타는 우리에게 밥과 같아 통상적으로 하루에 두 접시는 먹는다고.
그런데 파스타는 왜 유럽대륙도, 이탈리아 본토도 아닌 지중해의 외딴섬에 돌연 등장했을까. 그 단서는 12세기에 지어진 시칠리아 팔라티나 성당 천정의 이슬람 벽화 속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팔라티나 성당은 이슬람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노르만 왕조의 성당이다. 이 성당 벽화에는 200년 동안 아랍의 통치가 시칠리아에 가져다 준 문명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랍인들이 시칠리아에 파스타 전달 가능
827년 어느날, 시칠리아 해안가에 이슬람 군대가 시칠리아를 정복한다. 그 후 그들은 200여년간 그곳을 통치했다. 이슬람들은 불과 200년 밖에 시칠리아를 지배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남긴 문화적 영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슬람들은 앞선 문명을 가져왔다. 그들은 시칠리아에 어류의 일종인 정어리를 잡는 방법과 소금에 절여먹는 법을 알려주고 그 밖에도 잣, 가지, 레몬, 설탕 등을 전했다. 이 때 이트리야로 불리는 건조국수도 함께 전해진 것이다.
몬타나리 교수는 아랍인들이 중세 초기 시칠리아를 점령했을 때 오랫동안 저장 가능한 건조국수 형태의 파스타를 시칠리아에 전해주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런 인과관계는 우연이 아니며 이것이 오늘날 가장 믿을 만한 해석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슬람들은 유럽인보다 먼저 국수를 만들고 그들만의 독특한 국수문화를 갖고 있었지만 현재 이슬람 세계에 국수문화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칼국수와 유사한 모양의 ‘리스타’와 리스타를 햇볕에 말린 ‘아슈리스타’를 이란의 몇몇 농촌마을에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면을 잘게 잘라 수프처럼 만든 국수요리는 이란의 정통 요리지만 이슬람 세계에서 더 이상 주된 음식은 아니다.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이들이 국수를 손으로 집어 먹기에 불편했기 때문일까. 아무튼 이슬람들은 이탈리아보다 먼저 국수를 먹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국수역사에서 멀어졌다.
이 시점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국수의 대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12세기 중국 송나라는 이전의 보수적인 문화를 뒤로 하고 혁신적인 변화를 시도한다. 이 때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에는 현대적인 거리 역사가 중국에 처음 등장했다. 큰 거리와 노점문화가 생겨나고 닭싸움과 각종 묘기 등 새롭고 다양한 볼거리가 탄생한다.
이 때 가장 번창한 사업이 외식업이다. 당시 대형 음식점만도 70여개에 달하고 노점 음식점과 음식 배달문화도 성행한다. 송나라 때 화가인 장택단의 ‘청명상하도’ 그림이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중국, 유럽에 먹거리 혁명 가져다 준 국수
유럽에는 이보다 500년이나 지난 17세기에 들어서야 이런 규모의 레스토랑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된 점을 감안하면 ‘혁명’이란 표현은 결코 지나치지 않다.
당시 송나라에서 가장 인기있던 음식은 국수였다. 맑은 야채국물에 양고기를 얹은 암생연양면, 손으로 눌러 만든 납작한 모양의 국수 세물료기자, 국수에 고기국물을 부어먹는 동피면 등 30여가지의 다양한 국수가 카이펑에서 탄생했다. 12세기 송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발달된 국수문화를 가진 국수 천국이었던 것이다.
당시 파리인구가 10만명이었던 반면 카이펑의 인구는 50만명이 넘는 국제적인 상업도시였다. 카이펑에는 수만명의 서양 상인들과 이슬람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이 때 이슬람 상인은 문명의 중계자였다. 그들은 차와 비단, 향신료 등 동서양의 문명을 실어 날랐다. 중국의 국수문화를 이슬람과 유럽까지 전파했던 메신저가 이들이었을 것이란 설이 우세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수천 킬로미터의 사막을 건너 이동해야 했던 이슬람 카라반 상인들은 독특한 음식문화를 갖고 있었다. 고대 이슬람 문화권은 건조음식 문화가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이슬람 카라반 상인들은 과일과 국수를 건조시켜 오랫동안 보관하며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중세 아랍의 문헌이나 요리책에는 건조국수 요리법에 대한 기록이 많이 발견된다.
북아프리카의 튀니지 마흐디아에도 특이한 국수문화가 있다. 가늘고 짧은 모양의 ‘하마스’란 이름의 국수는 햇볕에 잘 말려 6개월 이상 보관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처럼 이슬람 세계의 국수는 건조해 먹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마도 수천 킬로미터의 사막을 건너야 했던 카라반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건조의 지혜는 이탈리아에 전해지게 됐다.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한 풀리아는 경질밀이 재배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쫄깃한 파스타를 만들기에는 최적의 재료로 오늘날까지 이탈리아의 건조 파스타는 모두 이 지역의 밀로 만들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귀족들의 음식이었던 파스타였지만 산업화와 함께 증기기관을 이용한 대량생산이 시작되면서 민중의 음식으로 재탄생한다. 대량생산과 장기보관이 용이해져 국수는 인류최초의 대량 거래된 식품으로 남게 된 것이다.
현재 이탈리아에서 먹는 파스타의 종류는 300여가지. 모양과 색도 다양하다. 파스타는 이처럼 국수의 또 다른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국수문화는 패스트푸드의 원조
다양한 형태로 전세계에 퍼져있는 국수. 특히 아시아 지역 국가에서 국수는 대도시 직장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런치메뉴다. 이처럼 국수문화의 대중화가 가능했던 것은 도시와 서민문화의 성장이라는 역사적 필연성 때문이다.
간편한 조리법과 짧은 조리시간, 그리고 저렴한 가격 등에 힘입어 대도시의 성장과 함께 몰려든 도시 노동자들에게 훌륭한 한 끼의 식사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크시대 나폴리의 파스타가 그랬고, 에도시대의 소바가 그랬다. 베트남에서도 식민지 시대 이후 경제난 속에서 아침식사로 먹는 쌀국수 ‘포’가 급성장한 바 있다.
1958년 일본에서는 즉석라면이 처음 출연했다. 라면의 탄생은 국수가 원래 갖고 있는 특성에 새로운 식품 제조기술이 결합하여 완성된 세계 음식문화사의 혁명이었다. 이런 면에서 국수문화는 오늘날 ‘패스트푸드’의 원조로 자리매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섣달 그믐날의 특식과 결혼식의 고정 메뉴
국수는 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대중음식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특별한 날 특별한 기원을 담아 먹는 특별식이기도 했다. 특히 일본에서는 매년 섣달 그믐날이면 새해의 건강과 소망을 기원하는 의미로 특별 야참인 메밀소바를 먹었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고다츠에 둘러 앉아 메밀소바를 먹는 풍경이야말로 가장 일본다운 새해맞이 풍습이다.
한국에서도 결혼식이나 나이 많은 어르신의 생신, 혹은 어린아이의 돌 같은 특별한 행사에서는 손님들에게 국수를 대접하는 것이 관례다. 부부의 금술이나 어른의 장수, 어린아이들의 무탈한 성장 등이 오래오래 계속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시작된 관습이다.
회갑연이나 결혼식에 오르는 음식이라는 뜻으로 ‘잔치국수’라는 메뉴가 생기고, 언제 결혼하느냐는 말을 빗대어 “언제 국수 먹을 수 있느냐”는 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중국에서도 장수와 소원을 빌기 위해 면을 먹는 풍습이 있었다. 최근에는 자녀들의 고시합격을 기원하며 시험 전날 면을 꼭 먹게 하는 풍습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음식문화의 퓨전시대 선도
국수문화의 세계화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중국의 ‘초마면’은 일본에 건너가 ‘나가사키 짬뽕’이 되었고, 한국에 와서는 시뻘건 고추국물의 얼큰한 ‘짬뽕’으로 다시 태어났다.
북미로 건너간 이탈리아의 파스타도 새로운 메뉴를 거듭 개발하며 퓨전국수들로 끝없이 변신하고 있다. 국수문화는 태생적으로 세계화와 ‘퓨전코드’를 갖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마인드를 갖고 싶다면 국수문화를 배워 보라는 크리스토프 나이트하르트의 농담이 결코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지난 2008년 대한민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의 식탁에도 오른 국수. 국수의 변신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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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created the first noodle?
The Chinese, Arabs and Italians have all laid claim but the earliest record appears in a book written between AD 25 and 220 in China.
Noodles have been a staple food in many parts of the world for at least 2000 years, but in 2005 the oldest noodles ever found, were discovered inside an overturned sealed bowl buried under three metres of sediment in Qinghai, northwest China. Scientists determined the 4,000 year old, long, thin yellow noodles were made from broomcorn millet and foxtail millet and show a fairly high level of food processing and culinary sophistication.
A noodle includes all varieties from all origins, but wherever they originated, noodles have maintained their popularity over the centuries and owe their longevity to a combination of being relatively cheap yet nutritious and filling, quick to prepare, can be eaten hot or cold, can be stored for years and can be transported easily.
The Traditional Japanese diet included huge amounts of rice. Even today A small bowl of rice is served with almost every meal, including breakfast. Originally from China, noodles have become an essential part of Japanese cuisine, usually as an alternative to a rice-based meal. Soba, thin brown noodles made from buckwheat, and udon, thick wheat noodles, are the traditional noodles, served hot or cold with soy-dashi flavourings. Another popular Chinese wheat noodle, Ramen, is served hot in a meat stock br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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