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marineset 2023. 5. 27. 03:09
The obligation of honorable, generous, and responsible behavior associated with high rank or birth.

지도자의 도덕적 의무/noblesse 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초기 로마 사회에서는 사회 고위층의 공공봉사와 기부·헌납 등의 전통이 강하였고, 이러한 행위는 의무인 동시에 명예로 인식되면서 자발적이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귀족 등의 고위층이 전쟁에 참여하는 전통은 더욱 확고했는데, 한 예로 한니발의 카르타고와 벌인 16년 간의 제2차 포에니전쟁 중 최고 지도자인 콘술(집정관)의 전사자 수만 해도 13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로마 건국 이후 500년 동안 원로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15분의 1로 급격히 줄어든 것도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귀족들이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귀족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에 힘입어 로마는 고대 세계의 맹주로 자리할 수 있었으나, 제정(帝政) 이후 권력이 개인에게 집중되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면서 발전의 역동성이 급속히 쇠퇴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도덕의식은 계층간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져왔다. 특히 전쟁과 같은 총체적 국난을 맞이하여 국민을 통합하고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득권층의 솔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전쟁 때는 영국 여왕의 둘째아들 앤드루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6·25전쟁 때에도 미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당시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아들은 야간폭격 임무수행 중 전사했으며,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아들도 육군 소령으로 참전했다.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이 6·25전쟁에 참전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시신 수습을 포기하도록 지시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6.25 참전 자유우방국 '전쟁영웅들'>

6·25전쟁 때 미국 지도층이 보여 준 모범적인 행동은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 미국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스티븐슨 대통령 후보, 브래들리 합참의장을 비롯하여 육·해·공군 참모총장 등이 한국전선을 방문하였다.
특히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개전 초기 적의 포탄이 떨어지는 한강방어선 시찰을 비롯하여 15차례나 한국전선을 방문하였다.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도 한국전선이 가장 위험한 시기인 낙동강 방어시 최전선을 방문했다.

또한 6·25전쟁에는 미국의 정치 및 군 지도층 자제들이 대거 참전하였다. 2차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 원수의 아들 존(John) 중령이 미3사단 대대장으로 참전하는 등 미군 현역 장성(將星) 아들 142명이 참전하여, 이들 가운데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아들 샘(Sam) 대위는 중대장으로, 유엔군총사령관 클라크 장군의 아들 빌(Bill) 대위는 미9군단장 무어 장군의 부관이었으나 일선 소총 중대장으로 자원하여 단장의 능선 전투 등에서 부상을 입고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 밴플리트(Van Fleet, Jr) 공군 중위는 1948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B-26전폭기 조종사로 야간 폭격임무 수행 중에 실종되어 사체도 발견하지 못했다. 미 해병 제1사단장 해리스 해병소장의 아들 해리스(Harris) 해병소령은 해병1사단 제3대대장으로 장진호 철수작전 중 전사하였다.
또한 한국전쟁시 1950년 7월 8일 미 제24사단 제34연대장 마틴(Martain) 대령의 전사를 비롯해, 해군 참모총장 셔먼(Sherman)제독 순직, 워커 미8군사령관은 교통사고 사망, 무어(Moore) 제9군단장은 전선 시찰 도중 헬리콥터 사고로 사망, 미 24사단장 딘(Dean) 소장은 실종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1951년 원주 전투에서 중공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네덜란드 대대의 대대장 오우덴(Ouden) 중령, 1951년 설마리전투에서 전사한 영국 글로세스터 대대의 대대장 카네 중령, 터키 제1여단 소속의 제1대대장 울운루(Uluunlu) 소령과 제2대대장 빌진(Bilgin) 소령도 1951년 중공군 5월 공세 때 전사하였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유엔 창설 이래 발동한 집단안전보장조약에 의해 유엔군이 파견된 첫 번째 전쟁으로, 전쟁 동안 한국은 전사 17만 명을 포함하여 62만 명, 유엔군은 연 참전병력 193만 8,330명 가운데 전사 4만 670명 등 15만 4,881명이라는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자유의 십자군으로 참전한 유엔군은 전투 및 의료지원국 21개국과 물자지원국 20개국이 유엔에 의해 탄생된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그들의 병사들을 장진호의 혹한과 낙동강의 폭염이라는 더 고통스럽고 어려운 환경에 노출시키며 3년 1개월 2일, 1127일 동안 싸워 승리했던 것이다.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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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본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그 시대 지배층의 역사적 정통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통성 있는 세력이 그 시대 지배층일 경우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줄을 잇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실종되는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당나라의 군사지원에서 많이 찾지만, 그보다는 화랑으로 대표되는 신라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기 660년 김유신의 동생 흠춘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에게 수세에 몰리자 아들 반굴에게 “지금이 충과 효를 함께 이룰 수 있는 기회”라면서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반굴의 장렬한 전사를 본 장수 품일은 자신의 아들 관창에게도 같은 행위를 요구했고, 두 장수 아들의 전사는 신라 군사들의 마음을 격동시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김유신의 아들 원술은 나당전쟁 때 석문전투에서 패전한 뒤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이들은 자식들에게만 희생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다. 김유신이 누구도 불가능하게 여겼던 평양 식량수송작전을 자청했던 서기 671년 겨울 그의 나이는 이미 67살이었다. 그리고 김춘추는 험한 뱃길과 대륙을 마다하지 않고 고구려·왜국·당나라를 돌아다니며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반면 백제는 의자왕과 호족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한창이었고,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아들들 사이의 권력투쟁 끝에 장남 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했다. 세 나라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차이가 나라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이다.

고려의 승군(僧軍)도 노블레스 오블리제 전통의 산물이다. 문종의 왕자 의천이 승려가 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불교국가 고려에서 승려는 지배층의 일원이었다. 현종 1년(1010년) 거란이 침략하자 승장 법언이 9000여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거란과 싸우는 등 승군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자신의 몸을 던졌다.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때 각지에서 양반·유생들이 주도하던 의병이 일어난 데서 볼 수 있듯이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이 지배층 일부에서는 살아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들어 치열한 당쟁 끝에 보수세력인 노론 일당독재가 고착화한 이후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사라지고 일반 백성들을 착취하는 특권층만 남게 되었다. 이들은 심지어 병역의 의무도 외면하고 그 부담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떠넘길 정도로 비양심적인 특권층이었다.

노론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길 때 집권당이었으나 나라가 망한 뒤 아무도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반면 야당이었던 소론의 이회영 6형제와 재야였던 남인의 이상룡 등은 독립운동에 나서 전 재산과 목숨을 바쳤다.

해방은 이들 노론과 친일파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사회 지배층의 지위를 독립운동가들에게 빼앗기는 것은 물론 프랑스에서처럼 처형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조성된 냉전과 이승만의 집권은 친일파들을 다시 득세하게 만들었다. 독립운동가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들에게 다시 억압받았다. 친일파 출신의 사회 주류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먼 일이었다.

6·25전쟁 당시 병사들이 `빽'이라 외치며 죽었다는 일화는 우리 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다. 친일파들은 군사정권과 결탁해 개발독재의 최대 수혜자가 되면서 이 사회의 경제력을 장악했다. 우리 사회 주류들은 병역의무 하나만을 보더라도 일반 국민들보다 현저하게 낮은 수행비율을 보이고 있다. 결국 역사적 정통성이 없는 세력이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제도 실종되고 만 것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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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시작

스포츠맨에게 ‘스포츠맨십’이 필요하고, 시티즌에게 ‘시티즌십’이 필요하다면, 사회의 지도층인사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이란 무엇인가? 높은 직위와 권한을 가질수록 도덕적 책무와 의무 또한 무겁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이다. 그것의 어원은 불어지만, 국적을 가릴 필요 없이 어디에나 사회를 선도하는 지도층이 있다면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정신이다. 아마도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의 태두라면 로마의 귀족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고대로마에서는 귀족들과 평민들의 신분차이로 말미암아 심각한 반목과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해묵은 갈등문제를 현저하게 해결한 것이 로마귀족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이다. 로마귀족들은 전투에 나가게 되면 거의가 기마병이었고 평민들은 모두 보병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말을 탈수 있는 기술은 어려서부터 습득되어 있어야 했는데, 생활이 어려운 평민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말을 가지고 있던 귀족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기병대는 귀족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는데, 기병대는 특공대와 같은 성격으로 전투가 벌어지면 제일 먼저 적진에 돌격해 들어가는 부대였기 때문에 희생자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전쟁시 기마병과 보병의 희생자 비율은 3:1이었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면 평상시 특혜와 특권을 누려왔던 귀족들이 제일 먼저 또 가장 압도적으로 죽으니, 평소에 귀족들에 의해 눌려 지내왔다고 생각해온 평민들로서도 별다른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사회적 스캔들의 주범인 한국의 지도층

한국사회에도 평등과 평준화의 바람은 거세다. 교육의 평준화, 권리의 평준화, 인권의 평준화, 양성평등, 연소자와 연장자의 평등 등, 모두가 평등을 말하고 있지만, 역할에는 보다 중요한 역할이 있고 비교적 덜 중요한 역할이 있는 법이다. 여러 사람들의 안녕과 복지를 책임지는 지도자의 ‘타인본위적 역할’은 자기자신의 일만 책임지는 ‘자기본위적 역할’에 비하여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임무를 맡게 되는 사람의 권한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권한보다 큰 것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태어났다”고 신봉하는 민주사회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권한이 큰 것을 ‘봉사하는’ 권한이나 권력으로 간주하지 않고 ‘군림하는’ 권한이나 권력으로 생각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또 그렇게 생각하는 지도자들이 많을 경우 그 사회의 ‘구심력’은 약해지고 ‘원심력’만 강해진다. 당연히 그런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소속감이 충만할 리 없다. 그러다 보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임승차자로 행동하려고 하고 혹은 기를 쓰고 이민이나 가려고 하는 분위기가 팽배한다. 유감스럽게도 요즈음의 상황을 보면 그런 사회가 우리 한국사회가 아닌가하는 우려를 떨치기 어렵다. 지도층 인사로 자처할수록 보다 많이 베풀고 보다 많이 보살피며 보다 어려운 일에 솔선수범해야 할 터인데, 정치·사회적 스캔들의 주범으로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이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기대하며

물론 지도층 인사라고 해서 한국의 청백리로 이름난 황희나 맹사성 정승을 글자그대로 본받을 이유는 없다. 또 ‘멸사봉공(滅私奉公)’처럼 자신의 사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공공선을 위해서 전력투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일, 혹은 더러운 일에 앞장서 나아갈 이유는 있다. 적어도 일반 사람들보다 더 인색하고 더 부정직하며 더 비겁하고 더 겁이 많다는 비난을 받으면 곤란하다.

우리한국이 나아가고자하는 비전과 방향은 야심만만하다. 그 목표를 ‘2만불시대’의 달성이라고 하든 혹은 ‘동북아 중심국가’라고 하든 여러 가지 범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하는 것이 있다. 어떤 국가적 목표이든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이 강물처럼 넘쳐흐를 때 비로소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 이 땅에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이 넘쳐흐르기를 진심으로 기원하자.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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