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얻어 듣는 바깥 소식

marineset 2009. 5. 20. 14:15

[원문출처]
http://www.moyiza.com/bbs/view.php?bbid=rest_self_writing&no=20623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자본주의국가, 사회주의국가, 두 초대국, 제3세계 이러루한 관념적인 것들에 국한되여 있었고 넘어지면 코 닿을만큼 가까운 조선과 한국, 일본에 대해서도 김일성, 박정희, 전두환 이런 몇 사람의 이름이나 아는 정도였다. 80년대 중기부터 개별적인 사람들이 국외에로 다녀올 기회가 생겨 우리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바깥 소식을 조금씩이나 얻어 들을수 있었다.

동생이 벽돌집을 짓던 해였으니 1984년이겠다. 그해 북조선에 사시는 큰 아버지가 려권을 갖고 중국으로 친척방문을 오셨다. 고모부가 도문까지 가서 다리를 건너오는 큰 아버지를 마중하였다. 큰 아버지는 적삼과 바지차림으로 손에는 마른 명태 한 보따리를 달랑 들고 걸어 오더라고 했다. 고모부는 차마 보기가 딱하여 도문에서 당장 내복, 웃옷과 바지 그리고 신을 사 입혀갖고 돌아왔다고 했다.

며칠후에 큰 아버지는 아버지와 함께 우리 집으로 찾아오셨다. 우리는 고기와 두부 등 그때로는 괜찮은 음식들을 장만하여 대접하였다. 큰 아버지는 술만 드시고 채소는 별로 집지 않으셨다. 내가 조선의 형편을 물었더니 큰 아버지는 모두 수령님의 덕분에 잘 살고 있다고만 하면서 어려운 사정은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으셨다.


아무런 내색도 내지 않던 큰 아버지는 조선으로 돌아갈 림박이 되자 초조해하는 눈치를 내비치였다. 상점을 돌때에 이 물건 저 물건에 시선을 돌리였지만 차마 사달라고 입을 열지 못하는 모양이였다. 우리 중국의 형제와 조카들은 한 집에서 한두가지 물건씩 사서 드리였다. 나도 살기가 빠듯하였지만 서너달 월급에 해당하는 돈으로 새 자전거 한대를 사드렸다. 갈때도 고모부가 수고하여 도문까지 바래주었는데 다리를 건너갈 때 큼직한 보따리가 대여섯개 되였다고 했다.
큰 아버지의 친척방문을 통하여 나는 조선의 사정을 많이 얻어 듣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어느 정도의 짐작은 해볼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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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아래 내용은 중국 흑룡강성 화남현 조선중학교 교감(부교장)을 퇴직하고 한국에도 수차례 다녀가신 나의 숙부 李吉秀님(사진)의 이야기인데 원문을 읽어보니 구전에 의한 탓인지  내용이 조금 바뀌었다.
숙부님은 바로 오늘, 2009년 5월 20일 새벽 4시45분에 화남현 자택에서 향년 69세를 일기로 영면하셨다.

by badoc블로그* 늘 푸른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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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겨울방학, 화남현이라는 곳에서 연수가 있어 그곳 중학교에 갔던적이 있다. 그곳 중학교 선생님 한분이 얼마전에 한국에 다녀온적이 있다고 하기에 저녁에 한국소식을 들으려고 그 선생님을 찾아 갔었다.

학교뒤의 새 벽돌집이였고 40대의 성씨가 허가인 정치과 선생님이였다. 우리는 그 선생님에게서 밤늦게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그때까지도 중국과 한국사이에는 외교관계가 없었기에 허선생은 한국에 있는 형님이 일본에 있는 한 친척에게 부탁하여 일본으로 초청하게 하여 먼저 일본의 오사까에로 날아가고 한국의 형님도 오사까에로 오시여 오사까에서 형님을 만나보았다고 했다. 허선생은 자기네는 형제가 셋인데 맏형이 한국에 있는 분이고 둘째형은 북조선에 있고 자기는 막내로서 부모와 같이 중국에서 살았으며 부모들은 몇해전에 다 세상을 떳다고 하였다. 조선전쟁때에는 두 형님이 제각기 국군과 인민군에 있었는데 형제간이 총을 들고 서로 죽일내기를 한셈이였다고 했다.


한국의 큰 형은 군대에서 련대장까지 했고 제대한후 서울대학을 나왔고 지금은 한국에서도 한다하는 큰 회사를 경영하고 있단다. 오사까의 호텔에서 만난 두 형제는 그날저녁 같이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모른다고 했다. 술을 마시다가 만난 기쁨에 눈물을 흘렸고 또 마시다가 슬퍼서 울고 울다가 지나온 일을 이야기하고 이야기하다가 또 마시고 울었단다. 나중에는 서로 부등켜 안고 통곡을 쳤단다. 형님은 아마 무혈단신으로 한국에서 지내면서 부모형제들이 몹시 그리웠을 것이고 외롭고 고달플 때가 많았을 것이고 따라서 처음 만나는 동생이 그처럼 반가웠을 것이였다.


실컷 울고 나서야 형님은 “옳지.. 서울에 있는 네 형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빨리 전화를 해야겠다”면서 전화를 걸고 형수에게 인사하라고 하면서 수화기를 넘겨주드란다. “형수”하고 불렀더니 저쪽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금시 맞은켠에서 말하는 것처럼 똑똑하게 들려 오더라고 했다. 우리 듣는 사람들은 그 말에 신기하기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같은 현에서 전화를 걸려고 해도 손으로 전화를 돌려야 했고 또 교환대를 몇군데 거쳐야 겨우 걸려지는 상태였다. 뿐만 아나라 전화도 한마을, 한단위에 한대씩이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음성효과라는 것도 누구의 목소리인지를 가리기 어려웠다. 그런데 나라와 나라사이를 그처럼 당장에서 전화한다고 하는 말에 우리는 리해가 되지 않았고 그저 감탄했을 뿐이다.


형님이 수속을 해주어, 형님과 같이 한국으로 입국했다고 했다. 후에 한국의 신문을 보고야 알게 되였는데 자기는 중국사람으로서 한국에 입국한 두번째 사람이드라고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공항에 많은 기자들이 자기를 취재하려 나와 있드란다. 한국에 들어온 소감을 묻고 중공의 실정을 이야기할수 없는가고 묻드란다. 자기는 말을 아주 조심했고 중국에 불리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다. 서울에 있는 기간에도 기자들을 만날가봐 감히 혼자서는 거리로 나가지 못하고 형님과 같이 하이야를 타고 몇번 서울 시내를 구경하였다고 했다.

텔레비와 신문을 보니 아무개라는 중공에서 중등학교 교원인 사람이 한국에 왔다는 기사가 실렸더라고했다. 자기가 기자들의 물음에 대답한 말 몇마디도 그대로 실렸더란다. 그렇게 며칠간 한국에 있다가 다시 일본을 거쳐 조용히 중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돌아온후 중국정부의 비준을 받지 않고 갔던 일때문에 은근히 근심스러워 하였단다.


그러던중 하루는 지프차가 집앞에 멈처서더니 몇사람이 차에서 내려 자기를 찾드란다. 속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별수없어 그들을 따라 나섰는데 차는 가목사 시내로 들어가 가목사지구의 정부초대소에 이르렀고 3층에 있는 접대실로 자기를 데리고 들어가드란다. 간부같아 보이는 몇 사람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사람들은 통일전선부의 부장 등 몇사람이라고 소개를 하는데 아주 상냥하게 대해주고 한국에 어떻게 가게 되였고 한국의 형편이 어떻던가를 물어 보았단다.

그리고 생각밖으로 저녁술상까지 풍성하게 차려 자기를 잘 접대해주더란다. 그리고 자기들이 도와줄만한 애로사항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더란다. 그들의 성근한 태도에 그는 믿져야 본전이겠지 하고 집의 호구가 여전히 농촌호구여서 어려운 문제와 현성으로 올라온후 처자식의 일자리 문제를 말해 보았다고 했다. 그 선생도 나처럼 원래는 농촌호구였던 모양이다. 그 선생은 그저 그렇게 물어보는 거겠지 하고 희망은 걸지 않았다고 했다. 그날 저녁 집식구들은 선생이 잡혀가 고생을 하는것 같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한다.


그후 현에서 초대하고 또 공사에서도 초대하면서 자기를 아주 대단한 사람처럼 대하드란다. 며칠이 지나자 현 공안국에서 집의 호구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통지가 오고 또 며칠후에는 처와 자식을 현의 어느 기업에 안배하였으니 아무날부터 정식으로 출근하라고 하드란다. 그 선생님은 왜 정부에서 자기네를 그처럼 우대하는지 모를 일이라고했다.

그 선생은 학교뒤쪽의 넓은 마당에 덩실하게 새로 지은 벽돌집에서 살고 있었고 집안에 갖추어 놓을것은 다 갖추어 놓고 있었다. 교원으로서 그런 정도로 잘 사는 사람을 나는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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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어느날, 우리 학교 림주임네 집에 요사이 미국에 갔다가 돌아온 분이 왔다고 해서 나는 미국 이야기를 들으려고 찾아갔다. 그분은 50대의 중년분이였는데 어느 신문사에서 기자로 사업하고 있다고했다. 삼촌이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기업을 경영하고 있고 그 삼촌이 요청하여 한달전에 미국에 가서 한보름 지내면서 로스앤젤레스, 샌프로시스코, 뉴욕 등지를 돌아보고 왔다고 했다.

비행기가 태평양을 나는데 열대여섯시간이나 걸려 매우 지루하게 느껴지더라고 했다. 비행기가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여 시내 상공을 한바퀴 돌다가 내리는데 시내가 중국의 시내처럼 빼곡하지 않고 매우 넓게 널려 있드라고 했다. 별장같은 독립가옥이 매우 많고 공중에서 내려다 보니 집집마다 앞마당에 거울처럼 반짝거리는 것들이 있기에 무었인지 의문스러워 했고 내려가 보니 집집마다 정원에 수영장이 갖추어져 있어 수영장의 물이 반사되여 그처럼 반짝이드라고 했다.

자동차는 거의 사람마다 갖고 있고 시내가 너무 넓고 분산되여 자가용차가 없어서는 아무일도 할것 같지 못하더라고 했다. 우리 말대로 하면 아버지 없이는 살아도 자동차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겠다.

중공에서 손님이 왔다고 하여 사람들이 누구네 집에 모인다고 전갈이 와 샌프로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중간쯤에 위치한 그 집으로 차를 타고 갔더니 집안에 부부동반한 사람들이 3,4십명이나 모여 있드란다. 앞다투어 중국소식을 물어보는데 그걸 대답하느라고 땀을 흘렸다고 했다. 오래간만에 이처럼 모였다면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다나니 어느덧 밤이 깊어졌단다. 이젠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니 그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차를 몰고 어느사이에 다 사라져 버리드란다. 저분네들은 어디에서 사는 분들이기에 이렇게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가는가고 물었더니 삼촌은 여기에서는 백리나 2백리쯤은 이웃집으로 생각한다면서 얼마 안걸려 집에 도착한다고 대답하드란다. 고속도로에 나서 보면 자동차들이 얼마나 빠른 속력으로 달리는지 발동기 소리는 들을수 없고 쉿쉿하는 바람소리만 들릴뿐이란다.그러니 백리쯤 되는 거리를 눈깜짝할새에 달린다는 말을 믿을만 하더라고 했다.

로스앤젤레스서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가는데 중간에 시카코에서 내려 한시간쯤 쉬고 다시 타고 갔단다. 시카코에서 쉬려고 내리는데 한국사람같아 보이는 사람 서너명이 저마다 손에 걸레를 들고 급히 비행기로 오르기에 사람들이 다 내리는데 저사람들은 왜 올라가는가고 물었더니 삼촌은 그 사람들은 비행기가 쉬는 사이에 기내를 청소하는 림시공들이라고 대답하드란다. 비행장의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아버지와 딸같아 보이는 한국사람 두사람이 역시 손에는 걸레를 들고 있었고 허리를 굽혀 화장실를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고 화장실을 나오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팁을 한두딸라씩 건네 주드란다. 지금 우리 조선족들이 돈을 벌려고 한국에 가서 힘들고 어지러운 일들을 하고 있는것처럼 80년대에는 한국사람들도 미국과 같이 발달한 나라에 가서 그렇게 돈을 벌었던것 같다.

그리고 미국사람들은 허리띠에 라이타만큼한 작은 물건을 차고 다니다가 그것에서 삑삑하고 소리가 나면 가까운 곳의 공중전화기를 찾아가 전화를 하드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것이 무엇일까하고 궁리했다. 불과 10년도 안되여 그 삐삐기는 중국에서도 신속히 보급되였고 지금은 핸드폰시대에 들어간지도 아득하게 오래되였다.

그러루한 이야기들을 재미나게 듣노라니 마치 자기가 미국을 다녀온 느낌이 들었다. 우리도 그네들처럼 살수는 없을까? 모르지, 혹시 오래 살다보면 그런 세상을 볼지도 모르지...하고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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