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팔로마 [La Paloma]
에스파냐의 작곡가 이라디에르의 하바네라곡.
‘팔로마’는 비둘기라는 뜻이다. 이라디에르는 쿠바를 여행하던 중 하바네라에 매료되어 귀국 후 유럽에 소개하였는데, 이 곡은 그가 여행 중에 작곡한 것이다. 아바나항구에서 떠나는 배를 배경으로 하여 비둘기에게 실려보낸 섬 아가씨의 순정을 그린 것으로 세잇단음표의 선율과 왼손 하바네라풍의 반주가 매우 이색적이다. 한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많이 애창되어 왔다.
"한국어 번안 가사"
배를 타고 하바나를 떠날때
나의 마음 슬퍼 눈물이 흘렀네
사랑 하는 친구 어디를 갔느냐
바다 너머 저편 멀고 먼 나라로
천사와 같은 비둘기 오는 편에
전하여 주게 그리운 나의 마음
외로운 때면 너의 창에 서서
어여쁜 너의 노래를 불러주게
아 치니타여
사랑스러운 너 함께 가리니
내게로 오라 꿈꾸는 나라로
아 치니타여
사랑스러운 너 함께 가리니
내게로 오라 꿈꾸는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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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aloma 음악을 들으면서 쿠바의 정열과 역사속의 혁명이야기를 잠시 흩어본다.
쿠바혁명 [Cuban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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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6일 카스트로의 주도하에서 몬카다병영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면서 게릴라전을 포함하는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노선을 가진 ‘7월 26일 운동’이 결성되었다. 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로 상륙한 후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의 17명이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출발한 게릴라운동은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정권을 축출하고 민주주의혁명을 이루게 되었다.
초기에는 토지개혁 등 민주주의혁명의 성격을 띠었으나, 1960년 후반 이후부터는 사회주의혁명으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미국기업의 국유화와 농업의 집단화를 단행하였다. 4월 16일 카스트로가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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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 1952년 쿠바 바티스타 쿠데타로 재집권
쿠바 아바나의 혁명박물관은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1901∼1973)가 대통령 관저(官邸)로 쓰던 건물이다. 그곳엔 바티스타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을 그려놓은 포스터가 붙어 있다. 포스터엔 각각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독재를 통해) 우리의 혁명이 가능하게 해줘서 고맙다.”
“(쿠바 제재를 통해) 우리의 혁명을 강화시켜줘서 고맙다.”
‘천국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쿠바. 그러나 지정학적으로 쿠바는 미국의 가슴 부근에 도사린 비수다. 반미 정권이라도 들어서는 날엔 몹시 성가시게 된다. 미국은 차라리 독재를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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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스타는 이런 지지를 바탕으로 꼭두각시 대통령들을 조종했고 실질적으로 쿠바를 통치했다. 그 자신도 1940년 대통령을 지냈다.
바티스타와 미국의 관계는 바티스타가 1952년 3월 10일 쿠데타로 재집권하면서 더욱 깊어진다.
바티스타 재집권기의 쿠바는 극단적으로 미국에 종속됐다. 쿠바 전체 공공사업의 80%, 철도의 50%, 모든 석유사업을 미국이 운영했다. 미국 자본가와 마피아는 바티스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아바나에 카지노와 나이트클럽을 열어 수억 달러를 벌어갔다. 아바나는 라틴아메리카 최대의 매춘도시로 성장했다.
아바나의 밤은 화려했지만 국민들의 삶은 여전히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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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시대는 혁명가를 낳는 법.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바티스타의 독재에 마침표를 찍었다. 1959년 1월 1일 미처 날이 밝기도 전에 바티스타는 쫓기듯 망명길에 올랐다. 재집권한 지 7년 만이었다.
미국의 코앞에서 미국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 카스트로는 사회주의로 눈을 돌렸다. 소련의 원조로 미국의 기나긴 경제봉쇄를 견뎌냈다. 그러나 소련이 무너지자 쿠바는 다시 경제난과 국제적 고립에 시달리고 있다.
혁명의 이념과 경제적 풍요, 둘을 동시에 얻기는 어려운 것일까.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늘 넓기만 하다.
[동아일보 2005-03-09 18:30:00]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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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위키백과 guevara.docx
외국사이트/more pictures
체 게바라/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che.hwp한글파일
게바라 [Guevara (de la Serna), Ernesto, 1928.6.14~196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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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65년 3월부터 소식이 끊겨 사망설이 파다하였으나, 카스트로에게 작별의 편지를 남기고 새로운 전쟁터로 달려갔다는 사실이 그해 10월 밝혀졌다. 그는 볼리비아의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 1967년 10월 볼리비아 산중에서 정부군에게 포위되어 부상을 당하고 사로잡힌 후에 총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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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에 《게릴라 전쟁》 《혁명전쟁 여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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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를 잠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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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 [Castro (Ruz), Fidel, 1926/27.8.13~]
1945년 아바나대학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대학 재학 때부터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47년 도미니카공화국에 독재자 트루히요를 타도하기 위하여 침공한 일도 있다. 1948년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발생한 도시폭동사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53년 7월 동지 156명과 함께 쿠바의 산티아고데쿠바에 있는 몬카다군 병영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5년 특사로 풀려나 아바나로 돌아오자마자 멕시코로 망명, F.바티스타 타도계획을 세웠다. 1956년 86명의 동지들과 함께 원정에 나서 오리엔테주(州) 시에라마에스트라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전개, 1959년 2월 바티스타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독재정권을 세워 총리가 되었다. 총리에 취임한 후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접수하는 등 사회개혁을 진행하였으며, 그 해 9월 제1차 아바나선언을 발표하여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제창하였다.
1961년 4월 미국 정부의 지원하에 히론해안을 침공한 반혁명군을 격퇴하였으며, 5월 쿠바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하고, 7월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을 결성, 제1서기에 취임하였다. 1962년 10월 소련의 중거리미사일 반입을 둘러싸고 핵전쟁위기로까지 발전하였으나 미국이 카스트로정부 전복을 기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종결되었으며, 이듬해 제2차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1965년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을 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1966년 1월 아바나에서 3대륙 인민연대회의를 개최하고, 라틴아메리카 인민연대기구를 설립하였다. 당초에는 중·소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 자주독립이라는 입장을 취하였으나, 1972년 코메콘(COMECON:동유럽공산권경제상호원조회의)에 가입한 후 점차 친소적(親蘇的) 성향을 띠게 되었다. 1975년 신헌법을 제정하는 등 사회주의국가체제를 정비하고, 76년 국가평의회 의장(원수)에 취임하여 당·정부·군의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소련 등 동구권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기약없는 카스트로 사후의 공산쿠바
[업코리아 2004-10-23 10:11]
카스트로 건강이상으로 동생 라울 등 후계체제 관심
“혁명가들은 은퇴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국가지도자 중 세계 최장 집권기록을 세우고 있는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78)의 이 말은 과연 언제까지 유효할까. 카스트로가 지난 20일 산타 클라라의 예술대학 졸업식에 참석, 1시간이나 연설을 한 뒤 자리로 돌아가다 갑자기 쓰러졌다.
이날 행사가 마침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 됐기 때문에 쿠바 국민들은 카스트로의 부상 장면을 생생히 볼 수 있었다. 카스트로는 경호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후 마이크를 잡고 “팔도 아프고 무릎도 골절된 것 같다”면서 “내가 쓰러진 모습이 내일 전 세계 신문 1면을 장식할 것”이라고 농담을 하는 등 여유를 보였다. 카스트로가 쓰러진 순간 졸업생 등 3만여 명의 청중들은 일순간 경악했으며 일부 여학생들은 울부짖기까지 했다.
카스트로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은 후 수도 아바나로 후송됐다. 그는 앰뷸런스로 후송되는 도중에도 휴대폰으로 각종 지시를 했으며 수술 때도 하반신만 마취했다. 그의 왼쪽 무릎 뼈는 8개 조각으로 깨어졌으며 이를 접합하고 다시 봉합하기 위해 3시간 15분 동안 수술을 받았다. 그는 이날 밤 쿠바 국영 TV 방송을 통해 “나는 괜찮다”면서“깁스 붕대를 감고서라도 말을 할 수 있고 일을 계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
쿠바 관영 언론은 사고 다음날인 21일 카스트로 의장이 왼쪽 무릎이 골절되고 오른쪽 어깨가 일부 다쳤으나 전체적인 건강상태는 양호하며 정신도 매우 정상적이라고 보도했다. 쿠바 정부도 성명을 통해 카스트로 의장이 이번 일과 관계없이 앞으로 주요 현안에 대해 업무를 계속 볼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카스트로 의장의 측근인 리카르도 알라르콘 쿠바 의회 의장도 아바나 주재 외국 특파원들에게 “그는 매우 강한 사람이며 쾌차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의사들은 카스트로 의장의 부상은 뼈의 골 밀도가 줄어들어서 나온 것이라면서 이는 카스트로 같은 나이의 노인에게 자주 발생하는 사고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번 사고에서도 보듯이 ‘카스트로의 시대’가 점점 저물어가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평소 카스트로 의장이 상당히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해온 미국 마이애미의 쿠바 반체제 단체들은 이번 사고는 그도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1945년 아바나대 법학부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 지도자로 정치투쟁에 참여한 카스트로는 1947년 도미니카공화국 트루히요 독재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원정대에 참여하였으며, 1949년 대학 졸업 후 아바나에서 변호사로 한때 일하기도 했다.
1952년 3월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켜 쿠바의 정권을 잡자 이를 타도하기 의해 1953년 7월 한 병영을 습격하다 체포된 그는 재판에 회부돼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후 멕시코로 건너가 바티스타 정권 타도 운동을 전개했던 그는 1956년 말 다시 쿠바로 들어가 2년 간에 걸친 게릴라전 끝에 1959년 1월 바티스타 정권을 타도하고 혁명을 성공시켰다. 같은 해 2월 총리에 취임한 그는 국가원수인 국가평의회 의장을 비롯해 각료평의회 총리, 쿠바 공산당 제 1 서기, 쿠바군 총사령관 등을 겸임하는 등 현재까지 쿠바를 45년 간 통치해왔다.
이번 부상은 일단 심각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를 계기로 ‘포스트 카스트로 시대’에 대한 논의가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일부 전문가들은 카스트로 이후 승계문제가 더 이상 은밀한 이야기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지난 2001년 6월에도 카스트로는 한 집회에서 연설하다가 졸도한 적도 있어 앞으로 그의 건강 문제는 쿠바 정국에서 태풍의 눈이 될 전망이다.
물론 카스트로는 자신의 후계자로 친동생이자 권력 서열 2위인 라울 카스트로 제 1부통령 겸 국방부 장관(74)을 지목한 바 있다. 하지만 그동안 쿠바의 권력체제는 카스트로 1인에게 집중되어 왔기 때문에 만약 그가 병사하고 라울이 집권하더라도 통치력에 상당한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카스트로는 현재도 허리케인 등 재해나 전력부족 등 모든 일상사와 주요 외교업무를 직접 관장하는 등 권력을 그대로 움켜쥐고 있다. 때문에 후계자인 라울에게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권력누수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라울이 형만큼 카리스마를 갖고 쿠바를 통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재 쿠바는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하고 있는 데다 미국의 대 쿠바 경제제재가 갈수록 강화되고 있어 국제사회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버티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은 지난 45년 간 쿠바를 봉쇄하는 등 카스트로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부시 행정부는 지난 5월 카스트로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쿠바계 미국인의 쿠바 여행을 제한하고 가족들에게 보낼 수 있는 송금액 상한선도 낮추는 등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이번 카스트로 부상 소식에도 미국은 매우 시니컬한 논평을 내기도 했다.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은 21일 “카스트로의 건강보다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온 쿠바 국민의 상황이 훨씬 더 중요하다”면서 “쿠바가 그동안 해온 통치 형태가 종식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국제전략연구소(CSIS)의 줄리아 스웨그 연구원은 쿠바의 정치 지도부는 카스트로가 더 이상 통치하지 못했을 때를 대비하고 있다면서 비록 카스트로처럼 1인 통치를 하기는 어렵지만 동생인 라울을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 체제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집단 지도체제를 구성할 멤버로는 경제 분야를 총괄하는 카를로스 라헤 부통령(53)과 카스트로의 개인비서 출신인 펠리페 페레스 로케 외무부장관(39) 등이 있다. 쿠바 전문가인 미구엘 가르시아 헤이에스 멕시코 국립자치대학 교수는 라울과 쿠바의 젊은 정치 지도자들은 정치는 현 체제를 그대로 고수하되 경제는 개방하는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쿠바는 외국 투자를 유치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카스트로 의장이 쓰러진 장소는 공교롭게도 자신의 공산혁명 동지였던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묘지가 있는 곳이었다. 지난 9일은 체 게바라가 사망한 지 37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부상한 순간 카스트로가 체 게바라의 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장훈(국제문제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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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타나메라(La Guantanamera)/관타나모의 시골여인
[여적] 관타나모
[경향신문 2005-02-01 19:12]
400년 가까이 에스파냐의 식민지배를 받던 쿠바는 1898년 미국과 에스파냐의 전쟁을 틈타 1902년 독립할 수 있었지만 긴 국토의 동쪽 끝에 위치한 관타나모만은 미국에 내주어야 했다. 1903년 맺은 협정에 따라 미국은 매년 약 4,000달러를 임차료로 지불하는 대신 원할 때까지 이곳을 석탄창고와 해군기지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관타나모는 1956년 혁명을 꿈꾸며 그란마호로 상륙한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게릴라전을 시작했던 시에라 마에스트라와도 가깝다.
1959년 카스트로 집권 이래 양국이 티격태격하는 가운데도 관타나모는 여전히 미국 관할이다. 1962년 미·소간의 쿠바 미사일위기 당시 미국 해병 2개 사단이 증파되면서 이 ‘쿠바 속의 미국’은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현재 미국 해병대가 관할하고 있는 이 기지의 이름은 캠프 델타. 유명한 쿠바 민요 ‘관타나메라’는 ‘관타나모의 시골여인’이라는 뜻이라 한다. 톰 크루즈와 잭 니컬슨이 주연한 미국 영화 ‘어 퓨 굿 멘’도 관타나모 기지를 무대로 한 군사법정물이다.
그러나 관타나모를 결정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캠프 델타에 위치한 포로수용소였다. 미군은 9·11 테러 응징을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벌이면서 알 카에다 조직원과 탈레반 전사 등 테러 용의자들을 ‘적(敵)전투원’으로 규정, 수감해 왔다. 그 수는 현재 540명에 이른다. 문제는 그곳에서의 학대·인권유린 행위들이 고발된 것이다. 수감자들에 대한 두건씌우기, 잠 안재우기 등 심리적·육체적 학대가 자행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는 여성 심문관들이 이슬람 남성 수감자들을 상대로 일종의 성고문을 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며칠 전 미국 연방지법이 눈에 띄는 판결을 내렸다. 국방부가 관타나모에 설치한 특별군사법정이 불법이라고 판시한 것이다. 수감자들에게 중요한 증거에 접근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 등이 권리침해라는 이유다. 이 판결은 수감자들을 대신해 소송을 제기한 시민단체들의 승리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이 미국의 ‘어 퓨 굿 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김철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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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쿠바를 비롯한 카리브해에 걸쳐있는 모든 중남미국가의 민요로 사랑받고 있으며, 호세 마르티가 표현한 누에스트라 아메리카 Nuestra America-우리들의 아메리카-의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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